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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2)
본문 : 로마서 12장 4-5절
설교 : 하영기 목사 (아름다운장로교회) 2012.09.23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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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3년 전에 미주 총회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한국 총회에 초청을 받아서 한국을 떠난진 12년만에 한국엘 갔었습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에도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그 때는 정말 가고 싶어도 못갔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 카나다에 오신지 오랜기간이 되었는데도 한국을 못가신 분이 있었고, 컨비니언스를 하시면서 시간과 물질 때문에 휴가도 가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서 목사인 나만 휴가를 가고 한국을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습니다.
3년전에는 총회의 임원었기에 모든 기초 비용을 총회가 부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오랜만에 나갈 수 있었기에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섬겼던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일일 부흥회를 부탁을 받고 주일 아침과 오후 설교를 하기위하여 갔었습니다. 감회가 새로웠던 것은 함께 교회 건축을 할 때에 있었던 성도들과 그 당시의 청년들이 어른들이 되어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을 하고 계시던 권사님이 병원 의사에게 외출을 허가 받아서 자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교회로 오셨습니다. 이사와 사정들이 있어서 다른 교회를 나가시던 분들이 먼 길을 달려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너무도 감격스러운 예배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옛날의 교회의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보기에 좋았던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가 건축할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넉넉한 형편의 교인들이 많지 않은 교회였지만 교회가 협소해서 건축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속된 말로 자영으로 건축을 하기로 하고 업자를 선정해서 우리에게 있는 돈 만큼 시행을 하고, 멈추었다가 또 건축헌금이 모이면 모인만큼 하고 해서 1년이 걸려서 완공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희 교회가 도우던 군 교회가 있었습니다. 도시와 가까운 곳에 있는 부대들에게는 훈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을 위한 대민봉사라는 공식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건축을 한다고 하니 부대에서 군인들을 대민봉사라는 항목으로 교회 건축에 일손이 필요할 때에 군인들을 보내어줍니다.
아무리 그래도 군인들이 나와서 일을 하는 것이 미안해서 고맙다고,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고 하면 그들이 하는 말이 목사님 괜찮습니다. 우리는 나오는 것이 더 좋습니다. 부대안에 있으면 훈련받아야지요, 고참들 눈치봐야지요, 더 피곤합니다. 그리고 맛있는 밥 먹을 수 있으니 더 좋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군인들은 돌아가고, 공사를 정리하게 될 때에 건축을 담당하는 분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손이 많아서 조금 쉽게는 끝나는데 대민봉사 나온 군인들은 시키는 일만 대충하고 시간만 때우려 하기 때문에 신경이 더 많이 쓰인다는 것입니다.
힘든 것
하기 싫은 것
부담스러운 것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하여 유독 이렇게 주장을 하고, 대충 넘어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걸리적거리는 일을 뭉뚱거려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대충 대충 하고 넘어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이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중요하고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고 판단이 되는 것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하여서는 세세하게, 신중하게, 꼼꼼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을 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판단이 되면 우리는 꼼꼼하게, 그리고 세밀하고 일들을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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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가정을 대충 대충하지 않습니다.
자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녀교육을 대충하지 않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놀랄 정도로 자녀들의 모든 것에 신경을 씁니다.
(주 목사님이나 류 목사님의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면 사모님과 목사님들이 아이들에게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이지 말아야 할 음식을 분명하게 제한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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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도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로 대충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낙오자이거나 실패자 일지도 모릅니다.
또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기분과 느낌에 대하여 예민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기분과 느낌과 생각을 맞추어주지 못한다면
기분이 상하거나 불편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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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로서 교회에 대하여서는 어느 정도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까?
성경을 보면 교회라 함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말합니다.
성도들에게 교회는 중요한 곳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목회를 할 때에 성경공부가 마치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공부 그룹들을 통하여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 영향을 받습니다.
IVF 네비게이토 등등의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제가 부 교역자로 섬기던 교회의 대학생 가운데 한 명이 이곳에 가입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끝나면 교회이 모든 프로그렘에 불참하고 네비게이트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곳에서 가르치는 것만을 주장하고 따라갑니다.
대학에 입학하는 교회의 학생들이 선교단체에 가입을 하게 되면 교회의 생활에 참여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와 선교단체의 갈등들이 발생을 합니다.
그래서 선교단체와 교회의 갈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논쟁의 핵심이 선교단체가 교회냐? 아니냐?라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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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쉽게 정의하면
교회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
교회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와 권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선교단체들은 교회가 아니라고 합니다.그러나 그곳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의 생활과 선교회의 생활으로 갈등을 가지게 됩니다.
어떤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이냐?는 중요합니다
여기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도 진행중입니다.
아름다운 장로교회는 올바른 교회관에 서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가장 먼저 행해야 할 변화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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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의 삶의 첫 번째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대한 첫 번째의 가르침이
교회에는 우리에게 대충 대충하는 참여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자신이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의 분량을 따라서
겸손하게 최선 다하여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로 교회에서 우리들의 생활에 대하여 오늘 분문에서 말씀으로 교훈을 하십니다.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3절에서 살펴 본 주어진 믿음의 분량인
마땅히 품어야 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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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정의해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직분(職分)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에서 직분이란 단어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교회의 직분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선생 . . . .을 이미하는 직책(職責)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의 뜻은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직분이란 단어의 의미는 기능(機能)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기능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에 있는 각 지체에 비유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분이란 단어의 원어적 의미가 기능인지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프락시스 – 「행위」 「기능」 「직무」 「일」
성경을 번역한 직분(職分)이란 단어는 직임(職任)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세상에서는 이 단어가 상하의 구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특히 세상의 관점에서 이해를 하면 상하계급으로 이해를 하고 행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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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직분은 기능(機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기능은 상하가 아니라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이란 크고 작음의 한계가 아니라
귀중하고 덜 귀함의 구분이 아니라
너와 나의 가진 것의 비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육체에 바유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에는 여러 기관이 있습니다.
그 기관들의 움직임은 역할입니다.
손이 움직입니다.
발이 움직입니다.
심장이 움직입니다.
머리가 활동을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움직이고 활동합니까?
여러분의 생명을 위하여 일합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기를 위하여 일합니다.
여러분을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일합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음을 인하여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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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하게 한정하여 그 움직의 관계를 구분할 수는 없지만
모든 기관들의 활동이 바로 여러분이 살아있음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한 몸 사상은 이런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입니다.
이 지체들이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은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움직입니다.
이 교회라는 유지체에 붙어 있는 지체가 움직이는 것은
곧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느 지체이던지 그 지체 자신의 유익과 그 지체 자신의 높고 낮음과 그 지체의 욕심만을 위하여 활동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지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가 붙어있는 몸이 살아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그 지체는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사지백체가 있을 자리에 있어야 정상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사지백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에 우리들은 장애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건강한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나태내는 것입니다.
장애를 일으킨 육신처럼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나타내는 그런 교회가 아니기에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인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그 이상의 생각과 그 이상의 장애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달라트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불평만 했습니다.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도 최선을 다해서 충성을 했어야 할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받은 사람은 자신이 많이 받을 것을 자랑하는 것이 이라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는 것입니까?
자신을 위함이 아닙니다.
남을 지배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달란트를 주신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9에서 자신을 가리켜서 사도들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칭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는 한 달란트 받았던 사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인 고린도전서 15:10에서 자기는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더 많은 일을 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을 뿐이라고 그는 겸손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분량을 맡기셨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가 맡은 직분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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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3절에서 나온 믿음의 분량
4잘에서 나온 직분
5절에서 나오는 지체는
이러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고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유의해 보아야 할 시제가 있습니다.
이 지체들은 처음부터 되어 있던 것이 아니였다고 말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예정가운데 한 지체로 만들어졌었는데
이 진리를 깨달은 뒤에야 자신이 지체됨을 자각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였지만 뒤늦게 알았으니
그러니 얼마나 문제가 많이 있겠습니까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습관들과
예전에 익숙했었던 관습들과
예전에 늘 가까이 있었던 생각들이
한 지체로서 연합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충돌과 잡음과 부작용이 일어나게 될 것이니다.
잘 안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원래 그래서 잘 안돼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 지체가 된 사람은 나는 원래부터 그래라고 변명해서는 아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겸손해 져야 합니다.
분량을 알아야 하고,
직분인 기능을 알아야 하고,
어떤 지체인지를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살아있게 해야 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해야 합니다.
한 몸 사상의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직분?
지체?
역할?
서로 협력하고 연결되어야 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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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4절에서도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지체의 다양성에 대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반면에 5절에서는 많은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지체의 통일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온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는 서로 협력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몸 안에서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팔다리 운동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팔다리 근육만 좋아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심장이 튼튼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우리의 온 몸이 튼튼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지체다란 사실은 세 가지 교훈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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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주시는 교훈은 다양성(多樣性)입니다.
팔, 다리, 눈, 코, 귀, 입, 하는 일이 모두 다릅니다.
교회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 성도들이 받은 은사, 재능(달란트), 성격이 다 다릅니다.
한국의 군대도 이제는 세계에서 강한 군대에 들어갑니다.
신병이 군대에 훈련을 받고 입대를 합니다.
자라고 성장한 배경과 환경이 다릅니다.
성격과 관심과 인생관과 세계관이 다릅니다.
그들의 관심사와 재주와 달란트가 다릅니다.
하지만 이 군대는 절대로 약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지상의 교회는 더 다양한 분들이 모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다양성은 절대로 교회를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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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주시는 교훈은 통일성(統一性)입니다.
다양한 청년들이 모인 군대가 오합지졸(烏合之卒)같지만 훈련의 기간이 지나면 강성한 군대가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전우가 됩니다.
생사를 함께하는 전우가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추구하게 되는 통일된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추구하는 목적이 그들의 중요한 목표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유하지면 교회도 그렇습니다.
지체가 따로 따로 일하는 것 아닙니다.
몸통에 붙어 서로 연결되어 관계를 갖고 일합니다.
목적의식이 같아야 합니다.
추구하는 것이 같아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나를 통하여 살아있어야 합니다.
몸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살아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다양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음에 초점이 맞추어질 때에 통일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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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상호존중(相互尊重)성입니다.
지체끼리 서로의 기능을 인정해야합니다.
서로 존중해야합니다.
이것을 더 자세하게, 간절하게 담고 있는 것이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서 은사를 가지고 의견다툼이 있었습니다.
어느 은사가 제일 큰 것이냐? 어느 직분이 가장 중요하냐?
이런 다툼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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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2: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2: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12: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12: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지체는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지체가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다른 지체들이 알고 멈추게도 합니다.
그런데 지체가 다른 지체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입히고 상하게 만든다면 이것은 같은 지체가 아닙니다.
바로 교회는 이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났습니다. 독일의 대학생들 여러 명이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독일군의 폭격에 파괴된 영국의 어떤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교회 앞뜰에는 예수님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본시는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동상의 밑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Come unto me (내게로 오라)." 그런데 예수님의 두 팔이 독일군의 폭격에 의해서 완전히 잘려져 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함께 의논을 했습니다. 이 동상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들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두 팔이 잘려진 채 그대로 동상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에 밑에 적혀져 있는 글귀를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Christ has no hands but ours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우리의 손들만을 가지고 계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우리를 섬겨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되어서 예수님의 섬김을 이어 받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의 몸 버려 피 흘려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