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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때가 옴
예수께서는 바리세인들과의 마찰을 피하시기 위하여 일시적이지만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기로 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마리아지방을 통과 하셔야 하였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요 4:3)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먼 길로 돌아가셔야 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편견 때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기를 싫어하여 지름길인 사마리아를 두고 먼 길을 돌아서 갈릴리로 가곤 하였다.
“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요 4:9)
그러나 예수께서는 민족이나 종교적인 갈등과 같은 인간들의 편견을 초월하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금기시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상대로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시는 파격적인 일을 행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엄격한 규율들을 버림으로 그들을 특별히 성나게 하셨다. 그는 …배타적인 높은 장벽의 담을 쌓은 종교의 아성을 보셨다. 그는 이러한 파당의 벽을 허무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접촉하실 때에 그대의 신조가 무엇인가? 그대는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가? 라고 묻지 않으셨다. ”(소망, 86)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중 매우 중요한 영생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매우 큰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 4:16)는 매우 엉뚱한 말씀을 하셨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여인은 당황한 나머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요 4:17)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영생 얻기를 원한다면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죄를 버리지 않으면서 영생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여인은 더 이상 자신의 수치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하였다.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9)라고 말머리를 돌린 후에 여인은 다음과 같은 주제로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라는 질문을 던졌다.
오랜 세월동안에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뿌리 깊은 논쟁의 주제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심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드려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 세운 성전을 반역의 표징으로 생각하여 이들을 이방인들보다 더 악한 자들로 취급하였다.
이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가 깊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요 4:21)
라고 하셨다.
어느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라는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많은 종파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떠난다면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다스린다.
옛날 유대인들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여인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들은 과연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할지 매우 당황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예루살렘이야 말로 진리교회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교회의 표상이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라고 하셨을까?
사마리아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리심 산 성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예루살렘성전을 인정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말씀은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그는 예루살렘에서 봉헌식을 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유월절축제에도 참여하셨고, 부모님들이 예수를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성전에서 만났을 때 대답하시기를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가? 라고 응답하셨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라고 하신 것은 너무나 이외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의 주인으로 주장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예루살렘지도자들로부터 배반을 당하신 이후부터 그분의 행동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유대교회당국자들은 이런 사실을 믿지 않고 예루살렘성전을 하나님의 임재의 교회로 주장하였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명료한 말씀을 거절하면서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처럼 교회당국자들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유대교회가 그랬고, 로마교회가 그랬고, 개신교회가 그랬고, 재림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1888년 하늘이 보낸 사자들을 거절한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개혁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과 예언의 신에 기록된 말씀을 부정하면서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는 자들을 두려움도 없이 반역자들이라고 말한다. 위에 열거된 모든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는 자들을 배척하고 출교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재림교회와 개혁운동 그들도 한때는 모교회로부터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는 다는 이유로 배척과 출교를 당한 슬픈 역사를 가진 자들이면서도 이제는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시기를 알거니와 지금이야 말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심사숙고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어디서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1844년 이후 셋째천사의 기별이 이 세상에 전해지고 완전한 진리가 공개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재림교회야 말로 이시대의 예루살렘과 같은 위치에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교회는 1914년 1,2차세계대전을 통하여 인간들의 총칼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재림교회는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신실한 무리들을 오히려 출교시켰던 역사를 이제는 감출 수 없을 것이다.
2014년이야말로 전쟁이 일어 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전쟁의 발발지가 되었던 독일 연합회는 다행스럽게도 자신들의 수치스런 역사를 공개하면서 당시 다수의 신실한 영혼들을 출교시킨 역사를 시인하였다.
그러면 당시 출교당한 이들을 조상으로 두고 있는 개혁운동은 어떤가?
빛이 어두웠던 시기에 그들은 높은 표준을 지향하기 위하여 1925년 일곱째 계명과 관련하여 성경과 예언의 신의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 신앙원칙을 제정하였다.
이후 화잇 부인 유산관리위원회 창고에 쌓여있던 많은 증언들이 책으로 편찬되어 나옴으로 인하여 모든 진리는 한 점 오해 없이 밝혀지고 있다.
개혁운동이 오해하는 말씀은 마19장9절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 19:6)는 말씀을 하신 후 예수께서는 음행한 연고에만 이혼과 재혼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개혁운동은 이런 예외를 무시하고 지금까지 음행연고에라도 무죄한 편의 재혼도 정죄하여 출교를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증언들이 출판되어 나오면서 1863년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볼 수 있다.
“나는 P자매가 아직까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 권리가 없음을 보았다. 그러나 만일 그나 혹은 어떤 다른 여인이라도 남편이 간음죄를 진 것이 사유가 되어 법적인 이혼을 한다면 그 때에는 자기가 택한 사람과 결혼하여도 무방하다. ― Letter 4a, 1863.”(가정, 344)
그러나 개혁운동은 이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다. 선지자가 빛이 어두울 때 하신 말씀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처음 서신을 기록한 1863년으로부터 32년이 지난 1895년에도 음행한 연고의 무죄한 사람에게 재혼을 허락하신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 월터는 아내를 버리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떠났고, 그를 버렸으며,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나는 성경에서 그가 주 안에서 다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조금도 찾을 수 없다.”(행실, 68)-서신 50, 1895
그러나 개혁운동은 이 말씀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배우자가 살아있는 한 어떤 상황의 재혼도 인정하지 않고 정죄하여 출교시키고 있다.
그러나 성경과 예언의 신을 오직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신앙의 초석으로 삼는 자들은 이와 같은 개혁운동의 원칙에 대하여 항의 하면서 수정을 요구 하였다.
그러나 개혁운동은 공공연하게 기록된 증언의 말씀을 거절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19장9절에 음행의 연고에 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어느 개신교회 학자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성경원문 변조 설을 주장하면서 믿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는 재혼 당사자만 출교 시켰으나 이제는 예언의 신에 기록된 말씀을 공공연하게 읽거나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출교시키고 있다. 그 결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오직 말씀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신앙의 초석으로 믿고 있는 신실한 지도자들과 평신 자들이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하고 배척을 당하고 있다.
얼핏 이 주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문제 같지만 가정을 잃어버린 당사자들에게는 중대한 문제이며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작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독처함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범죄자의 범죄로 인해 무죄 자가 일평생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이와 같은 교회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속성을 오해케 하는 위법인 것이다.
자유의 의지를 주신 하나님은 음행한 연고에 의하여 무죄한자에게는 다시금 배필을 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성경과 예언의 신은 이런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재혼을 하든지 독신으로 지내든지, 행 불행은 본인이 상황에 따라 선택하고 생각할 문제이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다. 이 자유를 교회는 구속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운동은 조상들이 만든 전통과 유전을 고수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말씀을 부인하면서, 무죄한 자들을 정죄하여 출교시키고 있으며 명료한 증언의 말씀을 주장하는 지도자들까지도 출교를 시키고 있다.
그 결과 지금까지는 재혼 당사 자들만 출교 시켰기 때문에 힘없이 하나님과 교회를 원망하면서 교회를 떠나갔으나 이제는 지도자들을 출교시키면서 다수의 무리들이 교회를 떠나오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예상보다 큰 무리들이들이 교회를 떠나자 당황한 개혁운동은 필설로 묘사하기 힐들 정도로 이들을 비방하고 조롱하면서 핍박을 하고 있다.
현대진리연합운동은 바로 개혁운동으로 부터 핍박받고 있는 그런 무리들이다.
우리들은 교회를 떠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명료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을 개혁운동은 용납하지 않고 출회를 시켰던 교회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빛과 생명이 그리스도의 시대의 교회 당국자들에 의하여 배척당하였던 것과 같이 그 후의 각 세대에 있어서도 그래 왔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에서 물러나신 것과 같은 역사가 거듭거듭 반복되었다.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은 기성 교회에서 분리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종교적 지도자들이 그 빛을 용인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 빛을 전하던 자들은 진리를 사모하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개혁자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은 흔히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한 가르침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교회를 불가불 떠나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빛을 찾는 이들이 그와 같은 교훈으로 말미암아 그들 선조의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순종을 하기 위함이었다.”(소망, 232)
이제 우리들은 사마리아여인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위로를 받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였으나 진리를 거절하였던 예루살렘과 같은 교회들, 세계적인 조직을 가진 재림교회와 개혁운동교회가 이제는 지정된 예배장소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교회들은 말씀을 거절하였으며 또한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백성들을 출교하고 배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 말로 예루살렘도 말고 그리심 산도 말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연합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 당시와 같은 상황이 되었다.
현대진리연합운동은 인종이나 계급이나 종파를 구별하지 않고 오직 성경과 예언의 신의 말씀만으로 신앙의 원칙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백성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들이고자 하는 백성들과 연합하여 복음사업을 마치기를 원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 울 수 없는 것처럼 셋째천사의 완전한 진리, 성경과 예언의 신은 이제 어느 교회, 어느 조직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생수를 직접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 보좌에서 비치는 빛은 종파나 인종이나 계급을 구별하지 않고 비친다.”(실물, 418)
이제는 교파나 종파의 벽을 깨고 초교파적으로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 심판의 기준이 되는 율법을 제시하는 한 백성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계급이나 지역을 초월한 믿음과 예배, 즉 모든 백성과 모든 민족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선포할 사명을 주셨다.”(소망, 819)
우리는 오직 한 가지의 주제만을 전하고 믿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성경, 오직 성경만을 모든 교리의 기준과 온갖 개혁의 기초로 삼아 지지하는 백성을 가지실 것이다.”(쟁투, 595)
이런 자들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이라고 믿는다.
현대진리연합운동은 어느 특정교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의 연합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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