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우리詩》 2015년
하반기 신인상 당선작
공중그네 외 5편
정 병 성
새들이 머무는 하늘엔 흔들리는 그네가 있다
바람이 교차하는 곳으로 그네에 앉아 본 새들은 안다
바늘 자국난 등허리 위로
무릎을 꿇은 사막의 낙타들, 새들 곡예란
몸 안쪽이 가벼운 짐승일 것이다
찢긴 날개를 펼치고 반짝이던 고통을 흩어 놓아야 하고
지상의 아픈 것들을 공중으로 비워야 하기 때문.
나도 한때는 검은 사슴벌레처럼
가느다란 발톱으로
부러진 직립의 시간을 씹어 삼키고는
혹 겨울에도 푸른 숲이 있을까 더듬이를 세우곤 했었지
꿰맨 실밥구멍 안쪽으로
가로누웠던 척추 병동 그 풀밭,
퍼즐조각 마른나무 침상은 갈망하는 몸짓을 하고
바람은 사슬바퀴를 닮아
둥글게 맞물려 회전하는 손잡이를 몰고 왔지
그때 새와 새들은
끈과 끈이 휘도는 순간에도
제자리를 수천 바퀴 빙빙 돌다가 하늘이 늘어뜨린
빛줄기를 힘껏 잡아당겼지
흔들림이 아니고서는 그네를 잡을 수 없었던
습하고 느린 현기증, 날갯짓으로 햇살을 잡아먹는 새들은
늘 지혜롭다
허공에는 무게 없이도
얽힌 호흡을 보듬는 갈고리가 있어서
난 힘살을 움켜쥔 빛의 단서를 향해 양손을 쫙 펼친다
눈물이 말하는 빛을 따라 걷는 길
눈을 감고 햇살을 보면
눈꺼풀은
햇볕의 쬠에 빨간 온실이 된다
굳었던 긴장이 풀리며 찔끔 쏟는 미세한 눈물은
민감한 빛의 배설이다
뜨거운 물을 마실 때 스르르 떨어지며 빛이 우는 낭독
고요했던 소아암 병동
몸속 어딘가에 숨어
집요하게 어두운 구석을 터뜨리는 빛
마취 풀린 아가들 잠든 입가
한 줄기 빛만이 고통스런 얼굴을 톡톡 쏘아대고 있을 때
살아 있음은 실과 같은 가느다란 빛
그곳 숨결을 걷는다는 건
잠든 미래를 깨우는 씨앗의 반응이겠다
아가들은 엄마의 뱃속이
생명의 온실인 걸 알았을까?
그래서 빛과 충돌하는 순간에 펑펑 울었을까?
긴 겨울 어둠을 등지고 기적처럼 오른 생강나무 빠알간 새순
땅을 밟고 빛이 걸어오는 소리
그 엷은 살을 밟고, 밟고, 밟고,
길의 진흙탕은 눈물일까
내가 밟는 지면은 눈꺼풀일까
내가 걷는 길은 햇볕의 온실일까
다세대 우편함
골목 안, 노란 꽃잎 하나 웃었다
질경이나 민들레 같은 소들소들한 꽃들을 바짝 끌어안고
한 줌 햇살 먹은 우편함
그 네모난 도형 밑으로 올라오는 낮은 풀들이
지상을 비집고 나올 때면
세든 집들은 이삿짐에 언 겨울을 터느라 분주하다
건물 외벽
치렁치렁한 전선은 하나의 전신주로부터 질긴 끈으로 엉켜 있고
그곳 담벼락엔
작달비가 들이쳐 가녀린 풀대를 세운다
심장 같이 빗물에 튀어나온 울퉁불퉁한 붉은 보도블록과
이름 없는 잡초들,
간혹 그리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면
텅 빈 가슴 독거노인이었다가도 금세 포근해진다
집주인이 바뀌었다
수도세를 나누던 안주인이 전립선암으로 부고장을 내밀며
대문 앞 발자국을 달빛으로 채웠다
미처 세금을 내지 못한 독촉장은 쌓여만 가고
한동안 초록으로 불리는 광합성 그 구두점이 얼룩져
골목 안을 떠나지 못한다
검은 이끼가 이빨 없는 빗물 배수구에 낄 때쯤
난 불쑥불쑥 우편함 뚜껑을 열고 손을 내밀어 햇살을 만진다
젖은 부음에
햇살 먹은 초록 우편함
사망자의 이름을 찾아 온기를 추려내는 일은 나만의 몫이다
살 속으로 피는 꽃
살갗에 암자색 꽃을 사랑한 날들이 많아졌다
한낮 주름 사이로 몰려든 죽음의 전령을 검버섯이라 명명하기까지
오랜 식물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이슬을 먹어 치웠을까
탈고되어가는 생애가 숨 속을 파고들 때
뒤뜰에 검은 꽃 하나 피워 보지 않고는 햇살을 논할 수 없겠다
한 생에 검버섯이 되어 가는 일이란
초봄을 받든 산수유 꽃밭에 죽음의 풍경을 초대하는 일
길 머문 망각의 촉수로
몸의 양분을 어룽어룽 신나게 빨아 치우고는
불치의 간이역 하나 꽉 틀고 앉아 꽃가루를 거무스름 흘려 놓는 일
뽀얀 생을 야금야금 파먹은 아침을 가로지른 날들이
햇살의 잠언을 끌어안은 아랫목과 같은 것
거친 호흡, 흡반을 내려놓아야 하는 오후의 반점
난 흔들리는 영광을 피워 낸 소슬빈혈이 갈수록 의문스럽다
초록이 오면 낭독하듯 휘청휘청 몰려드는 검버섯들.
맨홀 속 물소리
가슴과 가슴
달빛과 달빛이 수평이고 싶었어
가파른 에스컬레이터 때는 빙하기였어
언덕 아래로 밀집된 주택 눈 덮인 몸속을 흘렀어
어둠 스몃한 골목
꽁꽁 언 뚜껑 안으로 한 시도 멈추지 않았던 물소리.
적막한 심장만이
낯선 길을 주르르, 저들은 알아
그때 산다는 염전을 핥은 유언은 모두가 맨홀 속으로 빨려들어 갔어
옥상에서 투신한 새들도 수직으로 잠들고
거기에는 저벅저벅 직립하는 목울대가 있어서
말문을 도려낸 소리만이 졸졸 흐르고 있지
지붕 위의 별들
부러지지 않는 벅찬 나날들
서로가 손을 잡지 못하여 수평으로 가만가만 빛나고 있었지
멈추지 마라! 정화의 소모란 혈관을 탁본한 나지막한 질서
날기 위하여 떨어지는 모순이여
달빛은 귀를 열고 확신에 내려앉았어
죽음에 긁힌 소리는 비탈 길 악취를 내며 어디까지 으스러져 갈까
믿음이 잠든 휴일
낮게 낮게 홈통 물소릴 따라가다가
가뭇없는 신음 흘러내리며 발과 발들은 가슴 뛰도록 나는 너의 맨홀을 밟고
서 있네.
당선소감 - 정병성
햇살의 이동
빛은 곧다. 그러나 빛은 내게 곡선으로 존재한다. 스쳐 지나간 어두운 구석들을 속속들이 찾아낸다. 시는 빛줄기와 같다. 주저앉았던 절망의 목록들과 기울어진 시간을 일으켜 세웠다. 아주 느리게 내 인생의 철자법을 양지로 펼쳐놓으며 신생의 곡선을 그었다.
난 소양강 수몰지구에서 태어났다. 이상하게도 사라진 마을 음영 속 햇살은 날 염탐하듯 따라다닌다. 정서의 시간을 앞질러 어둠의 혹독한 연단은 미래의 은유였다. 삼봉 정도전의 후손, 선친인 아버지는 대낮 햇살의 길이만큼이나 세상 쓴맛을 통달한 애주가였다. 어쩌면 내 글의 시원은 봄볕 햇살의 맑은 곡선을 타고 삼각산 근원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낮술에 취한 듯한 오묘한 길은 즐거운 파산의 詩作이며 새로운 단서의 詩作이다. 새들의 안식처, 지금 이곳 나무들 사이로 필생으로 날아든 곡예사의 시작이다. 어릴 적 시인이 되는 법을 몰라 누이 책장에 시집들을 들척이며 새들만이 거하는 산속에 섬으로 살았다. 그리로 홀로 치열하게 도망친 날들은 정서적 호흡과 활자들을 푸른 평원으로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위대한 침묵꽃 어머니 그리고 나비의 부활꽃 J, 하루살이 時詩비비 벗님들, 그리고 삶의 맨 오른쪽 일반 쓰레기 그 이상의 존엄성을 기록할 모두에게 이 기쁨을 돌린다. 지금 문학적 겸손만이 뜨겁게 은신시킬 뿐, 시인으로 살도록 문을 열어 주신 우리시회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 올립니다.
정병성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광운대학교 상담복지정책대학원 노인복지 전공.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시부문 수상(2013).
첫댓글 좋은 작품으로 수상하셔서 등단하삼을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더욱 정진 노력하겠습니다.
빛은 휩니다.
그네도 공중이 아닌 곳에서 흔들릴 수 있나 생각해 봅니다.
신인상에 오르신 거 축하합니다.
선생님, 사유를 통해 겸손한 시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인사올립니다. 축하의 글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정병성 시인님, SDU 출신이시군요 문예창작학부 저와 동문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더욱 정진하시고 문운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반갑고 감사드립니다. 정진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시인님 <가랑잎 통신> 시집 출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