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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고향을 찾아서19
- 영원한 보헤미안 ... 오장환편
가을빛이 완연한 들판을 달려 충북 보은 회인의 오장환문학관을 찾았다. 문학관 입구 골목으로 들어서니 담장 해바라기가 취재팀을 환하게 반긴다.
시인 오장환(1918년-1951년) 그는 1918년 5월 15일 이곳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아버지 해주 오씨 학근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학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오부잣집이라 부를 만큼 부유했다고 한다. 오장환은 형 성환(공주지법판사를 지냄)이 동네 또래 아이들을 이끌고 학교에서도 중심이 되었을 만큼 활발했던데 비해 장환은 말이 없고 얌전한 아이였다고 한다.
그는 1924년 회인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다니고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로 이사를 간다. 오장환이 전학한 안성공립보통학교엔 후에 시인이 된 박두진이 재학 중이었다. 오장환은 1930년 동교를 졸업 할 때까지 박두진과 동문수학한다. 중동학교를 속성과로 수료하고 오장환은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휘문고보에서 정지용으로부터 시를 배우게 되는, 그의 시작에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그리고 정지용이 창간부터 관여하고 있던 교지 <<휘문>>에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최근까지 오장환의 데뷔작이 1933년 11월 <<조선문학>>에 발표된 <목욕간>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취재팀이 오장환 문학관에서 만난 도종환(한국작가회의사무총장) 시인에 의하면 그보다 앞선 1933년 2월 <<휘문>>에 기재된 <아침>과 <화염>을 데뷔작으로 봐야한다고 했다. 도종환 시인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오장환 시 연구>>를 쓰기 위해 휘문고등학교를 찾아가 지금까지 발행된 <<오장환 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다수의 오장환 시들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럼 먼저 최근에 발견된 오장환의 <아침>을 살펴본다.
까마귀 한 마리
게을리 노래하며
감나무에 앉얹다.
자숫물 그릇엔
어름덩이 둘
- <아침> 전문
이 짧은 시는 을씨년스런 겨울 아침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까마귀가 감나무에 앉아 게으른 소리로 우짖는다. 앙상한 감나무가지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까마귀를 올려다보다 시선을 아래로 옮겨가니 자숫물(개숫물)엔 얼음 두 덩어리가 하얗게 떠 있다. 짧은 시지만 알싸한 겨울 아침 공기만큼이나 선명하게 색상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명쾌한 이미지의 시다.
<오장환 시인 생가>
오장환이 보통학교 3학년까지 살았다는 회인 중앙리의 생가(복원) 주변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많다. 오장환 시인의 문학관 건립과 생가 복원을 추진했던 도종환 시인은 공사를 하면서 될 수 있으면 주변 감나무들을 다치지 않으려 애썼지만 중장비들이 드나들어야 하는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옮겨 심어야 했고, 옮겨 심은 감나무가 제대로 회복이 안 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초기 시 중에는 <아침>과 같은 짧은 3행시들이 다소 있다. 다음의 시는 1933년 11월 휘문고보교지 <<휘문>>에 발표했던 <조개껍데기>다.
대글대글
색동저고리 떨치인 조개껍데기
조수(潮水)가 물러슨 사변(砂邊)에 일광욕을 하오.
-<조개껍데기>전문
바닷가 모래밭에 흔하게 뒹구는 조개껍데기를 보고 노래한 시다. 시인은 햇빛에 반사되어 알록달록 무지갯빛으로 아롱지는 백사장의 조개껍질을 보고 우리의 색동저고리를 연상해 낸다. 조개껍질의 곡선과 한복 소매의 곡선이 매치되며 물결에 밀려 이리저리 뒹구는 모양이 마치 까치동(색동)을 입고 꼬물꼬물 뛰노는 귀여운 꼬마의 모습과 연상 작용을 해, 도종환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동화적인 느낌을 준다.
오장환은 데뷔 초기에 동시를 많이 발표했다. 김기림은 <신춘의 조선시단>(1935년 1월5일)이란 글에서 “주로 동요와 짧은 시를 구경시켜 준 오장환군”이라고 하였다. 그는 조선일보의 <우리 차지>란에 동시를 연속 게재하였으며 방정환이 창간한 <<어린이>>지에도 발표하곤 하였다.
아래의 동시는 <<어린이>>12권 2호에 발표한 <바다>이다.
눈물은
바닷물처럼
짜구나
바다는
누가 울은
눈물인가.
- <바다> 전문
1연은 통상적인 바닷물의 짠 맛을 얘기했을 뿐이지만 2연에선 인간의 삶속에 녹아든 슬픔을 말하고 있다. 짧은 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그리고 있는지…. 도종환 시인은 그의 논문집에서 “이 시의 공간은 개인적인 슬픔에서 측량할 수 없이 넓고 큰 슬픔으로 확장 된다.” 라고 말한다.
오장환의 동시 한 편을 더 소개한다.
노래가 먼저 건너옵니다.
누가 부는지
버들수페 호들기소리.
가까이 들려오는 호들기소리.
좁은 개울이지만
그래두 발벗고 건느십시요.
해설피엔 게으른 송아지도
풀바테 무릅꿀코 울읍니다.
-<느진봄> 전문
이 동시에서 주목할 시어가 있다. 해설피엔 게으른 송아지도 라는 단어다. 오장환문학관 작품전시실에서 처음 이 시를 접한 필자는 한참을 붙박이고 서 있었다. 스승(정지용)의 시가 좋아서 시어를 패러디한 것인가. 아니면 초기 습작기에 쓴 시라서 남의 시를 흉내 낸 것은 아닌가하는 여러 가지 생각에서였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도종환 시인과 함께 전시관을 둘러보며 그에게 들은 설명에 의하면 해설피란 말은 충청권 시인들만이 쓰는 단어로, 충청권에서 해가 설핏 기울 무렵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한편 오장환은 정지용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한다고 도종환 시인은 말했다. 정지용 시인도 <<어린이>>지에 동시를 여러 편 발표했다. 그리고 정지용의 동시에 대한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게 오장환의 동시도 비슷한 평을 받았다고 한다.
<문학관 내부>
지용은 오장환의 재능을 인정하고 아꼈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논문에서 “오장환 시인이 쓰는 동시의 내용적, 형식적 특성까지도 거의 (정지용과)유사하다는 점이 실제 작품의 분석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라고 밝히고 있다.
동시에서는 이처럼 어린이다운 밝은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 반면, 오장환의 詩하면 대부분이 전통 및 낡은 유습에 대한 거부반응과 병적 관능과 퇴폐성 등을 들고 있다. 실제로 1936년~37년 사이 씌어진 시들 대부분은 전통 관념과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진보적 사상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1936년에 조선일보에 발표된 <姓氏譜>(성씨보)와 <성벽> <종가> <정문> 등이 그 대표적 시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 청인(一靑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 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姓氏譜> 전문
열녀를 모셨다는 정문은 슬픈 울 창살로는 음산한 바람이 스미어들고 붉고 푸르게 칠한 황토 내음새 진하게 난다. 소저(小姐)는 고운 얼굴 방안에만 숨어 앉아서 색시의 한시절 삼강오륜 주송지훈(朱宋之訓)을 본받아왔다. 오 물레 잣는 할멈의 진기한 이야기 중놈의 고객의 화적의 초립동이의 꿈보다 선명한 그림을 보여줌이여. … 중략
쑤군, 쑤군 지껄이는 시집의 소문 소저는 겁이 나 병든 시에미의 똥맛을 핥아보았다. 오 효부라는 소문의 펼쳐짐이여! 양반은 죄금이라도 상놈을 속여야 하고 자랑으로 누르려 한다. 소저는 열아홉. 신랑은 열네 살 소저는 참지 못하여 목매이던 날 양반의 집은 삼엄하게 교통을 끊고 젊은 새댁이 독사에 물리려는 낭군을 구하려다 대신으로 죽었다는 슬픈 전설을 쏟아내었다. 이래서 생겨난 효부열녀의 정문 그들의 종친은 가문이나 번화하게 만들어보자고 정문의 광영을 붉게 푸르게 채색하였다.
-<旌門> 중에서
이들 시에 내포된 화자의 양반에 대한 부정적 성격을 두고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그의 출생 배경을 들며 그가 서출이기 때문이라는 제한적 평을 한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신약성경에서 보면 나사렛에서 목수(요셉)의 아들로 자란 예수의 공생활이 시작되고, 예수는 산상설교를 하며 기적을 행하고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른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이 보는 예수는 단지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일 뿐인 것이다. 선입견이 그들의 눈과 마음에 장막을 치기 때문이다. 오장환의 문학세계의 폭을 한정시키는 장애요인이 바로 그와 같은 선입견 때문은 아닐까.
그가 시작 활동을 하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식민지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 극심했던 때이기도 하고, 반면 조선조의 유교사상에 오래 갇혀있던 우리 민족이 신학문과 서양철학을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니 신학문을 접한 신지식인들이 새로운 개혁제도를 받아들이고 계몽해 나가던 시기다. 더구나 오장환은 시인이었다. 시인은 계몽에 있어서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산문 <문단의 파괴와 참다운 신문학>에서 그는 “…‘그는 시인이다’와 ‘그는 인간이다’ 하는 둘찌간에서는 어느 것이 되겠느냐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나는 “인간이 되겠다”라고 맹세할 것이고…참으로 신문학이란 무엇이냐! …진실로 인간에서 입각한 문학 즉 문학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문학의 길일 것이다.” 라고 했다.
물론 그가 서자였다는데 근거를 두고 연결 지어 그의 작품을 논하면 그 원인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용운의 ‘님’(님의 침묵)을 조국으로까지 확장해 가듯 오장환의 전통 부정과 인습타파도 화자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국가가 직면한 식민지의 처지(억압받는 국가)로 확장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장환이 전실이 살아있는, 첩에서 태어난 것이 사실이나 서출이라는 설움을 느낄 만큼 불행한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전실의)장남이 후손 없이 사망한 후, 적자의 누이들 또한 모두 출가한 후 아버지 오학근의 전부인 이민석이 이미 나이가 많아 대를 이을 자식을 갖지 못하는 처지라 후손에 대한 부담
<오장환 시인>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 그는 귀한 아들로 태어났고 귀하게 자랐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서출이라는 꼬리표가 그를 따라 다닌다. 그 꼬리표(선입견)는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까지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해석의 확 장을 방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을 남긴다.
그의 작품에서 병적 관능과 퇴폐성을 드러내는 시는 <헌사> <매음부> <성벽> <해항도> <해수> 등이 있다. 이들 시에서는 방황하는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는 도시를 떠돌며 위선적인 삶에 좌절하는 화자. 그는 그곳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지 못하고 보헤미안이 되어 떠돈다.
그는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보헤미안처럼 떠돈다. 분열하는 자아. 그는 <불길한 노래>에서 자신을 “나요. 카인의 말예(末裔)요. 병든 시인이요. 벌 (벌)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능금을 따먹고 날 낳았소.” 라고 화자는 자신의 존재를 벌(원죄) 받아 태어난 존재라고 자학한다. 카인의 후예, 범죄한 인간, 카인의 말예라는 말은 자신의 내면에 사탄의 피가 흐른다는, 죄인의 불안한 심정이다. 철저하게 투신하지도 못하고 암울한 시대를 방황하는 지식인의 자아가 엿보이는 시다.
싸느란 제단(祭壇)이로다
젖은 풀잎이로다
해가 천명(天明)에 다다랐을 때
뉘 화한의 한숨을 들이키느뇨
짐승들의 울음이로라
잠결에서야
저도 모르게 느끼는 울음이로라
반추하는 위장과 같이
질긴 풍습이 있어
내 이 한밤을 잠들지 못하였노라
석유불을 마시라
등잔 아울러 삼켜버리라
미사 종소리
보슬비 모양 흐트러진다
죄그만 어둠을 터는 수탉의 날개
싸느란 제단이로다
기온이 얕은 풀섶이로다
언제나 쇠창살 밖으론
떠가는 구름이 있어
야수(野獸)들의 회상과 함께 자유롭도다
-<싸느란 화단(花壇)> 전문
일제강점기 우리말조차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암울한 상황에서 우리 국민 누구인들 마음의 쇠창살에 갇혀 지내지 않았을까. 하물며 국민을 계몽하고 국권을 수호해야 할 지식인들의 갇힌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문학의 표현조차도 자유롭지 못해 검열을 받아야 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자폐증을 앓지 않음이 다행이다. 이 시 역시 쇠창살에 갇힌 불안한 자아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마지막 연에서 쇠창살 밖으로 떠가는 구름으로 한 가닥 희망을 놓치진 않고 있다.
오장환 시인은 불과 18년의, 결코 길지 않은 시작 기간 동안 무려 5권의 시집을 출간했으며 시집에 포함하지 않은 작품들(시, 동시, 산문 등)도 상당하다.
<도종환 시인과의 대담 >
그는 해방 후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에서는 신장병으로 입원해 있으면서도 약 5개월여 동안 시집 한 권<<병든 서울>>을 낼 정도로 다작을 하는 열성 시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은 40여년 가까이 이념의 벽에 묻혀 있어야 했다. 1947년 월북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던 날 오장환은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익테러에게 죽을 정도로 얻어맞았고, 지병이 더 악화되어 치료를 받기 위해 남포적십자 병원으로 간다. 그는 여기서도 치
료가 어려워 다시 모스크바병원으로 옮겨간다. 한편 투병 중 1948년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남조선의 문학예술>>(해방 후~6,25까지의 문학예술에 관한 상세 내용 수록)을 발간했다. 1950년에는 소련기행시집 <<붉은 기>>발간하고, 1951년 지병인 신장병으로 병사한다. 도종환 시인의 말에 의하면 오장환 시인은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남한에서 오해를 받았지만 정작 이북에선 그의 흔적조차도 없다고 한다. 이북에서 결혼을 했으나 후손은 없고 그 부인이 혼자 살다가 최근 몇 년 전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시의 자아처럼 그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영원한 보헤미안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현재 남한에는 1988년 월북 작가의 해금이 풀리며 나온 오장환 문학 관련논문이 100여 편에 이른다고 한다.
박인식 팀장이 도종환 시인에게 오장환 시인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도종환 시인은 멋쩍게 웃으면서 동향의 선배 시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인식 팀장은 오장환 시인이 월북 시인이라 문학관을 짓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건립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물었다. 도종환 시인은 그랬다고 말하며 어렵게 생가 터를 구입하고도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아 표지석을 세우는 일도 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돌(비석)을 세우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서서 시비를 제작해 놓고도 한동안 덮어두어야 했다. 도종환 시인은 생각 끝에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군무당(보은군 무속인협회 회장)을 불러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부정을 막는 큰굿을 했다고 한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문학관이 세워지고 생가가 복원되고 시비가 세워졌다. 도종환 시인은 생가 주변이 원래는 편석으로 쌓은 예쁜 돌담이었는데 주민들이 블록 담을 쌓아 그 좋은 돌담의 정취를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한편 임선빈(수필가, 전 보은문학회 회장) 해설사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취재팀을 따라 나와 생가 뜰에 세워진 표지석의 얼룩을 가리키며 주민의 반대로 오래 덮여있는 동안 생긴 얼룩이라며 선죽교의 얼룩(피) 같지 않느냐고 묻는다.
<오장환문학관 전경>
오장환의 시의 고향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도종환 시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오장환문학관으로 그를 찾아가 시인이 오장환의 시를 연구한 내용, 그 사례를 들었으며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집까지 건네받아 참고 하였다.
오장환문학제(9월18일~19일) 행사준비로 바쁜데도 취재팀에게 시간을 내주신 도종환(오장환문학제 추진위원장) 시인님, 고향의 맛을 보라며 즉석에서 쑥송편을 만들어주신 오장환문학관의 임선빈 수필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취재팀
기획: 박인식
사진: 정동희
글: 유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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