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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1)
윈스턴 처칠(1874년 11월 30일 ~ 1965년 1월 24일)
처칠의 출생
1874년 11월 30일 밤, 영국 블레 넴 팰리스에 있는 존 공작의 집안에서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일곱 달 반 만에 성급하게 세상에 나온 윈스턴 처질의 울음소리였습 니다.
"달도 차지 않았는데 태어나다니, 무엇이든 남보다 앞서고 싶은 아이인가 보오."
하원 의원이었던 아버지 랜돌프 처칠은 기뻐서 싱글벙글하며 말했습니다. 남보다 성급하게 태어난 처칠은 몹시 개구쟁이였습니다. 얌전히 있기 보다는 숲을 돌아다니고 동생과 전쟁놀이 하는 것을 즐겼습니다.영국의 명문 집안에서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가정교사를 모시고 공부를 하는 것이 일반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처칠의 부모님들도 가정 교사를 모셨으나 처칠은 언제나 공부가 하기 싫어 도망다니곤 했습니다. 일곱 살이 되자 처칠은 세인트 제임스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습니다. 때문에 학교의 규율이 엄격하였는데 자유롭게 자란 처칠에게 학교는 지옥과 다름없었습니다.
세인트 제임스 학교에서의 처칠은 라틴어와 수학을 너무 싫어해서 언제나 꼴찌였습니다. 사실 엄격한 분위기 때문에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건강이 나빠져 세인트 제임스 학교를 그만두고 조금 쉬다가 좀 자유로운 분위기인 브라이튼 학교로 옮긴 다음부터는 학교 생활이 좀 재미있었습니다. 브라이튼 학교에는 라틴어 과목이 없었습니다. 대신 처칠은 몹시 좋아하는 승마와 수영 과목이 있어서 처칠은 학교 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브라이튼 학교를 마친 처칠은 상급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명문 학교인 해로 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르러 갔습니다. 그런데 라틴어 시험은 한 문제도 풀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치질은 시험지를 백지로 내버렸습니다.
해로 학교의 선생님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명문인 해로 학교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더우기 아버지가 장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처칠의 라틴어 성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영어와 역사, 글짓기 성적은 뛰어났습니다. 그 덕택에 간신히 해로 학교에 입학 허가는 받았지만 최하급반에 배정 받았습니다. 해로 학교에서도 라틴어와 수학은 늘 밑바닥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를 암송하는 것 만큼은 처칠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대 로마의 노래' 라는 천여 줄이나 되는 시를 한 구절도 틀리지 않게 외는 사람은 처칠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익힌 영어와 글짓기가 좋은 글을 쓰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해로 학교에 있었던 일은 처칠의 장난스런 성격을 드러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처칠은 수영을 몹시 좋아했습니다. 처칠이 수영을 하려고 수영장에 갔는데 어떤 아이 하나가 타월을 몸에 두르고 수영장 가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처칠은 그 아이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등을 밀었습니다. 그 아이는 물에 풍덩 빠졌습니다. 그러나 곧 물에서 나와 처질을 물에 빠뜨렸습니다. 멀리서 구경을 하던 처칠의 친구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처칠, 저 사람은 우리보다 상급생이고 기숙사의 학생 대장이야, 게다가 축구부 주장이란 말이야."
이 말을 들은 처칠은 깜짝 놀랐습니다. 몸집이 작았기 때문에 동급생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처칠은 얼른 가서 사과를 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몸집이 작아 동급생인줄 알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자신의 키가 작다고 하는 것에 대해 더욱 화를 내었습니다.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칠은 곧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높은 사람입니다만 몸집이 작으십니다."
이 재치있는 이야기를 들은 상급생은 웃음을 터트리고 처칠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처칠은 자유로운 방학을 몹시 기다렸습니다. 방학이 되면 처칠은 집에 가서 동생과 전쟁놀이를 하였습니다. 동생과 하는 전쟁놀이는 엄격한 학교생활에 지친 처칠에게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때부터 처칠은 군인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샌드허스트에 입학하다
날마다 전쟁놀이에 열중하는 처칠을 보고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윈스턴, 넌 군인이 되고 싶으냐?"
“예, 아버지, 저는 군인이 되고 싶어요. 실제로 병사를 지휘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그럼 육군 사관 학교에 가야겠구나.”
처칠의 아버지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쓸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처칠의 아버지는 아들이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뒤를 이어 훌륭한 정지가가 되길 바랐으나 처칠의 성적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란 걸 잘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생각에는 아랑곳없이 처칠은 아버지가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고 생각을 해 몹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장군감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거야.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게 열심히 하자.”
해로 학교에서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 사관 학교에 가고자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와 수학 때문에 두 번이나 실패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실망 또한 컸습니다.
이 때 처칠의 일생을 바꿔 놓은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숙모님 댁에 놀러 간 처칠은 동생, 사촌 동생과 힘께 놀다가 다리 위에서 떨어져 죽을뻔 한 것입니다. 다행이도 목숨은 구하였지만 처칠은 일 년 가량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따끔한 충고를 들었습니다.
"윈스턴 너도 이제 열여덟 살인데, 좀더 신중하게 네 장래를 생각해야 되지 않겠니?"
이 때 아버지의 말씀은 처칠의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처칠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고 후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칠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어서 빨리 샌드허스트에 들어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이 때 자신이 없었던 수학을 정복하였습니다. 하지만 라틴어는 여전히 처칠에게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습니다.
드디어 샌드허스트에 입교를 하게 되었지만 입학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처칠은 보병이 아닌 기병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처칠은 샌드허스트에 입교한 것만으로도 중분히 행복했습니다.
샌드허스트의 육군 사관 학교는 처칠에게 딱 맞는 곳이었습니다. 지긋지긋한 라틴어와 수학이 없었고 대신 이제껏 배워본 적이 없는 지리, 전술법, 군법, 군정같은 과목에 훈련, 체조, 승마 등 차질이 잘 하고 흥미를 느끼는 과목들 뿐이었습니다. 동료들은 이런 공부와 훈련을 고달프게 여셨지만 처칠은 즐겁기만 했습니다.
특히, 승마를 좋아하여 성미가 사나운 말을 길들이다가 말에서 여러 번 떨어지기도 하고, 있는 돈을 다 털어 경마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 사관 학교를 150명 중 8등으로 졸업했습니다. 해로 학교는 꼴찌로 졸업했던 처칠이 여기서는 우등생으로 졸업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 건강이 악화되어 가던 아버지 랜돌프 처칠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로운 경험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처칠은 소위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인이 된 처칠은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실전에 활용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대에 세계 어느 곳에도 전쟁다운 전쟁을 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단 한 군데 대서양을 너머 쿠바에서 독립 운동하는 자들의 게릴라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라 영국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나라여서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처칠은 거기라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아버지의 친구인 스페인 대사를 찾아갔습니다.
“지를 스페인군에 들어가게 좀 도와주십시오.”
“다들 안 가려고 하는 전쟁터에 너는 왜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거냐?”
“실전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 하지만 윈스턴, 이론과 실제는 다르단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처칠의 결심이 굳은 걸 본 스페인 대사는 처칠을 쿠바로 가게 해 주었습니다.
쿠바의 태양은 뜨거웠습니다. 사천 명이나 되는 군인들이 어디에 숨어 있느지도 모르는 게릴라를 찾아 숲으로 들로 행군을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총소리를 듣고 돌아서 보면 벌써 자취를 감추어 버린 후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공격을 해 왔습니다. 스페인 군대는 다들 지쳐 있었습니다.
처칠은 그들이 딱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게릴라들에게도 동정이 갔습니다. 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저렇게 울분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쿠바에서의 경험은 훗날 처칠이 정치가로서 일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때 또한 처칠하면 생각나는 시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습관은 처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두달 반의 쿠바 생활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처칠은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속한 기병대가 당시 식민지였던 인도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처칠은 인도 생활을 유쾌하게 했습니다. 이 때 폴로를 배우게 되었는데 얼마나 좋아했는지 폴로를 하느라 날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처칠은 폴로나 하면서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칠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지식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처칠은 영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매달 책을 부쳐달라고 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독학이었지만 이 시기에 처칠의 지식은 정치가, 문학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1897년 여름 처칠은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던 처칠은 우연히 인도 국경 지대에서 파탄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처칠은 그 군대 사령관인 브래드에게 전보를 쳐 자기도 전쟁에 참가시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브래드 장군의 회답은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미 군대 장교의 자리가 꽉 차 있기 때문에 군인 자격으로는 받아줄 수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종군 기자로 오면 받아준다고 했습니다. 모험심 강한 처칠은 급히 수소문하여 인도의 파이어니어 신문사와 특파원 계약을 맺고 다시 인도로 달려갔습니다.
파탄족이 사는 곳은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깊은 골짜기에 차가운 물이 콸콸 흐르고 이 천 미터나 되는 벼랑이 곳곳에 있어 그 곳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영국군은 기병대를 앞세우고 나아갔고 파탄족은 원숭이 같이 빠른 몸놀림으로 바위를 건너 뛰어다니며 영국군에 맞섰습니다. 찌는듯한 더위 속에서 전투는 이 주일이나 끌었습니다.
처칠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전투는 결코 모험심만 갖고 되는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처칠은 이 때의 경험을 생생하게 적어 데일리 텔레그래프지에 실었습니다. 처칠의 생생한 글은 굉장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파탄족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다시 자기 부대로 돌아와 근무를 하고 있는 처칠에게 세 번째 모험의 기회가 왔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영국군이 광신적인 회교도들에 의해 수천 명이나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정부에서 군대를 파견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처칠은 그 군대에 지원했으나 총사령관이 평소 처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이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처칠이 끈질기게 졸라대자 모든 경비는 자기가 부담하고 그 곳에서 죽거나 부상당하더라도 영국군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또다시 종군 기자로 참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처칠은 부상당한 병사를 위하여 자신의 팔 가죽을 은화만큼 도려 내어 이식해 주었습니다. 이 상처는 평생 남았지만 처칠은 자신의 아픔보다는 다른 병사를 생각하는 마음에 이런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처칠은 이 전투에서도 아슬아슬한 고비를 많이 넘겼습니다.
이 전투 상황도 처칠은 자세히 기록하여 모닝 포스트지에 보냈습니다. 이번에도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처질은 글을 쓰는 데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문에 글을 기고한 것으로 영국에서 처칠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또한 신문에 기고한 글을 책으로 엮어 낸 것도 날개 돋친 듯이 괄렸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처칠의 저술 활동으로 인하여 약간 넉넉함을 찾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실전 경험까지 한 처칠은 이제 군인은 그만두고 저술가나 정치가로 출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런던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침 영국에서는 하원 의원의 선거가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처칠은 올덤 지구에서 보수당 후보로 나섰으나 천 여 표 차이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몹시 속이 상하고 우울했습니다. 인기가 좋아 꼭 이기리라 생각했던 처칠은 충격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젊은 사람은 실패도 해 보는 게 좋은 경험이야. 처음부터 무엇이고 성공한다면 인생을 위해 도리어 해로울 거야. 게다가 인기란 하루아침의 꿈같은 것이니까.’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포로가 되어 탈출하다
그 무렵 영국은 남아프리카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번엔 보어족의 반란이었습니다. 모닝 포스트지는 처칠에게 다시 한 번 특파원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월급에 모든 비용은 신문사가 댄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처칠은 모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이고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 도착한 처칠은 생생한 기사를 쓰기 위해 군대를 따라 최전방까지 갔습니다. 비록 기자의 신분으로 전쟁터에 간 것이 지만 처칠은 마치 군인처럼 적을 상대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보이군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영국군은 계속해서 고전을 하였습니다. 처칠도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만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보시오, 나는 군인이 아니고 신문 기자요. 그러 니 석방해 주시오."
“신문 기자가 왜 좋은 들었나?”
적의 장교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처질은 사흘 동안이나 계속 끌려다녔습니다. 그들은 영국 귀족을 잡았다는 사실에 아주 즐거워했습니다.
밖에서는 처칠의 활동이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처칠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활동한 내용이 큼직하게 보도되었기 때문에 보어군이 순순히 처칠을 놓아 줄 리 없었습니다. 처칠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처칠은 감옥에서 탈옥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감시가 몹시 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 둘과 탈주를 계획했는 데 처칠만 감옥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감옥을 빠져 나온 처칠은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차역을 지나다가지 처칠은 아무 기차에나 올라탔습니다.
탈주하는 동안 몹시 긴장하였던 처칠은 기차에서 깜빠 잠이 들었습니다. 처칠이 잠에서 깨어 났을 때도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 방향을 몰라 처칠은 열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밤이 될 때까지 숨어 있다가 조심조심 걸어 벌판 가운데 있는 외딴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은 다행히도 영국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처칠은 도와 달라고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영국 기자인데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하였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다행이도 그 사람은 처칠은 숨겨 주었습니다. 그 일대에는 영국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처칠은 몹시 운이 좋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 보어군은 처칠은 잡으려 현상수배까지 한 상황이었습니다. 소문은 들은 집 주인은 처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현상금이 걸려 있어요. 빨리 이 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소.”
시내에서 처칠의 현상수배 전단을 가지고 와 말했습니다.
하지만 떠날 수가 없었던 처칠은 땅 속 탄광에 닷새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어군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빨리 탈출을 해야 했습니다. 그 영국 사람은 국경을 넘는 양털 운반 화물 열차를 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며칠이나 달렸는지 화물열차는 사막을 뚫고 산을 넘어 드디어 국경을 넘었습니다. 열차가 멈춘 곳은 영국과 사이가 좋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습니다. 처칠은 영국기가 나부끼는 영사관을 찾아 뛰어들어가며 외쳤습니다
“나는 처칠이다!”
순간 영사관은 늘라움과 기쁨으로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처칠의 탈출 소식은 이미 영국 어디에나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치질이 그 곳을 성공적으로 빠져 나오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처칠은 신문부터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처칠이 탈출하고 나서도 영국군이 계속 패하고 있다는 기사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기사를 본 처칠은 다시 군대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칠은 사령관을 찾아가 뜻을 밝혔습니다
“저를 장교로 써 주십시오.”
“그럼 신문 기자 일은 어떻게 하려는가?”
“둘 다 하겠습니다. 칼과 펜을 동시에.”
“좋다 그러나 월급은 없으니 그리 알아라.”
처칠은 남아프리카 경기병 연대의 중위가 되어 다시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전쟁에 열심히 참여하는 한편 또한 신문 기사를 쓰는 데도 열심이었습니다. 또한 처칠에게 좋았던 것은 이번 전쟁에는 열아홉 살이 된 동생 잭도 처칠의 부탁으로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동생은 작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처칠도 또한 보어 군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맞이할 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정찰병이 와서 처칠은 그 위험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처칠과 동생은 열심히 싸웠습니다.
보어군과의 전쟁은 참으로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몇 번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영국군은 보어군을 줄기차게 공격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처질은 의기양양하여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영국 국민들은 처칠을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때마침 영국에서는 다시 총선거가 시작되는 때여서 처칠은 지난 번에 참패한 올덤 지구에서 보수당으로 다시 출마하기로 했습니다. 처칠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도 이번 선거는 처칠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몇 표 차이 나지 않은 힘겨운 승리였습니다.
처칠이 안심하고 정치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 때까지의 전쟁 경험을 책으로 내고 여러 곳을 돌면서 연설회를 하였습니다. 책 못지않게 처칠은 연설 또한 시람들을 열광시켰습니다. 멀리 미국과 캐나다에서까지 처칠에게 연설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 때의 연 설활동으로 처칠은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돈을 넉넉히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하원 의원이 되다
1901년 2월 15일, 처칠은 처음으로 하원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처칠은 감격의 첫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수당의 사람들은 처질에게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처칠은 자기가 속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보수당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당의 잘못과 보수당의 잘못을 둘 다 꼬집었습니다. 이런 처칠을 못마땅히 여긴 보수당의 수상과 당원들은 처칠을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칠이 하는 행동은 사사건건 보수당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처칠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처칠은 자유당의 환영을 받으며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습니다. 그 후 처칠은 자유당 소속으로 관청의 차관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정책을 마련하는데 노력했습니다.
처칠이 서른넷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있자 영국의 부인들은 서로 사위로 삼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들은 척 만 척 도무지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처칠이 선거 운동을 하던 중 소개받은 클레망스 도지에 양을 보고 태도가 싹 변하였습니다. 도시에 양을 보고 첫 눈에 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 이 여자와 결혼하자.’
처칠은 서둘러 결혼을 했습니다. 도지에 양은 언제나 남편을 이해하고 절망에 빠졌을 땐 위로해 주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1910년 1월 처칠은 내무 장관의 자리에 올랐고 다음 해에는 해군 장관이 되었습니다. 해군 장관이 된 처칠은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걸 눈치채고 영국 해군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일은 여러 가지 흑심을 품고 있습니다. 독일의 야심에 대비하여 우리 영국은 해군을 강하게 만들어 두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평화로운 시대에 처칠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상은 처칠의 생각이 옳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를 해군 장관에 임명한 것입니다.
처칠은 그 때까지 석탄으로 움직이는 군함을 석유로 움직이게 바꿔 속도가 나도록 했으며 프랑스, 러시아와 해군 협정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처칠 자신도 전쟁에 대한 자신이 생각이 기우길 바랬습니다.
전쟁이 터지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습니다.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내외를 저격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세르비아는 슬라브 민족이었기 때문에 보스니아와 합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세르비아의 애국자들은 몰래 암살단은 만들어 오스트리아의 높은 사람들은 암살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 이 시작되었습니다. 세르비아는 물론 작은 나라였지만 슬라브 민족이었기 때문에 같은 슬라브 민족인 러시아가 뒤에서 돕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도와주려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럽 여러 나라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었던 까닭으로 발칸반도에서 시작된 이 작은 전쟁은 급속도로 유럽 전역으로 번졌고 8월 4일에는 영국도 마침내 독일에게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일군은 성난 파도처럼 기세를 몰아 공격을 해 왔습니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육군도 해군도 모두 밀리기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해군을 담당하고 있던 처칠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처칠은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강한 해군을 만들겠다고 큰 소리를 치더니.”
영국의 해군은 독일군의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격침된 상태였습니다. 곤경에 빠진 처칠은 어떤 참호라도 거뜬히 넘어갈 수 있는 자동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구 끝에 만든 게 바로 탱크였습니다. 열심히 개발을 하였으나 탱크를 본 모든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이런 장난감으로 전쟁에 이겨 보겠다고?”
“처칠은 전쟁이 장난인 줄 아는 거 아냐?”
장관들도 탱크를 보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하지만 이 탱크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탱크 덕분에 육, 해군 모두 참패만 당하던 연합군이 드디어 프랑스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었습니다.
“탱크가 더 많았으면 완전히 승리할 수 있있을 텐데.”
처칠은 도망치는 독일군을 뒤쫓아가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때 전쟁에 참여하고 있던 러시아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가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독일은 러시아측에 배치하였던 군대를 서유럽 쪽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독일군에게 형편없이 무너지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 처칠은 군수 장관이 되었습니다.
이 때 수상이었던 로이드는 자기 소신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처칠의 힘을 필요로 했습니다. 군수 장관이 된 처칠은 대포, 총알, 비행기, 탱크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특히 탱크는 신경을 써서 많이 만들었습니다.
“탱크가 숭리를 가져오는 결정 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예상대로 탱크는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한 달 동안 수십 킬로미터나 진격하면서 수만 명이나 독일군포로를 잡았습니다. 여기에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미국군이 대서양을 건너 합세하여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 무렵 독일은 계속되는 전쟁에 국민들의 불만이 대단하였습니다. 독일군은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성급하게 공격을 했습니다. 미국까지 가세한 연합군은 이런 독일을 함정에 빠뜨리므로서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11시 마침내 모든 전선에서 총성과 포성이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과 독일의 대표들이 파리에 모여 평화 협정을 마련했습니다. 전쟁에 지고 많은 돈을 배상해야 하는 독일은 식민지마저 다 내어 주어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협정에서 독일은 군대를 많이 만들 수 없다는 조항에 사인을 해야 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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