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능침공간 혼유석( 魂遊石) 앞에 놓여 있는 장명등(長明燈)이다.
장명등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고 능원의 장생발복(長生發福)의 효력을
북돋워 주기위해 설치한 석물이다. 장생(長生)이 명당(明堂)에서 불길처럼(燈)
일어나라는 뜻에서 장명등이라고 했다고 한다.
장명등은 승려의 부도 앞이나 사찰의 경내에 세우는 조명용 석등에서 유래하였다.
고려시대에 묘소앞에 세워지기 시작하다가 조선시대에는 왕릉 앞에 세우는 필수적인 석조물이 되었다.
분묘 앞의 장명등은 일명 석등룡(石燈龍) 또는 석등(石燈)이라고도 한다.
능침공간 한복판에 들어선 돌로 만들어 세운 네모진 장명등이다.
죽은 왕의 현궁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석등이다.
장명등은 고려 말의 공민왕 무덤에서 처음 보인다.
그 후 왕릉에만 만들어지다가 조선시대에는 1품이상의 재상의 묘역에만 세울 수 있었다.
비단 분묘뿐만 아니라 사찰이나 관가 등의 공공 건축물의 처마 끝에 달거나
마당에 기둥을 세워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장치한 등도 장명등이라고 한다.
정명등은 매장된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표시물이 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불을 밝힐 수 있는 장명등의 화창(火窓) 부분에 실제로 기름등잔을 놓아
묘역을 밝히는 기능을 했다. 점차 형식적인 장식물이 되었다.
조선왕릉에서 능상의 주요 석물인 장명등과 안산의 산정과 축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장명등의 창호로 조산(朝山)을 바라보면 조산 또는 안산의 봉우리와 연결되는 자연의
축을 이루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장명등은 묘역의 화창 부분에 기름잔을 놓아 묘역을 불 밝히는 기능을 했다고 한다.
실제 사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의궤 산릉제기 중에 장명등에 쓸 기름잔과 받침이 있다.
그리고 풍수적으로는 장생 발복이 등처럼 일어나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조선전기에는 8각의 모습이었던 것이 숙종대에 4각으로 바뀌고 정조대 이후 다시 8각으로 바뀐다.
대체로 장명등은 문인석과 무인석 사이 혼유석 앞에 놓였다.
철종 때 문인석과 무인석을 지나 사초지 중심부 텅빈 공간에 장명등을 두었다.
"그 이유는 풍수형국에서 비롯되었다. 철종 왕릉은 강 모양 그 자체가 기다란 배처럼 생겼다.
이같은 모양을 풍수에서는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한다. 출항하려는 배 모양이라는 표현이다.
배의 중심부에는 돛대가 있어야 한다. 돛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강 중앙에 놓여있는
장명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장명등은 능원의 풍수발목 효력을 북돋워 주기 위한
석물임을 알 수 있다.(풍수학자 장영훈)
장명등 앞에 넙적한 돌판이 있다.정중석(正中石)이라고 한다.
조선왕릉 가운데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에만 있는 석물이다.
왕이 절하는 배례석(拜禮石)이라고 한다.
이 배례석이 왕릉의 능상에 석물로 배치한 것은 큰 오류라는 지적이다.
고려 공민왕릉을 베껴오는 과정에서 사찰의 석등과 배례석까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긴 흠이 아닐까 한다. 왕도 정자각까지 들어가 제례를 올리고
사초지 위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게 한 조선왕릉의 능제로 보면
장명등 앞의 배례석은 제자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