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우리는 옛이야기를 할 때 이말을 자주 쓴다 .
그 語源을 생각해 봅니다.
동이족나라 상(은)나라는 자기민족을 衛 (웨이),衣(이)로 지칭 했다 합니다.
倭(왜)도 우리 민족을 지칭 한 글자이며 우리민족이 일본까지 가면서 일본의 우리민족
濊族(예족)을 의미 한다 합니다.
(참고로 濊,倭,衛,衣 이들 글자들은 “웨이” “이”로 우리말을 이두식으로
한자 음역 한 것이며 「해」를 의미 한다고 합니다.)
殷, 商 은 나중에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상나라의 전통을 계승한 부여는 자기땅이 예족이 살던 땅이고 그왕 도장에는
濊王之印 이라고 새기고 있다 .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지 부여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魏畧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甞破壞也。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국력이 강하여 선대부터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 인장의 문구에 말하기를 ‘예왕의 인장’이라 하고, 나라에는 ‘예성’이라는 옛 성이 있으니,
생각건대 본래 예맥의 땅이기 때문이다. 부여가 그 중에 왕이므로,
스스로를 ‘망명한 자’라 일컫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인 것 같다.)
옛날에 부여는 주로 濊族 이라 하고
나중에 고구려는 濊貊(예맥) 이라하는데 모두 상나라,고조선 후예들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주 오랜된 옛날을 표현할 때
濊의 시대,즉 濊나라 시대를 의미 한다고 생각 됩니다.
이기훈 글 일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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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선예백장(晋率譱濊伯長) 동인 (銅印)
1966년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흥곡리에서 발견
여기서 예는 東濊를 의미하며 부여족이 한반도 동쪽 강릉 부근에 내려와
신라와 4~5세기에도 같이 존재,강릉 남대천을 濊江이라 했다함
진(晋)나라(265~419년) 관직명
솔선(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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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부여에서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편)
예(濊)는 남쪽으로 진한,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 있으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에 속한다. 호수는 2만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② “남해 차차웅 16년(서기 19년) 봄 2월,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濊王印)을 주워서 바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③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穢王印)을 발견해 바쳤다.” (삼국유사 마한 편)
북명,명주는 강릉부근
④
삼국사기 고구려조 대무신왕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 대무신왕 4년, 고구려가 대소왕의 동부여를 치기위해 원정군을 꾸리고 동부여로 진군하던 도중..불을 떼지 않아도 곡식을 넣어두면 저절로 밥이 되는 신비한 솥과 어느 동굴에서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그리고 북명사람 괴유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四年冬十二月(사년동십이월) : 4년 겨울 12월,(서기21년)
(생략)
向明(향명) : 날이 밝을 무렵에
使人尋之(사인심지) : 사람을 시켜 그곳을 찾는 중에
得金璽兵物等曰(득금새병물등왈) :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이 이르기를
天賜也(천사야) : "이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拜受之(배수지) : 절을 하고 받았다.
上道有一人(상도유일인) :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身長九尺許(신장구척허) :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面白而目有光(면백이목유광) :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拜王曰(배왕왈) : 그는 왕에게 절을 하고 이르기를
臣是北溟人怪由(신시북명인괴유) : "저는 북명 사람 괴유입니다.
竊聞大王北伐扶餘(절문대왕북벌부여) :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하니
臣請從行(신청종행) : 제가 따라 가서
取扶餘王頭(취부여왕두) :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王悅許之(왕열허지) :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삼국사를 편찬한 김부식이 고구려사를 쓸때 참조했던 '고기(古記)' 등과 옛 역사서에 대무신왕의 동부여 원정 도중
이와 같은 일화를 담고 있는 이유는 고구려의 동부여 원정에 대한 정당성과 군대 및 백성들에 대한 사기 진작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거나 신화로 각색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한 것은 바로 북명 사람 괴유를 만날때 함께 획득하게된 '금으로 된 옥새'입니다.
북명사람 괴유와 바로 이'금으로 된 옥새'를 대무신왕이 동부여로 원정길을 떠나면서 우연히 얻게됬다는 이야기는
결코 이 둘(북명사람 괴유와 금으로된 옥새)가 서로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신기하게도 이 기사를 읽다가 삼국사 신라조 남해차차웅편의 다른 기록이 떠오르더군요.
그것은 바로 "남해차차웅 16년(서기19년)에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우연히 예왕의 인장을 발견하여
남해차차웅에게 받쳤고, 차차웅은 이를 매우 귀히 여겨 소중히 보관했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서기 19년과 21년에 각각 신라와 고구려에서 부여의 옥새가 나란히 발견된 것입니다.같은지역 北溟 에서.
고구려나 신라나 백제 모두 부여 (濊)의 후손 됨이 곧 왕권 확립의 요체 였나 봅니다.
그들은 모두 부여 유민들이 이룩한 나라 라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