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과 새로운 문명의 조건
홍기돈
한진그룹 조양호 일가의 행태가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처음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소위 ‘갑질’이 문제되었는데, 연이어 폭로되는 사례들은 너무나 경악스러워서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신병리학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은 수준이다. 연이어 제기된 탈세 문제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세관을 거치지 않은 채 온갖 명품을 들여온 것도 그러하지만, 해외 각 지점을 닦달하여 계절 별로 과일을 공수하는 양상은 봉건 왕조 시대의 조공을 연상케 한다. 최근에는 조양호 회장의 상속세 수백 억 탈루 문제가 불거지고 있으며, 해외에 빼돌려 보유하고 있는 재산에도 불법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뿐인가. 차녀 조현민은 미국 국적으로 항공사 진에어의 사외이사를 맡는 불법을 저질렀으며, 아들 조원태는 그들 일가가 소유한 대학교에 부정 편입학하기도 하였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문득 근대체제 삶의 방식을 떠올려 본다. 근대의 특징에 대해서라면 사람마다 각기 다양하게 지적할 수 있을 터인데, 나의 경우엔 소유욕을 적극 긍정하는 측면에 주목하게 된다. 소유권의 주체 여부를 두고 치열하게 맞서기는 했으나, 보다 많은 물질의 소유를 긍정하였다는 지점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하나의 뿌리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다른 문화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근대체제의 유별난 면모이다. 예컨대 수신修身을 강조하였던 동아시아의 중세 지식인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지향하였으며, 예수의 길을 좇았던 서구의 중세 수도사들이 삶의 덕목으로 삼았던 것은 자발적 가난이었다. 설령 세속에 물들어 치부致富했어도 그들은 이를 남들 앞에 나설만한 자랑거리로 삼지 못하였다. 추구하는 삶이 재물의 소유인 양 비춰지는 데 저어했기 때문이다.
소유욕을 긍정하는 근대체제의 속성은 과학에 대한 신뢰에서 파생했을 터이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개화기 발간된 『대한자강월회보』에 따르면, “천지간 존재하는 물物에 인공을 가하여 유용성을 일으켜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활동이다. 자연을 개발함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행위가 과학이라는 주장인데, 이 순간 근대인의 자리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제 인간은 당당한 주체로서 대상(객체)인 자연을 조작하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이는 달리 표현하여 자연의 일부로 존립하던 인간이 자연의 바깥으로 뛰쳐나왔다는 말이 된다. 김소월의 「산유화」에 펼쳐진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라는 진술은 바로 그러한 근대인과 자연山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고 있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 하여 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를 지향했던 인간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멸을 꿈꾸지만, 차면 이우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예컨대 둥글게 부풀어 오른 하늘의 보름달은 차츰 이지러지며, 햇볕 드는 양지는 이윽고 음지로 순환하며, 숨을 한번 들이마신 생명체는 이제 내뱉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여 자연의 바깥에 나름의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근대인의 기획도 이를 넘어설 수 없는 것 아닐까. 인간 실격이라 할 만한 이번 조양호 일가의 패륜은 꺾여 저물어가는 근대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한 가족의 윤리의식 부재 층위에서 질타할 수 있고, 일그러진 특권의식이 횡행할 수 있도록 방치한 한국사회의 결함을 구조 층위에서 진단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소유욕을 승인ㆍ장려하는 근대체제의 작동 방식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유욕이란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김수영, 「절망」) 무한하게 증식하는 속성을 띠고 있는바, 눈먼 소유욕의 폭주가 이번 사태의 전제로 작동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효는 『대승기신론 별기』에서 화쟁和諍의 입장을 취하면서 “보내기만 하고 두루 미치지 못하는 논”(=空에만 집착하여 有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과 “주기만 하고 빼앗지는 않는 논”(=有에만 집착하여 空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비판하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세계가 “주기만 하고 빼앗지는 않는” 입장 위에 구축되었으며, 이에 근거하여 운영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려면 근대가 배제하고 삭제해 버린 공空의 가치를 어떻게든 되살려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둘러싸고 있는 조건과 맞서면서 그 경계 바깥으로 탈주하려는 것이 문학적 상상력의 가치라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우리 문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런지는 새삼 물을 필요가 없을 터이다.
홍기돈 |1999년 《작가세계》평론 등단, 평론집 『페르세우스의 방패 』『인공낙원의 뒷골목』『문학권력 논쟁 이후』, 연구서 『근대를 넘어서려는 모험들』『김동리 연구』가 있음, 현재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학과 교수, 《불교문예》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