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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九 章
되찾은 세월, 그리고 順天에서 逆天으
"으음...!"
환혼주를 몸에 지니고 있어도 일시적으로 가해지는 고통은 어쩔 수가 없다.
철옥 속에 던져진 만강은 짧은 신음을 내면서 나뒹굴었다.
품에서 이제는 그다지 불쾌하지만은 않은 환혼주의 쩌릿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사방이 완전히 막혔을 뿐만 아니라 상하마저도 철저하게 막혀있는 철옥이다.
곁에 떨어진 이신녀는 종리부의 공격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잠들은 듯 눈을 살며시 감고 있는 그 모습들은 일견 요염하게도 보인다.
얼음을 빚어 만든 듯 투명스러울 정도로 깨끗하고 맑은 얼굴,
붉은 입술에 가녀린 턱선,
물결처럼 퍼져있는 머리결,
"휴우..."
만강은 잘게 한숨을 내쉰다.
그처럼 아름다운 두 소녀가 이지를 잃고
오직 남의 명령에만 쫓는 나무인형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안타깝다.
그는 두 소녀의 손목을 잡는다.
환혼주의 기운이 일시 일어나면서
두 소녀가 반짝 눈을 뜨고 만강은 한쪽 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뇌에 빠졌다.
(이화신군을 만나기 위해 육반산을 샅샅히 뒤졌다
. 이곳은 틀림없는 이화곡일텐데... 설마하니 그자가 이화신군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자가 종리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이면 족하다고 한 그 말뜻은 무엇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자가 손을 쓸 때의 정황으로 보아 나는 죽이려고 했고
이신녀는 단지 사로잡으려는 것같았다.
그는 아마도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 그가 밖에서의 일이란 것을 마치고 다시 이곳으로 올까?)
만강은 자신이 만든 의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다.
(아마도 올 것이다
. 그리고 다시 나를 죽이려들 것이다
. 이신녀가 힘을 합쳐도 그자를 대항하기는 힘들 텐데...)
그의 눈앞으로 돌연 황금빛의 거인들이 떠오른다.
만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을 정도의 힘을 발산하던 그들...
자신이 무공을 잃기 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황금빛 거인들의 상상을 초월한 힘에는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막연한 공포로 그를 짓누른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뭐라고요?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여인의 뾰족한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만강은 깜짝 놀라 일어서며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이신녀와 자신 이외에 철옥 속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들었는데... 환청인가?)
만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무슨 소리를 듣지 못했소?"
이신녀에게 묻는다.
이신녀는 목석처럼 그의 눈만을 멀뚱멀뚱 바라볼 뿐 대답이 있을리 없다.
"환청이었나?"
그는 중얼거리며 다시 주저앉는다.
그때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제... 그자의 천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군요.
아! 지난 세월, 두더지 처럼 이 땅속에 살면서 애써왔건만
그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다니..."
(틀림없다.)
만강은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누가 이곳에 있소?"
있소... 있소...있소...있소...
철옥 속에서 그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맴돈다.
귓청이 먹먹해졌다.
"가만있어봐요.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음성이 다시 들려온다.
쾅쾅쾅!
만강은 철옥의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손이 으스라지면서 피가 튀었다.
그러나 금방 그의 손은 원래대로 되었고
그는 다시금 주먹으로 철옥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이 속에 있습니까?"
그 순간,
덜컹!
갑자기 사방의 벽이 기우뚱하며 만강은 바닥에 쓰러졌다.
아니 사방의 벽이 기운 것이 아니라 바닥이 기울어진 것이었다.
주르르르 ...
"으윽!"
만강은 이신녀와 함께 기울어진 면으로 굴러서 어딘가에 떨어졌다.
맑고 신선한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폐부가 확 열리는 것만 같다.
어둡다. 철옥의 안도 어두웠지만 이곳은 그보다도 더 어둡다.
만강은 고개를 들면서 입을 열었다.
"누... "
순간 갑자기 그의 말을 자르는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뜻밖이군. 우리의 오랜 계획을 하루아침에 망친 자가 여기를 찾아오다니..."
"그럼 이자가 바로... "
감미롭게까지 들리는 여인의 음성이 대꾸했다.
"그렇소. 바로 이자지. "
남자의 음성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이들을 모르는데 내가 무슨 일을 망쳤단 말인가? 말도 아니다.)
만강은 내심 그들의 말이 얼토당토 않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나는 오늘 이곳에 처음 왔소. 두 분은 누군데 말을 함부로..."
"입은 멀쩡한 모양이군."
여인의 싸늘한 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그리고,
짜악!
만강은 눈앞에 별이 번쩍하는 것을 느끼며 볼을 감싸쥐었다.
볼이 터졌는지 입안에 피가 한웅큼이나 고였다.
"일단 데려가서 어떤 자인지 한번 봅시다."
남자의 말이 뒤를 잇고 만강의 몸은 두둥실 떠올랐다.
"풋!"
만강은 입안에 고였던 피를 뱉고 소리쳤다.
"너무 무례하지 않소? 감히 대장부를 욕보이다니 이럴 수 있소?"
분노가 가득한 그의 음성에 남자가 주춤하는 것같다.
"당장 나를 내려놓으시오."
만강은 다시금 준엄하게 소리쳤다.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만약 내려놓지 않겠다면?"
살기마저 어려있다.
만강은 흠칫했다.
(정말 내가 뭔가를 잘못했단 말인가? 대체 내가 뭘 어쨌기에... )
그때,
"설봉, 그만하시오. 그도 모르고 한 짓일 거요."
남자의 음성이 들린다.
"알겠어요. 하지만 이 뻔뻔한 자가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우리 마음은 조금도 모르고..."
"됐소. 더이상 거론하지 마시오."
남자가 엄하게 내뱉는다.
여인의 음성은 수그러들고 이내 잠잠해졌다.
휘이익!
만강의 몸은 구름을 탄듯 날아서 밝은 빛이 가득한 한 동부에 들어섰다.
갑자기 불을 대하자 일시적으로 눈이 부셨다.
정말 신비로움이 가득한 동굴이었다.
가운데로는 시냇물 처럼 말은 물이 흘러가고
천정에서 드리워진 종류석들은 빛을 받아 반짝인다.
인공을 가미하여 만든 작은 다리와 길은
은은히 떠다니는 안개와 더불어 천상의 정원과 같은 풍경을 만들어 주고,
사방 벽에 잘 다듬어져 심겨있는 기화이초는
혼백을 앗아갈 만큼 향기로운 냄새를 풍긴다.
꽃들이 가득한 한쪽에 네모로 파여진 석실이 있고
그 석실에는 또한 돌을 깍아 만든 탁자와 침상,
그리고 몇 개의 가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침상에 드리워진 주렴은 오색 수실을 넣어 짠 화려한 것이고
바닥에 깔린 보료도 좀처럼 구하기 어렵다는 서역에서 난 것인 듯하다.
화려함과 자연이 이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어쩌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만강은 주인 부부의 인중용봉과도 같은 모습은 물론이고
동굴의 그윽하면서도 신비로운 정취에 꿈결을 거니는 듯한 심정이 되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신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학창의를 입고 머리에는 건을 썼으며
손에는 한권의 낡디 낡은 책을 들었다.
청수한 얼굴은 영웅의 기상을 담고 있으며 맑은 눈은 세속의 더러움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서른 살이 아직 되지 않았을 것같은 그는 서늘한 눈초리로 만강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만강은 그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낮익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군.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의 머리 속으로 뿌연 안개같은 것이 가려져 있는 것같다.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정작 생각하려면 떠오르지가 않는다.
이윽고 문사건을 쓴 주인이 입을 열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느냐?"
무슨 이유인지 음성이 떨린다.
그리고 짙은 원망이 깃든 음성같기도 하다.
만강은 그의 태도와 물음이 기이하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소생은 종리만강이라고 하오. 이화신군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소."
"네가...휴...!"
주인 남자는 한숨을 한번 쉬고 말을 잇는다.
"만강인 줄은 알고 있다
. 한데...아! 어째서 이런 지경에 빠졌는지 모르겠구나
. 강백주냐?"
만강은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지하의 동부 속에 있는 인물이 자신을 알다니...
그리고 자신의 사부인 강백주를 또 알고 있다니...
"만강이라고요? 이 청년이?"
청의를 입은 여인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만강의 얼굴을 다시금 뚫어지게 바라본다.
"정말이군요. 만강, 만강이었군요."
그녀가 펄쩍 뛰면서 놀란다.
만강은 귀신에 홀린 듯한 심정으로 묻는다.
"두 분은 누구십니까? 어떻게 저를 알고 계십니까?"
"나를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남자가 탄식을 하며 말했다.
"네게 종리라는 성을 붙여준 사람이 바로 나다."
만강은 더욱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그럼... 제 아버지란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보아도 자기보다 그다지 많아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성을 붙여준 사람이라니 잘 믿기지 않는 말이다.
"호호호호... "
여인이 웃음 터뜨렸다.
남자도 쓴 웃음을 짓는다.
"...?"
"강백주는 죽었느냐?"
"그분은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휴...목숨은 진정 하늘이 주는 것인가?
실패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된 이상 망심결을 푸는 수 밖에."
"망심결?"
만강의 물음에 남자가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짓는다.
"너때문에 우리의 오랜 염원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삼십육천강을 처치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또한 하늘이 정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부족하지만 우리 부부가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
"태실봉에서 너와 헤어질 때는 이렇게 만날 줄은 정녕 몰랐다.
이제 나를 기억하도록 해라."
남자가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안으며 말했다.
"획산저실어저(獲山猪失御猪)!"
(산돼지를 잡으려다가 집돼지를 잃었다?)
만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머릿속으로 번갯불같은 영상이 지나갔다.
갑자기 머리 속이 환하게 밝아오며 안개처럼 떠돌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 눈앞이 확 개이는 것을 느끼며 만강은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 처럼 그의 눈앞으로 지나갔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너무도 다른 두개의 삶을 살아온 자신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휘청!
만강은 마침내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심약하기는... 그래도 꼬마가 많이 컷어."
여인이 투들거리며 그를 부축하여 침상에 갖다 눕힌다.
부부!
만강은 이제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다.
종리탁(種里卓),
그가 형님이라고 불렀던 종리탁과 청검마녀(靑劍魔女) 주설봉이었던 것이다.
종리탁은 눈을 감고 몸을 떨고 있는 만강을 내려다 보며 나직하게 탄식했다.
"하늘이 무심하구나
. 네가 실패한 데 이어 삼십육천강마저 그자의 손에 온전히 넘어가 버렸으니..."
"휴! 대체 무슨 수로 그 무서운 삼십육천강을 막지요?"
청검마녀 주설봉이 염려가득한 얼굴로 묻는다.
"나도 모르겠소. 일단은 만강이 정신을 차리는 대로 이곳을 떠납시다.
백리아저씨와 힘을 합쳐서 대항해 보도록 합시다.
그 간교한 자에게 천하를 넘겨줄 수야 없지 않겠소?"
"그자가 삼십육천강을 조금만 늦게 움직였어도 모두 우리 것이 되는 것인데...
아니면 만강이 조금만 늦게 오거나..."
주설봉은 아쉽다는 듯이 말끝을 흐린다.
"그만하시오.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되고 안되고는 하늘에 달렸다고 했소."
종리탁은 눈을 찌푸리며 그녀가 더이상 입을 떼지 못하도록 했다.
그때,
"형님, 제가 어떤 실수를 범했습니까?"
만강이 눈을 떠면서 물었다.
종리탁은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며 말했다.
"이제 좀 괜찮으냐?"
"예..."
만강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세상에는 이처럼 진정으로 자기를 위해주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종리탁은 만강이 진정하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이화곡이고, 나는 이화곡의 당대 곡주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종리탁의 곡주라는 신분은 이름뿐
, 아니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혼자만의 곡주일 뿐이다.
이화곡은 그의 숙부인 종리부의 손에 장악되어 있으며,
일인전승이라는 전통이 깨어져 무수한 제자들이 생겼고,
종리부는 전설적인 기인인 구천신뇌자의 진전을 일부 얻은 것을 계기로
무림천하를 일통하여 무림황제가 되려는 야욕에 가득차 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종리부는 구천신뇌자가 기록한 방법에 따라서
공포의 마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삼십육천강(三十六天 )을 만들었다.
천강불괴체인 그들은 도검(刀劍)은 물론이고
물과 불, 그리고 독에 대해서도 완벽한 저항력을 갖고 있다.
엄청난 거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구천신뇌자가 창안한 천강불괴체 만의 무공을 익혀
하나하나가 절세고수라고 할 수 있다.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으며 깨뜨릴 수도 없고
팔백년 전의 기인인 구천신뇌자의 가공할 무공을 구사하는 삼십육천강,
그것을 보유한다는 것은 천하를 가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일천팔벡 개의 난관을 거쳐야만 완성할 수 있다는 이 천강불괴체 삼십 육구를
종리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시켰다.
종리탁은 그것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은밀히 관찰해왔었다.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종리탁은 삼십육천강을 자신의 수하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었다.
삼십육천강의 제련은 오랜 세월이 걸리는 일이고
매일 종리탁은 은밀히 그들과 접함으로써
이성을 상실한 그들을 자기에게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삼십육천강은 종리부의 신물에 의한 명령이외에도
종리탁의 전음에 의한 명령도 따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종리탁이 망심결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망심결의 구결은 원래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종리부의 명령을 망심결을 이용하여 하나하나 지워나갔고
이제는 오로지 삼십육천강이 종리부의 신물(信物)을 잊게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한데 오늘 만강이 이화곡에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깨어져 버렸다.
예정보다 먼저 종리부가 삼십육천강을 움직여 계곡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아직 삼십육천강은 신물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받아들인다.
종리탁이 삼십육천강에게 다시금 망심결을 펼치기 위해 갔을 때는
만강을 잡기 위해 삼십육천강이 움직여 버린 후였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실을 다 듣고난 만강은 허탈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종리탁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너는 남만으로 가야했다."
"...!"
"남만으로 가서 원래의 생각대로 내 조부님을 찾아가라.
아직도 그곳에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도록 해라."
종리탁은 만강에게 이화신군을 찾아가라고 했다.
그는 남만에서 자신과 이화신군이 살았던 곳에 대해 상세하게 말해주고
이화곡을 벗어나는 비밀 통로를 가리켜 주었다.
드르르...
비밀통로가 열리자 그가 말했다.
"이곳으로 곧장 나가면 산의 동쪽으로 나오게 된다.
이 두분 소저의 도움을 받으면
남만으로 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것같구나
. 네가 몸이 완치된 후에 다시 보자.
우린 그때까지 아마도 삼십육천강의 뒤를 쫓고 있을 것이다."
동굴 속에 만강과 이신녀만 남았다.
종리탁과 주설봉은 병기를 챙겨들고 계곡으로 나간지 오래다.
괴물의 아가리처럼 벌리고 있는 비밀통로로 만강은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서려는 데 다시금 다리가 휘청거렸다
. 충격이, 지난 세월과 자신의 운명에 대한 충격이 아직도 다 가시지 않은 것이다.
처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
그리고 반드시 죽여야만 할 원수인 사부 강백주...
그러면서도 결코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사랑하는 여인 강연지...
"크크크큭..."
만강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비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크크크...큭 뭘 어쩌만 말인가?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들은 내 삶의 중요한 부분들인데, 그들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크크크큭..."
하늘을 향해 절규하고 싶다.
운명이 어찌 이렇게도 가혹하단 말인가?
그 무엇도 그로 하여금 선택할 수 없게 하고 있다.
부모님의 원수,
진정으로 존경했던 사부...
만강은 왜 사부가 자신을 내쫓고 심지어 죽이려고 까지 했는 지
그 이유를 이제는 안다.
"흐흐흐흐... 죽이라고? 누구를? 누구를! "
만강은 고함쳤다.
"차라리 내가 죽고싶다. 내가... "
쾅쾅!
그는 석벽에 머리를 찧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선혈이 벽을 타고 흘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쾅쾅!
터진 그의 머리는 순식간에 치유가 되었고
고통은 극히 잠시 동안만 머물다 갈 뿐이었다.
"우우우... "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목석같은 이신녀는 맑은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 만강의 눈에는 그것마저도 비감을 더하게 보인다.
"으아아아아아..."
목이 터지도록, 아니 세상이 산산히 부서지도록 울부짖으며
만강은 나무토막 쓰러지듯이 천천히 넘어갔다.
쿵...
일순간 사방에 고요가 찾아든다.
"하늘...하늘...하늘이라고?"
탁한 음성이 바닥에 깔리면서 새어나왔다.
"후후후...! 이 모든 것을 주제한 것이 하늘이란 말이지...후후후후...
! 그래 하늘...! 너를 죽이마. 내가 죽일 상대는 너밖에 없는 것같다
. 하늘... 너를...죽이마."
살기가, 엄청난 살기가 그 음성보다 짙게 바닥에 깔리며 흐른다
. 인간을 죽이기 위한 살기가 아닌 하늘에 대항하는 한 인간의 집념이 흐른다.
만강은 마침내 결심한 것이다.
운명이란 것,
그리고 그 운명을 주제하는 하늘이란 존재에 대해서 반기를 들기로...
하늘에 따르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인 순천원을 이어갈 적통으로서
역설적으로 그는 순천이 아닌 역천의 일보를 결심한 것이니...
하늘이 만들어낸 주천신맥(周天神脈)을 타고났으되 하늘을 거스르는 만강
, 그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일어나 비도(秘道)속으로 걸어간다.
*
"나는...그를 죽이지 않았다. "
강백주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로 향해 있다.
백리산의 눈이 그의 전신을 빨아들일 듯 응시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가 무심한 듯 입을 연다.
"그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었겠군."
죽음보다 더한 고통...
이곳에 뒤늦게 도착한 백리산과 양설선생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란 말을 이미 들었었다.
그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독고우란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절세고수로 하여금
마성에 젖어 들도록 만들기까지 만들지 않았던가?
그 독고우가 혈광을 담은 눈빛으로 중인들을 노려보며
한곳에 우뚝 서있기도 하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강백주는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 그것은 백리산에게 한 말이라기 보다도 자신에게 한 말처럼 들린다.
백리산은 검을 높이 들었다가 강백주의 발을 가리키며
칼로 자르듯이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너.를. 죽.이.겠.다!"
"피하지 않겠다."
강백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잡았다.
묵검이 뽑혀 나오며 칙칙한 빛을 발했다.
천하제일인의 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히 달랐다
. 뽑혀 나오면서 부터 검의 끝에는 무지개 같은 기운이 어려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어떤 검법도 아니고 어떤 검식도 아니다.
다만 천하제일인 강백주가 검을 뽑았을 뿐이다.
우울한 얼굴, 그러나 만인을 압도하고 하늘을 오시하는 듯한 강백주,
그의 기도 앞에 살랍미 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강백주와 백리산은 그들의 강함을 초월하고 있었다.
살랍미의 입이 열리며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온다.
"이제 알았군. 저자는 그자였군."
반호풍이 의아한 눈으로 힐끗 그를 본다.
그러나 살랍미는 입을 다물었고
, 반호풍의 눈은 다시 반월도 소선풍을 향했다.
살랍미는 백리산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남만에 있는 자신의 부족으로 들어왔던 가공할 고수인 백리산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가밀공을 익혀서 도검이 불침하는 그의 머리에 상처를 만들어주었던 백리산이다.
그러나 살미 역시 백리산의 신분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선풍은 두 사람의 시선을 받자 허리에서 술병을 꺼내 들이키며 입을 연다.
"깜박했군. 저 사람이 있었지. 껄껄껄...
노부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
그때 한쪽에 서있던 양설선생이
시선은 여전히 강백주와 백리산에 고정시켜 둔 채로 맑은 음성을 흘러냈다.
"반월도께선 아는 것이 많은 모양이군요."
갑자기 반월도의 눈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텅!
내심으로는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 들었던 술병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양설선생, 이 늙은이가 무어 아는게 있겠소? 노부는 아는 것이 없소이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버럭 소리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양설선생이 날아갈 듯 황홀한 미소를 짓는다.
"응당 그러셔야지요."
반호풍 등은 혼란에 빠졌다.
(저 여자가 대체 무엇이길래 한마디에 소선풍이 겁을 먹고 입을 다문단 말인가?
소선풍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니... )
반월도의 가공할 무공은 모두 방금 전에 격어본 바가 있다.
어느 누구도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가공할 결투였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들은 소선풍이 청도에 있는 화검장으로 찾아가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선풍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남자는 날개달린 호랑이고 여자는 꼬리가 아홉달린 여우인데
누가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소선풍이 하나가 아니고 열이라고 해도 저들과는 절대 싸우지 않겠다
. 화검장에 가서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절로 치가 떨린다.)
화검장에서 그는 백리산의 가공할 무공과 양설선생의 기이한 절진에 빠져서 혼이 났다.
하마터면 늙은 목숨을 뼈도 추리지 못하고 묻을 뻔 했던 것이다.
감히 양설선생과 백리산에 대해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번쩍!
"우앗!"
소선풍과 반호풍 등은 눈을 태울 것같은 섬광에 놀라 뒤로 피하며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섬광 속에서 모든 것이 정지해 버렸다.
두 개의 검이 서로를 가리키고 두 사람의 몸이 마치 우주를 유영하듯이 가까워졌다.
어떤 변식도 없고 흔들림도 없다.
오직 서로가 서로의 목을 향해 찔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서로의 목이 검을 향해 밀려가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검은 목에서 한치를 남겨둔 곳까지 접근했다.
그러다 한순간,
파아아앗!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의 몸이 멀어져 있었다.
디이이잉!
그들의 검이 엄청난 진동을 일으키며 살아있는 듯 그들의 손아귀에서 몸부림 치고 있었다.
두사람은 언제 접전을 벌였느냐는 듯이 원래의 장소에 서있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흐트러졌으며 그들의 이마로는 굵은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백리산이 입을 열었다.
"그것이 벽공검법(璧空劒法)이냐?"
강백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극성을 뛰어넘다니... 과연 강백주 너 답군."
"대사형의 죽음, 충분히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강백주가 백리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백리산은 다시 검을 고쳐잡는다.
"지나간 일, 하지만 너의 목만이 모든 것을 잊혀지게 할 것이다."
순간,
번쩍!
다시금 눈부신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파파파팟!
강백주와 백리산은 찰라의 순간에
열일곱 번의 충돌을 하고 원래의 자리로 떨어졌다.
"음!"
백리산이 땅에 내려서면서 나지막한 신음을 뱉었다.
그의 어깨가 검에 스쳐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스팟!
강백주는 땅에 내려서자 마자 검을 찔러 들어오고 있다.
백리산의 몸이 팽이처럼 돌면서 수백개의 발그림자가 허공에서 피어올랐다.
쿵!
강백주의 몸이 튕겨지며 바위에 부딪혔다. 바위가 마치 계란처럼 터져버린다.
"그의 현기혈(玄機穴)을 노려요."
양설선생이 갑자기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소리친다.
칙치칙!
백리산의 검이 수백 송이의 검화를 허공에 거린다.
검화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어지럽게 날면서 강백주를 향해 몰려간다.
강백주가 검을 앞에 세우고 천주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순간,
파아앗!
그의 몸에서 거대한 검강이 피어오르며 모든 검화들이 튕겨져 나가버린다
. 인간이 완벽한 한자루의 검이 된 것이다.
슈우우우우!
거대한 검이 된 강백주는 새처럼 날아오르며 백리산을 향해 덮쳐간다.
"피해랏!"
그 엄청난 광경에 넋을 잃고 있던 소선풍 등이 고함치며 허공으로 솟구친다.
콰콰콰콰쾅!
육반산 전체가 울렸다.
흙과 먼지가 허공으로 사십 장 까지 치솟았다.
멀리서 보아도 육반산은 흙구름으로 뒤덥혀 있다.
그것이 단 두 사람의 고수가 충돌한 결과라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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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봅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감사 드립니다
즐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