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을 걸으며
유난히 더운 여름을 보내고 맞은 가을은 예전의 그 계절이 아니다. 세상 처음 본 듯 황홀하게 청명한 날, 우리부부 마음속에 늘 고마움으로 자리하고 있던 큰 시숙 내외와 남도로 가을여행을 떠났다. 그 처음이 전북 고창이었다.
고창은 재작년 가을 남편과 다녀온 곳이라 그곳의 풍광이 기억속에 그림처럼 남아 있었다. 꽃무릇이 피기 시작했던 고즈넉한 선운사의 호젓한 발걸음도, 물 빠진 갯벌을 바라보며 마셨던 진한 커피향의 느낌도 아직 그대로다. 잘 정돈 된 목장길을 따라 걷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고창 고인돌 유적지는 정교했다.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읍내를 돌아 볼 동안 나는 근처 성곽 길을 걸으며 사색에 빠졌던 좋은 기억이 있었기에 선뜻 고창읍성 이곳을 첫 여행지로 선택하였다.
고창읍성 성곽 길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 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이 있다.
무언가를 머리에 이거나 짊어진다는 것은 고행의 시작이다. 예수의 십자가도 그러하고 시지프스의 바윗돌이 그러하다. 물론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 길을 밟던 여인네들의 목적과는 사뭇 다르지만 이고 짊어진 것들을 뛰어 넘어야 결국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굴레를 벗을 수 있다면 세 바퀴가 문제이겠는가. 우리는 세 바퀴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유를 갖고 천천히 성곽을 오르기로 하였다.
고창읍성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곳은 북문 ‘공북루’였다. 이곳 북문의 주춧돌 높낮이가 참 자유롭다. 제각기 다른 키로 성문을 받들고 있는 모습에서 조상의 지혜를 엿본다. 공북루를 지나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표시를 보며 바로 성곽 길로 올랐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성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평지에 조성된 낙안읍성이나 해미읍성과는 다르게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산성의 형식으로 축조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 눈에도 방어목적의 군사요새로 더 요긴해 보였다.
성벽에 오르니 고창군의 모습이 막힘없이 한눈에 들어왔다. 군 소재지라고 하기에는 도시가 너무 커서 시로 승격된 건 아닌가. 궁금했다. 이내 답을 듣게 되었는데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등재 된 고창군은 인구 6만 정도 되는 군지역이라 했다. 지금도 유입인구가 꾸준히 증가되고 있어 살고 싶은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는 지역주민의 설명에 자부심이 묻어난다.
다시 걷다보니 산 중턱에 성황사가 보였다. 지금도 매년 중양절에는 지역의 안녕을 위해 제를 지낸다고 쓰여 있다. 형님이 살던 동네에도 성황당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보존 되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운 이야기를 들으며 길을 이어간다.
소나무 숲길에서는 가지치기 작업이 한창이다. 그래서 일까 송진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그야말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최적의 힐링장소를 꼽으라면 이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특수 장비 위에서 하는 작업이라 안전해 보였지만 그래도 끝까지 무탈하길 소원해 본다.
성을 반 넘게 지날 쯤 ‘맹종죽림’ 대나무 군락지가 눈에 들어왔다. 대의 굵기가 내 팔뚝보다도 더 굵다. 맹종죽은 씨를 뿌려도 곧바로 새순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4~5년이 지나서야 싹을 띄우며 그때부터 하루에 1미터 씩 자란다고 했다. 어찌 보면 우리네 고진감래 인생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였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나는 그를 좋아 하노라’
윤선도의 오우가를 흥얼거려 본다.
편안한 걸음으로 2키로가 못되는 산성을 다 돌아보고 움푹 파인 골짜기의 객사와 내아에 이르렀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다는 객사, 옛 수령의 살림집이었다는 내동헌의 대청마루가 나는 탐이 났다. 기름칠을 하여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중앙 연못 옆 풍화루로 더디게 내려갔다. 2층 누각인 풍화루는 마을의 풍년과 번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우리가 지나온 성곽을 휘 둘러보다 어디서 본 듯한 그림이 내 레이더망에 잡혔다. 얼마 전 종영된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애신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고독한 유진의 뒷모습이 성곽과 함께 겹쳐진다.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시청하였기에 더 반가웠다.
“잘가요. 동지들! 독립 된 조국에서 씨 유 어게인.” 주인공 애신의 불꽃처럼 뜨거웠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산성에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어느덧 시작점인 ‘공북루’가 눈앞에 보인다.
한 시간 남짓 돌아 본 고창읍성은 햇살 좋은날 산책길에서 만난 도토리 몇 알처럼 내게 소소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안내판에 게재된 옛 읍성은 어쩐지 지금보다 더 젊고 늠름한 모습이다.
먼 훗날 우리는 어떻게 기억될까. 견고한 모습이어도 좋고 반짝여도 좋겠다. 아~ 무엇보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따뜻하게 남길 바래보며 성문을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