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의 의의
동학혁명을 서술하면서 나는 의병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농민군과 민보군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농민군 스스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난 의병이라 생각했고, 민보군 스스로 나라를 위해 떨쳐 일어난 의병이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의병끼리 싸우는 내전이 되었으며, 이는 서양의 시민혁명처럼 계급혁명의 성격이 강했던 동학혁명의 특성상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19세기 민란의 시대를 겪으며 백성의 불만은 꾸준히 축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들을 이끌 이데올로기가 없었고, 그들을 연합할 조직이 없었다. 민란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졌으며, 민란이 가라앉으면 주동자 색출과 처벌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 만민의 평등을 내세운 동학이라는 신흥종교가 등장하였다. 동학의 개벽사상은 종교를 넘어 제국주의 시대의 변화하는 세계에 대처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서도 기능하였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공이 크다. 1864년 1대 교주 최제우의 처형 후 최시형은 충청북도와 강원도의 산악을 중심으로 도피생활을 하며, 경전을 간행하고, 포교를 하여 포접제를 만들어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했다. 비록 관의 탄압을 받았지만 동학의 교세는 꾸준히 늘어 1880년대를 지나며 충청도를 넘어 1890년 무렵에는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화대되었다. 이에 수많은 민란을 겪으며 성장한 전라도의 혁명세력이 동학을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고, 동학의 사상과 조직을 이용해 반상의 질서를 뒤엎는 계급혁명을 단행하게 되었다. 당시 집권층의 부패와 무능력으로 볼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고종이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고종의 외세 의존은 결국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고, 일본이 내세운 괴뢰정부가 등장하게 하였다. 고종은 일본군의 도움으로 계급전쟁을 승리할 수 있었다.
동학혁명의 과정과 이후 최소 30만 이상의 양민이 희생된 이유는 조선정부와 일본군의 목적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은 혁명세력의 뿌리를 뽑아야 할 이유가 있었고, 일본은 조선 점령을 위해 민중의 저항세력을 미리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동학혁명의 농민군에겐 뚜렷한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혁명을 통한 계급 타파와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는 국가 방위다. 하지만 조선은 백성의 나라가 아니었다. 사대부의 나라였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에게 동학혁명은 곧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반란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양반의 99%가 그랬다. 따라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농민군이 일본군보다 먼저 타도할 대상이었다.
더구나 무능하고 겁 많은 고종이 일본군에 사로잡혀 일본에 저항하기는커녕 이 기회에 일본의 힘을 빌려 왕권을 위협하는 백성의 혁명 세력을 타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종은 작전지휘권을 일본군에게 넘겨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왕은 왕권밖에 모르고, 사대부는 기득권밖에 몰랐다. 위정자들은 시대정신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시대정신은 동학과 농민군에게 있었지만, 병자호란 이후 송시열의 원리주의가 지배한 조선의 정치와 학문은 새로운 시대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임진왜란의 빛나는 의병은 18세기를 지나며 변질되어 19세기 가문의 영광을 위한 과장과 사대부의 허영으로 전락하였다. 사대부 의병의 의기는 높았으나 계급적 한계가 명확했다. 사대부 의병은 역사의 진행에 역행하는 반혁명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는 인권의 자각과 더불어 민주공화국의 흐름으로 바뀌고 있었지만, 나라의 주인인 백성의 의사표현과 요구를 도둑 무리가 일으킨 난리로 매도했다. 백성을 살해한 지배계급의 의병을 시대정신은 인정할 수 없다.
역사의 나쁜 선례는 반복된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명군에 작전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전국적인 의병활동으로 전세가 역전된 상황에서 명나라군은 지휘권을 받아 4년 동안 휴전을 하였다. 일본군이 위기를 모면하고 정유재란이라는 더 큰 비극을 일으키게 하였다. 선조와 조정은 책임 지지 않았다. 오히려 위정자들의 사대주의와 외세의존, 그리고 자기비하가 강화되고, 역사의 조건반사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이를 강화시켰다. 거기에 송시열의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형식과 명분만 집착하는 조선은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의 나라가 되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성급하게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한 고종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백성을 적으로 여겼다. 선조처럼 일본군에 작전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6.25가 일어나자 이승만은 먼저 달아나고 미군에 작전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해방 후 4.3과 보도연맹 사건 등 국민을 좌익으로 몰아 학살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지금도 미국으로부터 전시 작전 지휘권을 환수 받지 못한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역사의 나쁜 선례가 얼마나 치명적인 지 알 수 있다.
내란이 되어버린 동학혁명의 비극은 근대 한민족사에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또 하나의 끔찍한 선례를 만들게 되었다. 계급전쟁이 되어버린 동학혁명 속에서 보수 사대부와 진보 농민군의 좌우대립이 처형과 학살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를 관통해 해방 후 좌우의 대립과 6.25를 겪으면 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되풀이 되고, 지금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냉혹한 평가와 심판을 거치지 않은 역사는 결국 되풀이 된다.
그러나 의병사에서 우리는 평민의병으로서 동학혁명의 농민군을 평가할 수 있다. 사대부들에겐 동도(東徒), 동비(東匪)였지만, 그들은 평민이 주인이 되는 평등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 외세를 물리치려 일어났던 평민의병들이었다.
의병(義兵)의 사전적 뜻은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이 국가의 방어를 위해 무기를 든 민간인 부대를 가리킨다. 조선의 의병은 성리학적 대의명분인 정의(正義) 관념이 더욱 투영되어 있다. 국가 방위에 앞서 정의 관념과 도덕적 자부심이 뚜렷이 담겨 있다. 동학혁명을 통한 평민의병의 등장을 통해 우리는 사대부 의병이라는 조선의 계끕적 특수성을 벗어나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부합하는 백성(국민)의 의병을 만나게 된다. 시대에 따라 의병의 주체가 달라져도 정의를 실혈하려는 정신은 동일하다.
그래서 동학혁명의 농민군과 5.18의 시민군은 다르지 않다. 동학혁명을 통해 우리는 시민혁명의 최초 역사적 토대를 만나게 된다. 한국 민주주의의 특별함은 이렇게 정의(正義)를 실현해나가는 의병 정신으로 면면히 계승되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