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펜로제는 기분 좋은 느낌의 산장이다. 조문행 씨라는 한국 분이 일본인 아내와 함께 운영하고있다. 코오상은 일본 여성 특유의 사근사근한 친절을 갖춘 사람으로 하루 종일 바지런히 움직이며 한국인 요리사 한분(우리가 샤모니의 완태형이라 불렀던!), 도와주는 일본 여성 한분과 함께 산장 일을 해내고 있다. 끊임없이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고 부탁하는 나에게도 전혀 귀찮은 기색 없고 서툰 일본말로 인사를 붙이거나 하면 활짝 미소를 띠어준다.
샤모니야 전 세계의 등산객들이 모여드는 곳이지만 특히 이곳은 몽블랑을 가려는 한국 사람들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모양이라 다 알만한 산악인분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산 사회에 익숙지 않은 나도 엄홍길 씨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푸른여행사 대표 김태삼 씨를 만난 것도 이곳. 마침 우리와 같은 일정으로 마터호른에 들어간다는 김태삼 씨는 훼른리 산장의 전화번호와 함께 올라가는 길 등에 대해 이것저것 정보를, 아니 겁을 준다.
혹시나 하고 훼른리 산장에 전화를 해보니 자리가 있단다! 반갑기만 할 일이 아닌데?! (우리는 한국에서 숙소를 미리 예약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하지만, 구떼나 훼른리 등의 산장은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할 수가 없다. 예약은 전화로만 가능한데 이것도 거의 현지 가이드들 우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전날 전화 예약이 된다는 사실은 다음 날의 기상이 좋지 않다는 뜻.)
마터호른 등반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훼른리 산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태시 역으로 가서 주차를 하고 째르마트까지 가는 왕복 기차로 갈아타야 한다. 왕복 기차권을 사는데 스위스 티켓 (또는 Half Ticket이라고 함)을 살까 잠시 논의가 오간다. 스위스 티켓이란 한 달 동안 스위스의 모든 교통수단을 반액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할인권으로 가격은 110 스위스프랑이다. 잘 아시겠지만 유럽 지역, 특히 스위스의 탈것들은 상당히 비싸다. 잠깐 뭐만 탔다 하면 몇 만원이다! 여기서 퀴즈, 110프랑 하는 할인권을 사는 것이 이득이 되려면 교통비를 얼마 이상 써야 할까? 우리는 결국 스위스 티켓을 사지 않기로 한다.

- 태시역에서 출발하기 전에 -

- 째르마트로 향하는 열차 안의 성민 형님. 멋진 포스다 -

- 전기자동차와 마차 등만 허용되는 째르마트 시내. 그래서 우리는 태시역에 주차하고 주차비내고 또 티켓사서 왕복열차 타야하는 거지-
슈바르체제에서 케이블카를 내리고 나면 그때부터 훼른리까지 두 시간 여가 걸리는 매우 아름다운 트레킹로가 이어진다. 몽블랑에 비해 좀 더 녹색 톤이 짙은 회록색의 잡석지대를 오르는 길은 사방을 두른 산들과 군데군데 형성된 빙하호(연못?)가 비추는 영상이 시원한 절경을 이룬다. 이미 몽블랑을 다녀온 후라 올라가는 걸음들이 한결 가볍다.

- 훼른리 가는 길 중간 휴식처-
훼른리 산장에는 중앙 로비에 큰 글자로 써 붙인 '가이드에 의한, 가이드를 위한' 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일반 등산객은 가이드와 그 일행이 떠나고 난 '3:30분 이후에 출발하라'는 것이다. 우리 일행도 결국 네 시경에 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4시 정도에 출발해서 정상까지 갔다가 그날 내로(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오려면, 고소에서 오르막길을 몇 시간 정도 거침없이 오를 수 있는 체력이야 기본이라고 친다 하더라도, 한번도 길을 잃지 않는다는, 초행길에서 바라기 힘든 희망에다, 잘해야 반반의 확률인 호의적인 날씨까지 따라주어야 한다. 그러니,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려면 적어도 새벽 2시 정도에는 출발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도, 나는 출발도 하기 전에 또 40분 정도를 낭비하고 말았다. 전날 짐을 챙기면서 어택 배낭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한 나. 배낭은 지금쯤 태시 역의 주차된 차 트렁크 안에 얌전히 들어있을 것이다. 남규 형은 짐이 많지 않으니 가방을 하나만 챙겨 자신이 들겠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60리터짜리 배낭을 들고 20시간 정도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마음이 개운치 않았지만 출발한다. 산장 뒤로 돌아 한동안 걸어 들머리에 도달하니 초입에 고정 로프가 있는 구간을 지나느라 사람들이 주욱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20분 정도는 지체될 것 같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나는 다시 산장으로 돌아가 미안하게도 자리로 돌아간 미란 언니 (감기기운으로 안 가기로 한)를 깨워 언니의 어택 배낭을 빌려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갔다. 배낭을 다시 챙겨 출발할 때는 이미 새벽 5시가 다 되어간다.
올라가는 길은 그냥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아니지만 결코 어렵다고는 할 수 없는, 쉬운 등반길이다. 단지, 길이가 길고 솔베이 산장에 가까워지면서부터는 눈이 쌓여있기 때문에 미끄럽다. 그렇다고 빙벽화에 크램폰을 미리부터 착용하면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낙석. 무슨 돌이 기왓장도 아니고 잡는 것마다 들썩거리나. 남규 대장은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두 번이나 대형 낙석을 일으킨다! 저런 거 제대로 맞으면… 식은 땀이 난다. 다행히 별일 없이 자리를 찾는 돌들.
보통 솔베이까지 위험 구간을 지날 때 로프로 연결하여 서로 확보를 하고 간다. 한진, 성민, 대원은 각개격파로 올라갔지만 나와 남규형은 슬링을 이어 연결한 안자일렌 방식을 택했다. 속도가 늦어지는 단점은 있지만 몇몇 구간은 사실 그냥 올라가기 겁나더라. 실제로 나는 중간에 한번 안자일렌 덕을 톡톡히 본다.
솔베이 산장까지 절반 이상 갔을 때인가 보다. 점점 눈 쌓인 부분이 많아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바위 옆 눈 위에 발을 딛는데 릿지화를 신은 발이 죽 미끄러진다. 엇, 하는데 몸은 이미 제어가 되지 않고 계속 주르륵. 한 없이 미끄러지는 느낌이었지만 연결한 슬링이 3~4미터밖에 되지 않았으니 실제로는 아주 짧은 거리였겠지. 어느 순간 몸이 멈추고 위를 보니 남규형은 태연한 기색으로 줄을 잡고 있다… 그럴 땐 좀 더 놀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려가서 보니 이 사건(?)은 우리 앞뒤를 가다가 먼저 하산을 택한 푸른 여행사 팀의 생생한 중계로, 올라가지 않았던 일행들이 이미 다 알고 있더라는.)
<아쉬운 일이지만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항상 사진이 없다...>
드디어 10시 20분쯤 솔베이 도착. 한진과 성민 형님은 이미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장비를 챙겨 출발하려는 중이고, 우리도 일단 뭔가를 좀 먹고 쉬어가기로 한다. 대원은 몸이 좀 안 좋은지 대피소 안의 간이침대에 자리를 잡는다. 외국 아이들 두어 명이 들어와 대원의 자는 모습을 보더니 “Is he sleeping?”하고 묻는다. 이 말은 “(아직도) 자고 있는 거야?”는 아닐 테고 ‘’자는 거죠?” 즉, “(쓰러지거나 심하게 아픈 게 아니라) 자는 거 (맞)죠?” 정도 되겠다. 내가 덮어주는 담요를 순순히 덮고 얌전하게 ‘고마워’하면서 자는 대원이를 보니 참 착해 보인다. 가끔 아픈 것도 꼭 나쁘지만은…

- 문제의 사진. “Is he sleeping?”-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채 장비를 다 꾸리기도 전에 먼저 출발했던 한진과 성민 형님이 돌아온다.기상이 심상치 않아 하산을 결정한 것이다. 나중에 보니 이 과감한 포기가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었다. 나와 남규형도 아쉬우니 한 피치만 더 해보고 하산하기로 한다. 솔베이 위 올라가는 길은 벌써 등정을 포기하고 내려오는 사람들로 붐벼 시간이 걸린다. 이윽고 짧은 등반과 하강, 한 피치를 마치고 첫 번째 하강 지점으로 가니, 한 그룹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이 하강을 막 시작했다. 내려가기를 기다리면서 보니 스포츠 광고지면에서 쏙 뽑아낸 듯 매끈하게 차려 입은 모양새며 떠들썩하고 큰 제스처 등이 이탈리아인들인 것 같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어렵다더니 하산길이 과연 만만치가 않다. 클라이밍 다운과 하강을 되풀이하는 사이 변변치 않은 내 장갑이 젖어버렸고, 남규형이 선뜻 자기 장갑을 벗어주고 맨손 투혼을 보여준 것은 아름다운 일이었으나 이번에는 이 장갑이 너무 크다. 하강을 계속해야 하는데 하강기 하나 제대로 끼우기도 어렵다. 서서히 지쳐오는데 생각보다 시간은 너무 걸려 사위가 어둑시근해지는데 비조차 내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길까지 잃어버리면 이제 문제가 커지는 거지.
다행스럽게도 한 번 길을 잃은 것을 제외하고는 잘 찾아 내려왔다. 남규형은 자세히 보면 내려가는 길이 보이는 모양인데 문제는 가끔 가스가 차올라 앞을 가늠할 수 없다는 거. 거의 훼른리 다 와서 길을 보고 있는데 두 사람의 외국인이 나타난다. 반가운 마음에 훼른리로 내려가냐고 묻자(이런 뻔한 질문을…) 그렇단다. 뭔가 더 길을 물으려는데 이 멋대가리 없는 독일 아저씨, 오른 손을 척 들어 나를 제지하더니 주머니에서 뭔가 부시럭부시럭 꺼내 펴들고 큰 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한다. 물론 독어라서 자세한 내용은 알 재간이 없으나 가끔 들려오는 마터호른이나 훼른리 등의 단어로 미루어 길 안내 책자겠지. 예예~ 처음이시라구요. 그냥 각자 찾아가자구요.
드디어 처음의 고정 로프길이 다시 나타나고 평지에 내려선다. 산장으로 향하는 길을 보니 누가 손을 흔든다. 따뜻한 보온병을 들고 마중 나온 미란 언니다. 도착 시간은 거의 7시 반 정도. 다들 무사히 돌아와 있다. 등반은 처음이지만 워킹은 나름 다녀봐서 18시간 정도까지 걸어봤다. 하산길의 지겨움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터호른 하산길 어지간히 힘들더라. 나중에 지금까지 마터호른에서 초등 이래 500명 이상이 죽었다(주로 하산 중에)는 자료를 읽고 머리카락이 쭈삣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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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터호른에 관한 사실 몇 가지.
- 독어로는 Matterhorn, Monte Cervino (이탈리아어) 또는 Mont Cervin (불어), 이탈리아와 스위스국경에 위치.
-높이 4,478m
- 1865년 에드워드 윔퍼 일행이 초등. 하강 중 일행 4명이 낙석으로 자일이 끊어져 사망한 비극은 유명하다.
* 훼른리 루트
태쉬(주차) -(기차)-> 째르마트 (1,604) -(케이블카)-> 슈바르츠제 (2,584) -(트레킹)-> 훼른리 산장 (3,260 베이스캠프) -(안자일렌, 낙석주의)-> 솔베이대피소 (4,000) -(크램폰, 바일, 혼합등반)-> 정상(동상, 4,478) -> 하강/ 클라이밍 다운
첫댓글 지상에서의 에피소드는 없는게뵈요? 옆자리에 누워잔 머리 좀 없는 인간의 대쉬 순간이나 뭐? 이런 에로티즘 이런거좀 리얼하게 올려 주시면 감동 곁들여서 열심정독 하겠습니다.
^^ 이제 지겨워 지기 시작하심? 그래도 항상 첫타로 댓글 달아주시는 관장님~
글솜씨와 관찰력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멋진 추억 저도 부럽습니다 ^^*
^^* 좀 귀찮아도 글로 남겨두면 나중에 생생하게 떠올릴 수가 있어서요. 지연 씨 책도 읽어봐야하는데~
- 훼른리 가는 길 중간 휴식처- 요사진 당장 알프스로 떠나고 싶어져요 ^^
사진으로 전하지 못한 알프스의 비경이 많다는^^~ 신혼여행지로 어떠셔?
해보니까 좋으셨나요?
역시 선생님은 틈을 놓치지 않으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