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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각삼소 원문보기 글쓴이: 삼소굴
행자가 공부한다는데 찬밥인들 어떠랴 | ||||||||||||||||||||||||||||||||||||||
서울 금강선원장 혜거스님-나의 은사 탄허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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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세계는 끝이 없다’는 탄허 스님의 말씀이다. 언제나 배우고 익히는 것에 힘쓸 것을 강조했던 스님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학해무변’을 생각하면서 탄허 스님의 제자 혜거 스님을 찾았다. 서울 강남 개포동의 아파트 숲 사이 작은 상가 건물. 오래 전 지은 건물이어서인지 많이 허름해 보인다. 건물은 허름했지만 그래도 주차장에는 차가 가득했다. 상가 4층에 있는 금강선원에 들어서니 평일임에도 법당은 500여 불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금강선원장 혜거 스님은 이날 『승만경』을 주제로 법문을 하고 있었다. 수십 년째 이어온 경전법회에는 법당 용량을 초과하는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한다. 법회가 끝나자 공양간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신도들이 공양을 나르기 시작한다. 공양간이 없어 법회를 마친 그 자리에서 밥을 먹는다. 국밥 한 그릇에 반찬이라고는 김치 몇 조각뿐이지만 도반들과 같이 먹는 밥은 꿀맛이다. 사람들 틈에 끼어 밥을 먹고 5층에 있는 혜거 스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방안에 가득한 책들을 병풍삼아 스님은 앉아 있었다. “2012년이 성철 스님, 서옹 스님, 향곡 스님의 탄신 100주년이었는데 올해는 저의 은사이신 탄허 스님의 탄신 100주년입니다. 동시대를 사셨던 어른들을 선양하는 사업들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무표정한 얼굴의 스님이 운을 떼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금강선원을 일궈온 혜거 스님의 눈썹에도 하얀 서리가 내려 앉아 있었다. “이제 좀 쉬엄쉬엄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부처님 덕에 이렇게 살아 왔는데 앞으로 더 열심히 법(法)을 전해야지요.” 차의 향기가 방안에 퍼지기 시작할 즈음 혜거 스님의 스승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제 고향은 전남 영암입니다. 집안 외삼촌이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졌던 분이에요. 어릴 때부터 외삼촌께 다양한 불교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출가를 생각한 것 같아요. 십대 후반에 출가를 했는데, 그때도 외삼촌께 출가의 뜻을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어디로 출가하면 좋겠냐고 여쭈어 보니 외삼촌께서 탄허 스님께 소개장을 써 주셨습니다.” 스님에게 친절하게 불교를 알려주던 그 외삼촌은 김지견 박사다. 김 박사는 한국 화엄학 연구의 선구자로 꼽힌다. 한국과 일본에서 다양한 화엄 관련 연구 성과물을 쏟아냈던 김 박사는 2001년 일본 도쿄에서 생을 마감했다. “제가 출가하겠다고 하자 동국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외삼촌께서 자문을 받았나 봐요. 당신 조카를 어느 스님께 출가시키면 좋을지 말이에요. 당시 주위 많은 분들이 탄허 스님을 추천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시대에 불교의 모든 부분을 갖추고 있는 분이 탄허 큰스님이다’고 하셨어요.” 조카를 탄허 스님께 보내기로 한 김 박사는 스님의 주석처를 알아봤다. 탄허 스님은 당시 평창 월정사에서 나와 삼척 영은사에서 주석하고 있었다. 스님은 영은사 주소가 적힌 쪽지와 소개장을 들고 영은사로 향했다. “영은사에 가던 날의 풍경을 잊지 못합니다. 그날이 11월 29일이었어요. 눈도 엄청 왔었고 가는 길도 험했어요. 그때 석탄을 때서 움직이던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차 안에는 석탄 냄새가 가득했어요. 영은사에 도착하니 절을 비롯한 온 세상이 눈에 덮여 있었죠. 경내에 사람이라고는 보이지도 않고 들려오는 것은 글 읽는 소리뿐이었습니다.” 영은사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듣고 왔지만 글 읽는 소리 외에는 기척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를 부를 수도 없었다. “얼마나 정중하던지 그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고 한다. 절을 둘러 보다 제일 큰 방 앞에서 그냥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일명 ‘뻗치기’다. 그렇게 눈만 바라보다 앉아 있길 몇 시간, 해우소에 가려는 길이었는지 한 스님이 방에서 나왔다. 스님이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출가하러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스님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이내 방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어제 저녁에 꿈을 제대로 꾼 모양이야. 꿈에 젊은 총각이 출가하러 왔는데, 지금 마당에 출가하러 온 사람이 있네. 하하.” 대중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신기한 듯 대중들이 젊은 총각을 바라봤다. 처음 만났던 스님이 총각을 탄허 스님에게 데려갔다. 혜거 스님은 김지견 박사가 써준 소개장을 탄허 스님에게 전했다. 탄허 스님은 김 박사의 글을 보고 흔쾌히 출가를 허락했다. “외삼촌께서 소개장을 주시면서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탄허 스님께서 받아주지 않을 수 있다. 돌려보내도 무조건 이겨내서 허락을 받아라. 그때까지 어떤 고통도 감내하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탄허 스님께서 외삼촌을 굉장히 좋아하셨더라고요.” 그때가 1959년이었다. 당시 탄허 스님은 30여 대중을 대상으로 『화엄경』을 강의하고 있었다. “탄허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황홀했습니다. 너무 늦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탄허 스님의 깨끗한 얼굴을 보니 진짜 신선 같았어요. 세상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죠. 전부가 감동이었습니다.” 그렇게 스님은 영은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탄허 스님이 행자들도 『화엄경』 강의를 들으라고 한 것이다. “보통 행자가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행자는 사중에서 시중을 들고 살림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탄허 스님께서는 ‘행자도 공부하려고 출가한 사람들이지, 일하러 온 사람들이 아니다’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행자들도 청강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때 공양주를 했었는데 탄허 스님께서는 아침에 아침공양과 점심공양을 함께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강의를 들으면 점심 준비할 시간이 없으니 한 번에 두 끼를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은사 3년 동안 탄허 스님은 점심때마다 찬밥을 드시면서 제자들 공부를 살펴주신 스승이었습니다.”
탄허 스님은 혜거 스님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재가 되라.”고 주문했다. “탄허 스님께서는 스님들이 출가를 한 것은 세상에 이익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수행을 해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세상의 인재가 되라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뛰어난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스님의 말씀을 부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어요. 제 주변에서는 그런 사람을 단 한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영은사에서 3년간 공부를 한 탄허 스님과 대중스님들은 1962년도에 다시 월정사로 갔다. 월정사에 가자마자 탄허 스님은 영은사에서 했던 사집(四集)과 사교(四敎) 등 기본 과정들을 단기간에 ‘결산’하는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것이 끝나고 몇 년 뒤 다시 『화엄경』 산림을 하려던 차에 탄허 스님은 종단의 요청으로 화성 용주사에서 역경사 양성과정을 맡아 한동안 월정사 밖에서 지내게 된다. 탄허 스님의 평소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 1962년 탄허 스님이 대중들을 이끌고 월정사에 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절을 차지하기 위한 비구-대처 간 일촉즉발의 대치국면이 계속됐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청담, 숭산 스님 등이 월정사에 와 대책을 숙의하던 어느 날 밤. 9시가 되자 탄허 스님은 하던 일을 멈추고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평소 밤 9시에 자 다음날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하루 종일 책을 보고 원고를 쓰던 생활을 이 날도 이어간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청담, 숭산 스님은 “어떻게 하면 저런 경지가 될까?”라며 감탄사를 터트렸다고 한다. 제자들에게 빈틈없는 정진을 당부하던 스님 스스로 모범적인 생활을 계속했던 것이다.
혜거 스님은 70여명에 이르는 제자를 두고 있다. “상좌를 두고 싶어서 두는 것은 아니다. 인연이 되면 그렇게 된다.”고 했다. 세상의 인재가 될 것을 바랐던 은사스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제자들에게 전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저는 제자들에게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라고 합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없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세상 사람들의 문제를 외면했기 때문이에요. 자기 수행만 하다 보니 세상을 위해 덕을 베풀지 못한 것이죠.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종교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중생들이 고통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내 수행이 퇴보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지장보살과 같은 원력(願力)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입니다.” 혜거 스님은 1988년 금강선원을 열었다. 불자들에게 심도 있는 공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매년 1만 5,000명이 넘는 불자들이 금강선원에서 공부를 한다.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거쳐 간 인원이 30만을 훌쩍 넘는다. 스님의 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스님은 또 청소년을 위한 참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금강경 강송대회도 매년 진행하고 있다. 모두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콘텐츠들이다. 2012년 금강경 강송대회의 경우 응시자의 30%가 필기시험에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금강경을 그대로 적어냈다고 한다. 학해무변(學海無邊)의 가르침 그대로다.
혜거 스님에게 새해 불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덕담을 청했다. 스님은 ‘빙지장석(氷地將釋)’을 말했다. 차를 몇 잔이나 마셨는지 배가 불러 올 때 쯤 혜거 스님은 다음 일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마지막 질문을 빠트릴 수 없었다. “다음 생에도 인연이 돼 탄허 스님을 만난다면 다시 모실 수 있습니까?” 인터뷰가 끝날 때쯤에야 스님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평생을 불교 경전 연구와 번역, 수행에 전념했던 탄허 스님은 선교(禪敎)는 물론 동양학 전반에 두루 능했고 1971년 10여 년 간의 작업 끝에 『화엄경』 80권 집필을 마치기도 했다. 함석헌 선생과 자칭 ‘국보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가 탄허 스님에게 『장자』를 배웠고, 불교계의 대표적인 학승(學僧)인 무비 스님과 통광 스님, 각성 스님 등도 탄허 스님을 모시고 공부했다. 사전 없이 역경(譯經)할 수 있는 유일한 스님이라고 한다.
탄허 스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풍성하게 마련된다. 탄허 스님의 출가본사인 평창 월정사는 2월 24일 탄신 100주년 다례를 시작으로 탄허 스님 증언집 『오대산의 무영수』와 유묵집, 사진집 등을 발간한다. 또 학술사업으로 4월 26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탄허 대종사의 인재양성과 교육이념의 시대정신’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문화사업으로는 4월부터 내년 2월까지 탄허대종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 ‘한국 근대 고승 유묵전-오대산 월정사 한암 · 탄허 선사 특별전’도 열린다. 4월 15일부터 6월 1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을 시작으로 국립공주박물관(7월 10일∼8월 25일), 월정사 성보박물관(9월 7일∼11월 3일), 국립춘천박물관(12월 10일∼내년 2월 16일) 등 4곳에서 특별전이 마련된다. 6월 2일에는 탄허 스님 열반 30주기 추모 다례와 선서 함양 전국휘호대회 및 입선작 전시회가 개최되며, 연대사업으로 5월 3일부터 7일까지 월정사 문수선원에서 틱낫한 스님을 초청한 가운데 ‘치유, 행복, 상생’을 주제로 명상수행학교가 열리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강백 무비 스님(4월 26일)과 도올 김용옥 선생 초청 강연(4월 15일)과 한·중·일 화엄 대가 초청 화엄강좌(10월 11일~20일)도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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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해는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 올해는 탄허스님 탄신 100주년, 내년은 월하스님 100주년이랍니다.
이렇게 훌륭한 큰스님을 기리는 추모사업은 해마다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잠시 보고 갑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