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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답시和答詩란?
《갱재축賡載軸》이란 ‘권축卷軸’이 있다. 임금이 지은 시가詩歌에 신하들이 화답하여 쓰면 그 시詩를 모아 축軸(두루마리, 족자)으로 장정裝幀’ 해놓은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갱賡’은 ‘잇는다[續]’는 뜻이고 ‘재載’는 ‘완성한다[成]’는 의미로 ‘갱재賡載’는 서로의 노래를 주고받아 비로소 완성했음을 의미한다. 즉 ‘갱재시’는 타인이 지은 시의 운韻이나 의意를 파악하여 그 시의 뜻에 맞추어 화답한 시를 말한다. 갱재시는 《서경書經》〈우서虞書〉의 ‘익직益稷’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고대의 순舜 임금과 신하인 고요皐陶가 서로 권면하며 주고받은 노래가 그 시원을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정조가 신하들과 갱재시를 짓고 다수의 《갱재축》을 장정裝幀한 것으로 나타난다. 정조 20년(1796)에는 그동안의 〈갱재축〉을 《갱재축》으로 반포하였는데 그 서목(書目)이 48권이나 될 정도로 방대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일부 인용 〈편집자 주〉 |
화답시和答詩 찬가讚歌
印黙 김 형 식
새벽에 일어나
귀뚜리와 놀고 있다
후배 우병기 詩人이
필자의 시 〈노하지 말게〉에 화답詩를
보내왔다
하여, 귀뚜라미에게
자고로 옛 시인들은
화답시를 즐겼습니다
저의 시가 깜이 됩니까
부끄럽습니다
좋은 명시를 만나야 합니다
좋은 시를 만나서 명작을 남기셔야 합니다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박목월의 〈나그네〉 같은 명시를 남기셔야 합니다
하고 놀다가 화답시의 뿌리를 찾아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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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답시는 고대의 순舜 임금이 지은 노래에, 신하 ‘고요皐陶’가 노래를 주고받은 〈갱재가賡載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임금이 지은 시가詩歌에 신하들이 화답한 〈갱재시賡載詩〉들을 모아 간행한 《갱재축賡載軸》이 현존한다.
특히 조선 정조正祖의 詩에 신하들이 화답한 시들을 모은 《갱재축》이 다수 남아 있다.
명나라에서 온 사신 ‘예겸’과 조선의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의 격이 높은 ‘화답시’를 엮은 《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이 있다.
그 당시 외교적 탐색과 아울러 미묘한 대결 구도가 펼쳐졌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상대의 학문적 성취에 대한 존경심을 쌓으며 헤어질 때는 서로에 대한 정을 나누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겸은 정인지에 대해 “그대와의 하룻밤 대화는 10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라고 감탄하였고, 자신과 나이가 비슷했던 신숙주와 성삼문을 사랑하여 형제의 의를 맺었다고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載叢話》에 기록되어 있다.
《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을 시발로 인조 11년(1633)까지 180여 년 간 모두 24차례에 걸쳐 주고받은 시들을 모아 각 시기별로 편집된 《황화집皇華集》이 있다.
화답시는 그 시대를 조명하는 사기史記이며 인문학의 서書임을 알 수 있다.
그간 남겨 놓은 ‘화답시’ 중 몇 편 발췌했다.
내 친구는 몇인가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화답시
인 묵 김 형 식
내 친구는 몇인가
책과 茶, 詩와 스마트폰
차 내오는 아내가 있으니
이 더욱 반갑구나
듭시다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스승의 회초리는
만나 뵙기 어려웁고
부모님 그림자는
떠나신지 오래이니
이 나그네 지혜의 샘은
오직 책뿐인가 하노라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잎 지거늘
茶야 너는 어찌 봄, 가을을 모르는가
心中에 맛이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쉽게 지고
청춘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늙어가는가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詩 뿐인가 하노라
앵무새도 아닌 것이
사전辭典도 아닌 것이
글은 누가 가르쳤기에
속은 이리 꽉 찼는가
만사에 저리 해박하니
그를 좋아하노라
둥근달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집안의 밝은 빛 당신 만한 이 또 있겠소
평생을 함께 지내니 내 벗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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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년 전 대문호 고산 윤선도님의 시에 화답시를 올리는 이 홍복, 시인이 아니고 서야 어찌 누리랴. 감개무량 할뿐입니다.
님은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을 다섯 벗으로 두었으나 나는 책, 茶, 시, 스마트폰, 아내를 다섯 친구로 두었습니다. 격세지감입니다. 님의 시 〈오우가五友歌〉를 패러디 해 화답시를 내 놓습니다.
〈오우가五友歌〉
-내 벗은 몇인가 하니
윤 선 도
내 벗이 몇인가 하니
물과 돌, 솔과 대
동산에 달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구나
좋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 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쉽게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노니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가
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 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을 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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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尹善道(1587∽1671),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
작가가 56세 때 해남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속에 들어 있는 6수의 시조로,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을 다섯 벗으로 삼아 서시序詩 다음에 각각 그 자연물들의 특질을 들어 자신의 자연애自然愛와 관조를 표현하였다. 이는 고산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어 시조를 절묘한 경지로 이끈 백미白眉이다.
나의 남편(비익연리比翼連理)
- 문정희 시인의 〈나의 아내〉에 대한 화답시
인묵 김 형 식
나에게도 남편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름날 구리빛으로 익은 변강쇠 같은 남편
꼭 껴안고 자고 나면 자기의 씨를 내 몸 속에 심어
당신의 손을 잇게 해 주는 남편
내가 알뜰하게 살림 살면
월급봉투 내밀며 고마워하고
친정나들이 할 때나 동창 모임이 있을 때
용돈 넉넉히 주며 베풀고 오라는 남편
또 책을 보거나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면
차 한 잔 들고 와 과일을 깎아 주는 남편
언제나 마음을 들여다보라며 가끔 내 거울을 닦아주고
늘 아내를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는
내 소유의 하늘
당당한 우리 집안의 태양
나를 어머니로 할머니로 만들어 주고
두 성씨 하나로 이어주는 연리지連理枝 남편
전설 속을 날고 있는 새 한 마리처럼
아무도 본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존재를 마주 보고 있는 비익조比翼鳥 같은
오오, 나에게도 그런 남편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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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連理枝 :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가 허공에서 만나 하나로 합쳐진 나무.
*비익조比翼鳥 : 눈과 날개가 하나인 전설 속의 새.
*비익연리比翼連理 : 부부간의 사랑을 비유하는 말로 비익조와 연리지의 합성어.
〈나의 아내〉
문 정 희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 잔을 끓여다 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부석사
-백률당柏栗堂 금보琴輔의 시 〈부석사〉에 화답시
인묵 김 형 식
희수喜壽에 표연히 불교아동문학회 선후배와 함께
제8차 학술대회 마치고 영주 부석사에 오르니
난정蘭亭* 모임 부러울 것 없도다
불도를 닦는 이 행도에는 다 지상의 선재동자라
신현득, 김종상, 고광자, 홍재숙, 권영주, 권대자, 박 희, 김재순, 최명숙,
이신경, 박윤덕, 문기섭, 이영희, 공현혜, 정옥임, 고순례, 이명옥, 김동억,
이동배, 홍문식, 박정우, 정소영, 이성자, 김미라, 양인숙, 윤명희, 박덕규와 함께 ‘부석사’ 참배 하며 쓴 화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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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蘭亭 모임 : 중국 진晉나라 때, 왕희지, 손탁孫綽, 사안謝安 등 41명이 ‘산음山陰’ 난정에서 계연禊宴을 베풀며 시를 지어 읊은 모임. 목제穆帝(영화永和 9년, 353) 3월 3일에 열린 이 모임에서 쓴 시를 모아 왕희지가 서문을 쓰고《난정집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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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여 년 전 금보琴輔가 쓴 시 〈부석사〉를 불교아동문학회의 참배시로 화답하다. 100년, 500년 세월이 지난 후에 어느 문학단체 후학들이 부석사를 참배하고 이 글에 또 화답시 하나 이어 쓸 것인지 눈 밝은 이 있으면 일러 보시오.
〈부석사〉
금보琴輔(1521∼1584)
구장**에 표연히 선후배 함께
구장표연鳩杖飄然 공후선共後先
맑고 화창한 좋은 시절 봉황산 꼭대기에서
청화가절봉산전淸和佳節鳳山顚
난정蘭亭 모임이 무엇이 부러우랴
난정승회하수선(蘭亭勝會何須羨)
도를 다투는 이 행도에는 다 지상의 선인이네
쟁도금행총지선(爭道今行總地仙)
김언우金彦遇, 이문규李文奎, 구경서具景瑞, 금협지琴夾之, 금문원琴聞遠, 정자중鄭子中, 유성룡柳成龍 등 부석사에서 노닐며 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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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보琴輔(1521~1584), 본관은 봉화奉化. 호는 梅軒, 柏栗堂. 1546년 사마시에 합격 외종조부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성리학에 심취, 글씨를 잘 써 이숙량李淑樑, 오수영吳守盈과 더불어 宣城三筆이라 불리우며 퇴계의 묘비와 도산서원의 편액을 쓰기도 함. 저서로 《사서질의四書質疑》, 《심근강의心近講義》, 《가선휘편嘉善彙編》과 《매헌문집》 1질帙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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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鳩杖) : 머리에 비들기 모양을 새긴 지팡이로 국가의 공신이나 원로대신으로 70세가 넘은 사람이 벼슬에서 물러날 때 임금이 하사하였다. 비둘기는 음식을 먹어도 체하지 않으므로 체하지 말고 건강하라는 뜻에서 구장을 주었다고 한다.
불아화佛兒花
-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부석사 〈선비화〉의 화답시
인묵 김 형 식
부석사 선비화*는 의상 대사 지팡이요
축서사** 불아花는 ‘불아문의 지팡이’라
축서사鷲棲寺 탐방 끝내고
버스에 오르기 전
김종상 시인이 건네 준 대나무 지팡이 받아
성보전 뜨락에 꽂아 놓고
회원 모두 모두 합장하며
의상대사의 지팡이 소환하네
이 지팡이 다시 살아나 대숲을 이루소서
축서사에 우담바라 피어나면
세인들 이를 일러 불아花라 부를것이요
먼 훗날 시인묵객들 ‘축서사’ 찾아 ‘불아花’에 감흥, 글을 남길 것이니 그 중에 분명 인연 있는 이 있어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부석사 〈선비화〉를 차운하여 ‘축서사 불아花’로 답시 남길 것이로다
부석사 선비화는 의상 대사 지팡이요
축서사 불아花는 ‘불아문의 지팡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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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화 :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조사당 앞에 꽂아 놓았더니 부활하여 살고 있다고 전하는 ‘골담초’인데 선비화라고 부른다.
**축서사鷲棲寺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물야에 있던 지림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산에서 서광이 뿜어 나와 올라가보니 바로 이곳에 비로자나석불이 있어 모시고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축서鷲棲라는 이름은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영축산(靈鷲山)을 본뜬 것이라고도 하고 인도에서는 독수리[鷲]를 보살의 다른 모습으로 여기기도 하니 ‘독수리가 사는 절’ 곧 ‘보살이 머무르는 절’이라는 뜻도 있다.
〈선비화〉
퇴계退溪 이 황李滉
擢玉森森倚寺門 옥인 양 높이 솟아 절 문에 기대어 섰는데
僧言卓錫化靈根 스님은 의상대사 지팡이가 변한 것이라고 하네
杖頭自有漕溪水 지팡이 머리에 응당 조계수曹溪水 있어
不借乾坤雨露恩 천지간 비와 이슬의 은택 빌리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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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인묵객들이 부석사를 찾아 선비화의 시를 남겼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2~1571)도 풍기군수 시절 부석사를 찾아 선비화를 보고 시를 남겼다. 이 시판詩板이 지금도 부석사에 남아 있다.
엽전만 모여라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화답시
인묵 김 형 식
엽전만 모여라
이제는 사이비 껍데기는 가고
엽전만 모여라
엽전만 모여라
누가 민족정신을 걔들에게 던져 주었는가
엽전근성은 9천년 민족정신이다
동학에서 광화문 촛불정신까지
모여라 그리고 다시 엽전만 모여라
엽전만 모여라
조선을 거덜 내 팔아먹은 매국노들아
걔들에게 빌붙어 부역질 하더니
다시 광명 찾은 조국 앞에
양반 상놈 갈라 쳐 놓고
엽전근성 버려야 한다고? 엽전만 모여라
엽전만 모여라
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은
“나에게 한 발의 총알이 남아 있다면 왜놈보다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매국노 변절자를 백번 천번 먼저 천단할 것이다”
피를 토하지 않았는가 엽전만 모여라
엽전만 모여라
무릎 꿇고 민족 앞에 사죄하라
그 입 찢어 버리고 우리 다시 새로운 입으로 태어나
네 탓 네 탓 하지 말고 내 탓 내 탓하고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가자 엽전만 모여라
엽전만 모여라
그리하여 전 세계 우리 8천 4백만이 하나로
엽전만 모여라
엽전만 모여라
백두에서 한라까지
9천년 민족정신을 노래하는
우리 하나 된
진정, 엽전만 모여라.
〈껍데기는 가라〉
신 동 엽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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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申東曄(1930~1969)
시인, 충청남도 부여 출생,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석림石林이다. 조선일보 신춘문예(1959)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동시대에 활동한 김수영(1921~1 968)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 치열한 현실의식과 역사의식, 투철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펼친 1960년대 대표적 민족시인.
오빠야 나 좀 붙잡아줘
-김영랑의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의 화답시
인묵 김 형 식
오매, 바람나겄네
풍각쟁이 바람잡이 개울물 건너 장터로 몰려가아
오빠는 두근두근 건너다보며
오매, 바람나겄네
선머슴아 삼삼오오 쥐불 들고 산야로 내 달리어 싱숭생수웅
오빠야 나 좀 붙잡아줘
오매, 바람나겄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김 영 랑
“오매, 단풍 들겄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겄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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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 단풍 들겄네” 가을을 느끼는 감회를 이보다 더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단풍 들었네’가 아니라 ‘단풍 들겠다’이다. 김영랑의 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를 읽으면 마치 가을을 맞는 느낌과 함께 연정의 감정이 물씬 풍겨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장독대에 감잎이 날아오르자 ‘누이’가 깜짝 놀랐다가 ‘골 붉은’ 감잎인 것을 알고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다. ‘어머나 깜짝이야. 단풍이 들겠네’ 하고.
그런데 골 깊은 감잎이라… 여기서 ‘골’은 ‘물체에 얕게 팬 줄이나 금’을 말한다. 감잎에 팬 줄이 깊단다. 이런 언어구사를 보면 역시 김영랑이다.
누이의 삶은 살림살이로 점철되어 있는 모양이다. 당대 처자 누군들 그렇지 않았겠는가. 벌써 추석이 내일모레다. 게다가 바람도 잦아진다. 그러니 살림살이를 하는 처자는 걱정이다. 살림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자, 그런 누이의 마음을 읽고는 시 속 화자는 누이에게 ‘나를 보아라’
고 하고는 같은 말을 외친다. ‘오매, 단풍 들겄네’라고.
시의 구조가 아주 단순하다. 1연에서 감잎을 보고 놀라는 ‘누이’의 마음과 모습을 그린 후 2연에서 ‘누이’의 그런 모습을 보는 화자인 ‘나’의 마음을 그려놓았다. 누이의 마음이 단풍 드는 것은 ‘감잎’ 때문이고 화자의 마음이 단풍드는 것은 누이 때문이다. 독자는 감잎에서 누이로 다시 화자에게로 연결되는 아주 멋드러진 감정의 전이轉移를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 속 ‘누이’를 많은 사람들은 ‘동복同腹 누이’로 읽는다. 표준어를 기준으로 누이를 해석한 결과이다. 그러나 ‘오매, 단풍 들겄네’에서 보듯이 시 속 화자는 호남 방언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누이’ 역시 호남 지방의 일상적인 호칭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누이’는 누나나 여동생이 아니라 ‘동네 처녀’이다. 감잎을 보고 놀라는 동네 처녀가 제시되고, 그 처녀를 보고 마음에 단풍이 드는 화자는 동네 총각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누이야 나를 보아라’가 아니라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하지 않았겠는가. 추석 쇨 걱정, 바람이 잦아지며 날씨가 추울 것을 걱정하는 동네 처녀가 감잎을 보고 ‘단풍 들겠다’고 하니 그 말을 받아 내 마음도 단풍이 들었는데 왜 모르냐고 하소연하는 것으로 읽힌다.
감잎에 놀라 붉어진 처녀의 얼굴, 그 처녀를 사랑에 빠져 마음이 온통 붉게 물든 동네 총각. 그래서 겉으로는 가을에 느끼는 감회일지 몰라도 그 이면에는 연정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 김영랑은 동네 처녀 누구로부터 마음에 단풍이 들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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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1903~1950), 전남 강진 출생, 박용철이 발행한 《시문학》을 통해 등단, 문예월간, 문학, 시원 등을 통해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아름다운 시를 발표했음. 시집 : 《영랑시집》, 《영랑시선》 외
그리움에 기대어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의 화답시
인 묵 김 형 식
우리들의 인연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졌습니다
그때도 별은 빛나고 달빛은 적요하고 나뭇잎은 떨어졌습니다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들
가을이 지나가는
뜨락에는 낙엽이 분분합니다
낙엽을 줍고 있습니다
뜨락에 흰 바람벽이 있어
낙엽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낙엽 하나에 詩와
낙엽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저는 오늘 저녁
정문골 토굴에서
내 무릎 위에 당신을 누이고
낙엽 하나에 소중한 이름 하나씩 불러봅니다
먼 곳에 있는 친척들의 이름과 은사님의 이름과 선후배 친구들의 이름과 진즉 할머니가 된 들꽃 계집애들의 이름과, 나의 사랑 딱새의 이름과 가난한 농어촌 이웃들 이름과 강아지, 송아지, 게, 고동,초승달,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이들을 흠모했던 ‘백석’과 백석을 좋아했던 ‘윤동주’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임들은 오늘따라 더욱 가까이 있습니다
동산에 보름달 솟아오르듯이
찔레꽃과 초승달 딱새와 흰당나귀가 스쳐 지나갑니다
어머니, 어머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들
임들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임들의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일까요
무엇인지 그립고 허전합니다
나를 깨우는 저 귀뚜리 울음소리는
부끄러운 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낙엽이 썩어 봄이 오면
내 뜨락에 소중한 님들의 흔적
파랗게 다시 돋아날 것이외다.
〈흰 바람벽이 있어〉
백 석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
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
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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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1912~1996)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활동한 한국 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인입니다. 그의 작품은 주로 고향과 가족, 현실의 고난과 고독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서정적이고 독백적인 스타일이 특징입니다.
〈별 헤는 밤〉
윤 동 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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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시절인 1941년에 짓고, 윤동주 시인이 시를 묶어 후배 정병욱에게 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렸다. 이 시집은 유고시집으로 1948년에 발간되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시인 백석은 차가운 방의 천정을 올려다보며, 시인 윤동주는 차가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시를 썼다. 윤동주 또한 사랑하는 어머니와 친구들의 이름이 떠올린다.
그 또한 스스로를 위로한다.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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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尹東柱(1917.12. 30~1945. 2. 16)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호는 해환海煥이다.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사, 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 중퇴(1942. 1학기), 도시샤 대학 문학부 제적, 명동학교明東學校에서 수학하였고,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와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76번지이다. 명동촌은 동간도의 척박한 땅이었지만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동간도로 집단 이주한 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을 지닌 동간도 최대의 한인촌韓人村을 형성했다.
일본에 건너가 1942년 교토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에 입학하였다.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이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고종사촌형인 송몽규宋夢奎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창씨 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1990년대 후반 이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본명 외에 동주童柱와 윤주尹柱라는 필명도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