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수덕사와 공동으로 종단이 제정한 법인관리법(법인관리 및 지원에 관한 법) 시행을 앞두고 ‘수덕사와 선학원’이라는 주제의 기획을 4회에 걸쳐 마련했다. 이를 통해 선학원 설립 중심에는 종단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더불어 수덕사의 공헌도를 살펴본다. 구체적으로 본지는 선학원의 설립과 수덕사의 역할을 조명하고 현재 수덕사가 선학원 설립정신을 잇는 역사의 흐름을 조명한다. 또한 수덕사 산내선원인 정혜사와 무학대사와 만공스님의 기도처인 간월암 문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불식시키고, 산중 어른인 덕숭총림 수덕사방장 설정스님을 만나 선학원과 수덕사에 얽힌 문제해법을 들어본다. |
글 싣는 순서 1. 선학원의 설립과 수덕사 2. 선학원 정신 잇는 수덕사 3. 수덕사에 대한 선학원의 부당한 행위 4. 덕숭총림 방장 설정스님에게 듣는다
|
수선납자들이 앞장서 설립한
선학원은 경허스님 선풍진작이
일구어 낸 가시적인 결과물
수덕사 등 종단사찰 소속
스님들이 재산 출연해 재건
전국차원으로 선풍진작 앞장
930년대 ‘선학원’에서 적음스님(원점 좌측)이 만공스님(원점 우측)에게 입실건당 할 당시의 사진. 두 스님은 모두 수덕사 출신으로 만공스님은 선학원의 초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적음스님은 선학원재건과 더불어 1950년에 이사장을 맡아 선학원 설립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
1900년대 초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 지배의 야욕을 보이면서 한국불교를 침탈하기 시작했다. 왜색불교를 추종했던 원종의 종정이었던 이회광은 1910년 일본에 건너가 한국불교를 일본의 조동종과 교류한다는 협약을 체결한다. 이에 한국의 뜻있는 스님들은 왜색화된 일본불교를 받아들이는 이회광의 행위를 한국불교를 매종하는 행위로 규탄하고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1911년에는 조계산 송광사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운 스님들이 모임을 갖고 한국불교가 임제종임을 천명하면서 ‘조선임제종 임시사무소’를 설치한다. 이는 한국불교 선 전통이 일본의 조동종과 다름을 천명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왜색화를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1912년에는 서울 인사동(당시 경성 사동 28통6호)으로 임제종 종무원을 옮기고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의 현판을 철거하라고 강제하고 임제종이라는 이름 사용을 금지시켰다. 대신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종명을 쓰도록 강압한다. 하는 수 없이 인사동의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의 현판은 내려지고 ‘범어사경성포교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선학원은 한국선불교의 중흥조 경허스님의 선풍진작 운동이 일구어낸 가시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선학원 설립의 주역들이 모두 수선 납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조계종사>에는 “경허스님의 법제자인 만공스님은 덕숭산 수덕사 정혜사(定慧寺)에 주석하시며 납자들을 제접해 왔고 경허스님의 전법 제자였던 많은 수좌들이 선학원 형성과 전개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선학원은 수덕사 만공스님, 범어사 남전스님, 석왕사 경성포교당 도봉스님이 주축이 되어 1921년 11월30일 서울 안국동에 ‘조선불교 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다. 이는 일제의 사찰령 발표 이후 왜색화된 불교를 거부하고 한국불교 전통을 계승하기 위함이었다. 선학원은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에 예속되지 않고 자주적으로 불교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반 사찰처럼 ‘사(寺)’나 ‘암(庵)’과 같은 이름을 쓰지 않고 ‘원(院)’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선원 납자들을 중심으로 선학원 건립불사가 추진된 만큼 선학원은 건립단계부터 수 차례에 걸쳐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사찰 운영권은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혼인을 한 대처승 주지에게 집중돼 있었다. 납자들은 수행할 마땅한 장소를 찾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나마 선방에는 식량조차 부족해 정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선학원 건립불사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으로 1921년 5월 서울 종로에 위치한 석왕사 경성포교당에서 보살계 계단이 열렸다. 이날 법회에서 만공스님이 다음과 같이 법문했다고 <만공어록>은 기록하고 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금 조선불교는 완전히 식민지 총독 관할 밑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총독의 허가 없이는, 사찰의 이전, 폐합으로부터 절간에 있는 온갖 재산, 기물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손을 댈 수가 없게 돼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파국이라 지금 조선 중들은 자꾸만 일본 중처럼 변질이 돼 가고 있단 말입니다. 진실로 불조정맥을 계승해 볼려는 납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런 말이죠. (중략) 우리는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사람끼리 운영을 하는 선방을 하나 따로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 회의를 부치게 된 거 올시다.”
보살계 계단 법회에서 성월스님은 범어사 경성포교당을 처분하여 지원할 의사를 피력했고 포교사 남전스님과 범어사 석두스님이 각각 2000원을,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 도봉스님이 1500원을 희사하는 등 선학원 설립을 주도했다. 보살계 계단도 성공적으로 회향돼 총 2만7000여원의 불사금이 모연됐다. 선학원 건립불사는 1921년 8월10일 들어가 3개월만인 11월30일 준공했다.
선학원은 1922년 3월 선풍진작과 선수행의 상부상조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결성했다. 선우공제회에 365명의 납자가 가입하는 등 상당한 발전을 이뤘지만 재정난이 또 다시 발목을 잡았다. 재정난으로 인해 선우공제회는 1924년부터 활동이 중단됐으며 선학원마저도 1926년 5월 범어사 포교소로 전환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침체된 선학원의 재건은 적음스님이 만공스님으로부터 ‘초부’라는 당호를 받으면서 ‘선학원을 복원하라’는 하교(下敎)를 받고 1931년 1월 선학원을 인수하면서 선학원 재건에 매진하여 중흥의 계기를 마련했다.
출가 전부터 침술과 한약에 관한 연구를 했던 적음스님은 ‘명의(名醫)’로 이름을 날리며 선학원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적음스님이 병을 고치되 고친 값을 받지 않았지만 병을 고친 이들이 감사의 뜻으로 시주가 줄을 잇자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선학원은 다시 활기를 띄게 됐다.
또한 1931년 10월 잡지 <선원>을 창간해 선의 대중화와 더불어 선학원 활성화를 도모했다. 선학원이 선의 중심기관으로서 역할을 회복하면서 1931년 3월 전국수좌대회를 개최했다. 1933년에는 전조선수좌대회를 개최해 ‘선우공제회’를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전환했다. 여기에는 만공, 탄옹, 적음, 용음스님 등 총 9명의 선사 스님들이 발기인으로 나선다.
당시 선리참구원의 설립취지는 ‘수좌들이 안심하고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어 주는 것이 급선무이며 수좌 및 신도들이 재산을 출연하여 법적으로 그 재산을 보호받게 하고, 그로부터 나온 재원으로 수좌들의 수행을 후원할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1934년 12월에는 재정과 조직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개편한다. 선학원은 재정을 제도적으로 확립해 수선 납자들의 수행 환경을 개선하고 위상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재단법인을 설립했으며 이사장에 만공스님, 부이사장에 한암스님, 상무이사에 성월·남전·적음스님이 각각 소임을 맡았다. 재단법인 설립에는 수덕사와 직지사, 김용사 등이 앞장섰다.
1935년 10월 발간된 <선원> 제4호에 실린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설립당시 기부재산자 일람표’에는 1933년 8월 재단법인화에 참여한 기부자 명단과 주소, 지목(地目), 지적(地積), 지가(地價) 등 세부내역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이처럼 선학원 설립과 재건의 역사에는 수덕사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설립을 주도한 만공스님의 역할과 재건에 앞장선 적음스님이 그 중심에 있다. 그러다보니 만공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수덕사, 정혜사 그리고 견성암 스님들 명의의 논과 밭을 선학원 재산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전국 모든 사찰은 총독부에서 관할하였기 때문에 (재)선학원에 사찰을 출연하거나 사찰 명의의 농지를 출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발행한 <선원>지에 따르면 정혜사와 견성암에 주석하셨던 스님들 명의의 논과 밭이 출연된 것은 다음과 같다. 만공스님이 논과 밭 2만4328평(8492원10전), 서경스님이 5291평(2051원10전)을 출연했고 법천, 법인, 벽초(마경선)스님이 논과 밭 4162평(1329원40전)을 출연했다.
법인 설립 시 수덕사에서 출연한 토지는 전체 토지의 21.3%에 달했다. 이밖에도 대부분의 종단 소속 사찰의 스님들이 논과 밭, 건물을 출연했다.
선리참구원은 1941년 청정한 승풍을 드날리기 위해 전국의 청정비구 34명을 초청한 고승법회인 유교법회도 봉행했다. 유교법회는 만공스님, 동산스님 등이 주축이 되어 <범망경>과 <유교경> 등에 대해 설법했다. 법회 후에는 비구승으로 결성된 범행단(梵行團)을 조직해 선학과 계율의 종지를 선양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50년에는 적음스님이 이사장으로 추대되었고 1953년에는 창건당시의 명칭을 회복하여 ‘재단법인 선학원’으로 법인명을 등기했다.
수덕사 선학원대책위원회 위원장 효성스님은 “만공 선사께서 선학원을 설립하신 목적은 일제치하에서 사찰령에 지배받지 않는 선원을 만들어 왜색불교에 저항하고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설립하신 것이고, 수행환경이 열악해진 시기에 선원 수좌들의 후원 조직인 ‘선우공제회’를 발족시켜 수좌들에 대한 재정지원과 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셨다. 이는 선학원 설립 시 초대이사장을 맡아 설립과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셨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만공선사의 뜻을 따라 수덕사 문중 스님들은 모든 농지를 기꺼이 출연하였던 것이고 지금까지 정혜사, 견성암에서 그 농지를 경작하며 수좌들이 모여 오롯이 수행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불교신문3045호/2014년10월1일자]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