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29)
윽, 하마터면
산길을 달리다가 보면
자동차에 치여서
고라니, 족제비, 뱀, 새
막 죽어 있잖아
이런 걸 뭐라고 하는지
아는 사람?
아무도 대답이 없어서
보드에 ‘로드 킬’이라 쓰고
돌아서려는데
아, 그, 뭐더라?
맞다!
뺑소니!
전교생 중에서 딱 한 사람
걸어서 학교 오가는
단후가 말했다
윽, 얼른 지웠다
하마터면 틀린 답을 쓸 뻔했다
- 이원만(1963- ), 동시집 『오랜만에 나하고 놀았다』, 모악,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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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은 길을 냅니다. 관점이 내는 길은 새로운 길입니다. 이 길은 없던 길을 처음으로 내는 길일 때도 있고, 있던 길을 이어 내는 길일 때도 있고, 끊어진 길을 다시 잇는 길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점이라고 부를 때는 어떤 낯선 멋이 있어서 처음 내든, 이어 내든, 다시 잇든 늘 새롭습니다. 하나의 길에 수많은 길이 잇대어 있습니다. 잇대어 있는 길이 여럿이 꾸준히 다니면 마침내 길이 됩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결코 길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럿이 꾸준히 다니지 않아서 길이 나지 않은 길이라도 길이라고 불러야 하는 길은 있습니다. 이 길은 언젠가 반드시 길을 내야 합니다. 쉬 열리는 길도 있지만 잘 열리지 않는 길도 있습니다. 소수자 약자들을 편드는 길은 쉬 열리지도 잘 열리지도 않습니다. 관점은 길을 냅니다. 돌려 말하면 길을 내는 관점이라야 관점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관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관점이라고 부르는 많은 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관점이라고 부르는 관점 중에는 전혀 길을 내지 못하는 관점도 있습니다. 길을 내지 못하는 관점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길을 내지 않는 관점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길을 낼 생각이 애초에 없는 관점이어서입니다. 그러니 이런 관점은 관점이 아닙니다. 관점이라고 누군가가 자꾸 불러서 관점으로 보일 뿐입니다. 중립을 들먹이며 한 관점 한다고 토론장에 나앉은 관점을 보는 게 불편해서 저는 애초부터 갈려서 끝까지 갈라진 채로 끝나는 막장이니 끝장이니 하는 토론 방송은 잘 안 봅니다. 관점은 길을 냅니다. 길을 내는 관점은 누가 내는가. 오늘의 시에 그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 누군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으려면 익숙한 관점은 잠시 비켜서야 합니다. 오늘의 화자는 제대로 비켜섰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이원만 시인은 십수 년 전 처음 만날 때부터 제게는 시인이었습니다. 시인이 쓴 시를 읽은 적이 없었으나 시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원만 시인을 작년 가을 어떤 행사장에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불쑥 문학 잡지가 든 책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얼른 꺼내서 살피니 신인상 란에 이원만 시인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어, 했습니다만 곧 아, 했습니다. 등단은 절차일 뿐입니다. 저 역시 등단하기 전 이십여 년 시인으로 불렸습니다. 그랬는데 겨울에 이번에는 책이 우편으로 왔습니다. 뜯어보니 위의 동시집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시 아, 했습니다. 이원만 시인은 경주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35년째 아이들과 꽹과리, 장구, 북, 징을 치며 살고 있다’고 동시집의 마지막 쪽 약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알기로는 한터울이라는 풍물패를 꾸려 가고 있습니다. 같은 약력에 여기저기 ‘풍물을 쳐주다 벌어진 일들이 재미나서 메모를 하다가 동시를 쓰게’까지 되었다고 하니 천생 시인입니다. 천생 시인이 드디어 낸 길, 2막의 삶을 오늘은 응원합니다. (20240117)
첫댓글 포항 한울터 풍물패의 이원만님이 시인이 되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