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대왕을 생각하며 화성행궁을 한 바퀴 돌아보자.
화성행궁의 광장이 보이고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이다.
신풍이란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이다.
정문 신풍루를 들어서니 '좌익문'이 보인다.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좌익문을 들어서면 봉수당이 있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당으로 이곳에서 정조대왕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다.
봉수당 내부에는 정조가 앉았던 용상과 책을 읽으며 글을 썼던 곳도 볼 수 있다.
'노래당'은 정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수원에서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인데 4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에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낙남헌'은 1795년 혜경궁 홍씨 회갑연 기간 중 과거시험과 양로연 등의 여러 행사가 치뤄진 곳이라고 한다.
'득중정'은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에서 활을 쏘신 곳으로 모두 명중시켜 '득중정'이라 했다.
해설사님의 해설과 함께 회장님의 포스가 일품이다. ^^
정조의 화성행궁 행사의 일정과 함께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의 설명을 들으면서 어머니를 향한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복내당'은 화성행궁의 내당으로 평상시에는 화성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장락당'은 침전으로 정조대왕이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고 하며
어머니의 침전에 불이 꺼져야 정조는 조용히 책을 읽으며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뒤주를 보니 '사도세자'의 죽음이 생각나서 마음 한 구석이 찌잉하기도 했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화성행궁을 돌아 다시 정문 신풍루로 나오니 마침 무예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화성별관에서 버섯불고기전골로 맛있게 점심을 먹고 수원화성박물관으로 향했다.
기획전시로 열리고 있는 '윤한흠 옛 수원화성 그림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역사와 문화를 볼 수 있었고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여 ‘호학군주’, ‘문예군주’로 평가되는 정조의 글과 글씨·그림 등 귀중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화성은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된 수원의 읍성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산 아래 있던 관청과 민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시키고 이곳에 화성행궁과 함께 화성을 축성하였다.
화성은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이 잘 반영되어 있으면서 방어기능이 뛰어나, ‘성곽의 꽃’이라도 불리며 또한 축성에 관한 모든 기록을 『화성성역의궤』에 남겨 이 책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국궁 활쏘기 체험(연무대)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우리일행은 화성열차를 타고 연무대에서 팔달산까지 약 3.2km의 성곽을 돌았다.
화홍문이 보인다. 수원화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의 북쪽에 있는 수문으로 북수문으로 불리며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북동포루
장안문
북포루
서북각루
정조대왕동상
화성열차만의 또 다른 재미와 즐거움도 있지만 언제 성곽을 따라 걷는 여유를 가져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면서.
용주사
용주사는 본래 신라 문성왕 16년에 창건된 '갈양사'였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용주사 홍살문을 들어서면 피눈물로 썼다는 '혜경궁 읍혈록 문학비'가 있다.
천보루앞의 이 세존사리탑에는 1702년에 성정스님이 부처님의 진시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호성전과 부모은중경탑
이 호성전은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고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때마다 49재(영산재)를 베풀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신제를 올려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고 한다.
전강대종사사리탑
전강사리탑앞의 귀여운 동자스님상을 보니 3월의 봄기운이 느껴지면서 갑자기 춘곤증이 몰려오는 듯하다가
바로 옆의 양지바른 풀밭에 보랏빛 맑은 웃음으로 피어난 봄까치꽃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마나 기쁘고 힘이 나던지...
용주사 동종(국보 제20호)
이 밖에도 용주사엔 효행박물관에서 체험학습도 하고 있어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로 나서 봄도 괜찮지 싶다.
봄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옷깃을 스치는 바람은 연회색 봄바람이다.
거의 15년만에 수원화성을 다시 와 보니 만리장성이 따로 있나 싶기도 하다.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화성행궁과 용주사를 돌아보면서 정조대왕의 효심과 함께 역사적인 아름다운 가치의 재발견에 탐방의 보람도 함께 더한다.
첫댓글 뜻깊은 여정이 부럽습니다.
다음에는 동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저도 덕분에 잘 돌아 봅니다
붉은점님 사진을 보고 너무 감동했습니다.
탐방에도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