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하는 관찰자, 그 이름 교사
짝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머릿속 생각을 알기는 어렵지만, 모르기는 해도 입가에 엷은 미소가 흐르지 않을까요? 사전에는, 남녀 사이에서 한쪽만 상대편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것이 꼭 남녀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스개 소리로 짝사랑을 하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묻곤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누구와도 사랑을 할 수 있고, 돈이 들지 않고, 실연의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짝사랑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짝사랑이라는 단어에 교사가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사는 학생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짝사랑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짝사랑, 얼마나 가슴 설레는 사랑입니까? 게다가 들통이 나면 안 되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들통이 나면 곧 실연이 아닐까요? 짝사랑은 무한대로 할 수 있지만, 끝없이 감추어야 하는 데 묘미가 있다고 봅니다. 교사가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서투른 사랑은 편애라는 비난과 화살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교사만 화살을 맞는 게 아니라 학생은 더 아픈 화살을 맞게 됩니다. 사랑을 하기는 하지만 단수가 높은 짝사랑이 교사가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는 줄도 모르는 사랑, 사랑을 받는 줄도 모르는 사랑이 바탕이 되는 교육이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차별이 없는 사랑이라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랑을 나누어 주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반성하고 바로잡아가려는 이가 교사입니다.
그런 치우침 없는 짝사랑을 하기 위해서 교사가 가져야 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처럼 관찰하고, 녹음을 하듯이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선입견도 없어야 합니다.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소설 수업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에 있는 거울을 닦고 또 닦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울에 묻은 먼지나 티끌로 하여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고 맙니다. 똑 같은 행동을 하고도 누구는 그냥 지나가는데 누구는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무심코 하는 것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억장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3인칭 시점에는 관찰자 시점 말고 하나 더 있습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입니다.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무모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전지전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신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돌아보면 그렇게 산 세월이 참으로 깁니다.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반성하여도 ‘신’에게 당한 사람들이 용서하겠습니까? 바른 대로 말해라, 다 알고 있다, 누구와 함께 그 짓을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몰아세웠던 시절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게 당한 그들이 또 어디서 그와 비슷하게 누구를 대한다면 이는 악순환이지요. 악몽입니다. 어디다 대고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용서가 얼마나 소용이 있는 일일까요?
짝사랑과 관찰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따로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 양면처럼 찰싹 붙어 있습니다. 제대로 짝사랑을 하기 위해서 올바른 관찰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관찰을 할 수 있어야 짝사랑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수준 높은 짝사랑을 할 수 있는 교사들이 날로 불어나기를 바랍니다. 물론 관찰이 곧 해결은 아닙니다. 그러나 빗나간 관찰은 반드시 빗나간 해결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서툰 관찰은 서툰 결과를 예고합니다. 동영상으로 편집을 할 것이 아니라 정지 화면으로 저장하는 것이 올바른 관찰에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객관적 사실이 관찰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시인은 사랑을 주제로 시를 쓰려고 하면, 시어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부적합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사는 학생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을 쉽게 입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먼 길 나서는 나이 든 아들의 옷깃에 먼지가 있어서, 매무시가 단정하지 못해서 옷깃을 털고 가다듬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하기 위해서 관찰하고, 관찰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첫댓글 배움은 단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고 서로 우정을 나누고, 그리하여 아름다워지는 것이면 좋겠는데...
요즘 정토회 법륜스님 이야기들으면서 사랑과 나의 마음에 대해 자주자주 생각하는데, 내가 사랑이라 생각해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으면 형식이든, 내용이든 사랑이 될수 없다는 것도 맞다 싶더라고요...
부모가 자식을 위하고, 교사가 학생을 위하고, 군주가 백성을 위하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진정으로 위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상대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을 위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경우도 많습니다.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런 경향은 뚜렷합니다. '사랑'도 그 위하는 것의 한 방편이 되고 말아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위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