오늘 오전에 우리 마산마을 이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추 말려놨으니 ‘얼른’ 가져가라는. 며칠 전 아침 마을방송으로 마스크 받아가라는 고지를 분명 듣긴 들었는데 차일피일 게으름부리다 결국은 그저께 낮에 이장님으로부터 ‘낼 아침에는 꼭 마스크 찾으러 오라’는 전화를 친히 받은 바, 송구스런 마음 금할 길이 없던 차였다.
어제 아침 7시 정각, 티비에쓰 시보를 듣자마자 49씨씨 스쿠터를 타고 바람에 머리칼 날리며 핸들 오른쪽 액셀러레이터를 20초 간 힘차게 당겨 리사무소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아침점호처럼 힘차게 인사하니 서너 분의 어르신들과 이장님이 예의 환한 미소들로 응수해주신다. (애정하는 동생 #강민경은 어느 날 그가 근무하는 면사무소에서 날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라버니와 우리마을 이장님이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따금 강두희 이장님의 미소를 닮아보려 거울 앞에서 미소 짓는 연습을 한다)
‘자네가 마지막’이라면서 책상서랍을 열더니 숙련된 행원이 돈 세듯 마스크를 다섯 장씩 다섯 번 짚고는 ‘다섯 명이지’ 하면서 챙겨주셨다. 마스크 한 보퉁이를 들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오다 탐정 모돌이처럼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문가에서 다시 돌아서 ‘이장니임~’ 부르고는 목소리는 내지 않은 채 입모양으로만 벙긋거렸다.
응, 알았네.
척하면 척.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오늘 오전에 기다리던 전화가 온 것이었다. 어제 내가 무언으로 말씀드린 건, 고추 되면 전화주세요,였다. 엿새 전쯤 올 김장 담글 구상을 하다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 바로 옆집에 같이 살던 이장님 댁을 생각해냈던 거다.
당시에는, 그러니까 6~7년 전쯤에는 나름 무농약 농사를 짓겠다며 고군분투하던 때였다. 어찌어찌하여 고추를 따는 데까진 그럭저럭 성공하는데, 꼭 그 다음 단계부터가 문제였다. 그럴 것이, 햇볕 쨍해 마당에 널어놓고 나가는 날엔 자주, 갑자기 소낙비가 내렸다. 그런 날은 어디선가 꼭 낮술을 먹고 있었고. 비 좋네, 하면서 술 마시다 보면 어느새 마당에 널어놓은 금쪽같은 고추는 저만치 뇌리에서 멀어져갔다. 덜 떨어진 얼치기 농부.
그러니까 볕에 말리다 비 맞추다, 볕에 말리다 온 마당 너저분하게 바람에 날리다 하면서 태양초 만들겠다고 큰소리만 치는 내 꼴을 서너 해 낮은 돌담 너머로 지켜보신, 존경하는 강두희 이장님이 어느 날 강아지 부를 때같이 조용한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올해도 고추 심었지?
예.
올해는 고추 따면 우리집으로 모아서 가져오게.
예?
내가 말려줌세.
예.
마지막 대답할 때는 힘이 사그라졌다. 속으로 생각했다.
‘다 보고 계셨구나.’
(나중에야 알았지만 여기선 옆집이 뭐하는지 대략 다 안다, 다만 모른 척할 뿐. ㅎ)
그렇게 해서 이사하기 마지막 이태 동안은 이장님댁 건조기에서 아주 깔끔하게 루비 빛으로 다시 태어난 ‘나의 고추’로 고춧가루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역시 열 근의 미끈한 마른 고추를 투명비닐포대에 담아 건네주시면서 또 물어보신다.
집은 구했나?
예, 간신히...
다행이네. 자네는 우리 마을에 그대로 남는 거지?
예.
내년부터섬은 고추 구하려거든 초장에 구해야 돼. 중반 넘어가믄 비싸지거든. 그때가 씨알두 좋고.
알겠습니다, 이장님.
같이 잘 살아보세 잉?
예.(몹시 감격해서 ‘옛썰’이라고 답하면서 거수경례를 붙일 뻔했다)
오후 두 시부터 마루에 고추를 펴놓고 일곱 시 반까지 꼭지를 땄다. 다섯 시간여 동안 라디오에선 한동준과 박승화와 배철수가 꿈속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10년여 간 내게 온화한 배려를 베풀어준 수많은 구례사람들의 얼굴 표정과 조언들이 함께 지나갔다.
‘나는 그들에게 무얼 할 수 있을까’.
8월 8일의 수재 이후 문 닫혔던 구례오일장이 내일부터 다시 열린다. 수많은 상처들이 거기에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수재 이전의 왁자한 웃음소리들 대신 서먹함과 약간의 뻑뻑함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려면 사람이 많이 모여야 한다. 우선 내 한 몸이라도 거기에 보태야겠다.
장터 방앗간에 가서 이 고추부터 빻자.
첫댓글 드뎌 고추농사 10년만에 성공
꼭지를 따는 모습이 한층 여유롭습니다
내가 지은 게 아니라 이장님한테 산 건디요^^
@정동묵 엥?
잘생겼다..!
ㅎ~^^ 뉘시온지.
동네에 인정이 있네요
예 그 인정 먹고 살고 있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