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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59.11]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 특집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을 같이할 맹세를 하다”
- 해월신사의 생애(11)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 특집으로 해월신사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올해는 삼암 표영삼 종법사 환원 10주기 되는 해로 삼암 종법사가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해월신사의 발자취를 재구성하였다. /편집실
황토현 탑 사진 / 설명 ; 1963년 세워진 이 탑은 동학혁명을 기념한 최초의 기념탑이다. 최근(2018.11.9.) 정부는 황토현전승일인 5월 11일(음4.7)을 동학혁명 기념일로 제정하기도 발표하였다
포덕 34년(1893) 5월에 신사는 아들 덕기와 김연국을 대동하고 칠곡, 인동, 금릉 지역을 순회했다. 칠곡군 율림리 곽우원의 집에 약 3개월간 머물렀다가 7월에는 인동 배성범의 집으로 가서 손병희와 손천민이 찾아오자 합류했다. 그리고 다시 금능군 어모면 편사언의 집으로 가서 10여 일간 머물렀다. 이때 서병학과 이관영, 이해관이 신원운동을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신사는 40일간의 운동으로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거절했다. 신사는 황간 김선달의 집에 들렀다가 7월 그믐께 상주 왕실 본가로 돌아왔다.
8월에 조재벽은 청산군 문바위골 김성원의 집으로 신사를 이주시켰다. 아들 덕기의 병세는 악화되어 10월 15일에 19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김씨 사모님의 소생은 딸 최윤崔潤만 남았고, 최윤은 동학혁명운동 당시 체포되었다가 청산현 아전 정주현과 결혼하여 훗날 아동음악가로 활동한 정순철을 낳았다.
김성원의 집_옥천군 청산면 한곡1길 105-1
포덕 34년(1893) 말에 이르러 관의 횡포가 심해지자 전라도 고부와 경기도 이천에서 동학도들이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전라도 고부에서는 전봉준을 필두로 한 고부 동학도인들과 농민들이 군수 조병갑의 수탈행위에 항거했으며, 이천에서는 이상옥(용구)이 동학도 수천을 동원하여 재산을 약탈하고 도인을 살해하려던 김봉규를 규탄하며 항의했다.
동학혁명의 개관
포덕 35년(1894년) 1월 새해에 접어들면서 신사가 문암리에 강석을 마련하여 강도회를 베풀었다. 신앙심을 기르고 동학이 지향할 방향을 잡아 주기 위해 교육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때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도 들이 고부관아를 습격하는 민란이 일어났다. 당시 전봉준은 이평면 조소리에서 훈장을 겸하면서 포덕 32년(1891)에 동학에 들어와 접주로 활동하고 있었다. 삼례 교조신원운동과 원평 척왜양창의운동 때 대단한 지도력을 발휘한 그를 민란의 장두로 내세우게 됐다.
봄철을 넘길 양식이 떨어지자 동학도들과 농민들은 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수탈한 양곡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새로 부임한 박명원과 타협하여 보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2월 하순경에 해산함으로써 민란은 수습됐다. 정부는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동학도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재산을 약탈하고 잔당으로 몰아 살해하는 등 행패가 극심했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은 손화중 접주가 있는 무장현으로 갔다. 3월초에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대접주 3인과 전봉준, 정익서, 김도삼, 최경선 등 접주들은 드디어 기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기포 날짜는 각자의 형편대로 정하되 3월 21일에 백산(지금의 부안군)으로 모이게 했다. 당산에 모였던 손화중․전봉준이 이끄는 수천의 동학도들은 3월 18일경에 기포하여 백산으로 출발했다. 김덕명 관내 동학군은 원평에서, 김개남 관내 동학군은 태인에서 각각 기포하여 백산으로 모였다. 그러나 제일 먼저 기포한 곳은 서장옥 관내의 금산이었다. 백산에는 서장옥 관내의 동학군들도 상당수 참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대접주를 비롯한 지도부는 우선 전봉준을 동학대장(東學大將)으로 추대하고 혁명군의 조직을 마치고 4대 강령과 11개 군율을 제정하였으며 격문도 발표했다. 4대 강령은 ‘①사람을 살상하지 말며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②충효를 다하여 濟世安民케 한다. ③왜와 오랑캐를 몰아내어 이 나라의 국기와 사회정의를 확립한다. ④서울로 군대를 진격시켜 권귀權貴를 진멸시킨다.’는 것이다.
동학군은 3월 28일(음력)에 처음으로 태인과 금구를 공격했다. 4월 1일에는 부안으로 쳐 들어갔다. 급보를 받은 전주감영은 1천명의 감영군을 출동시켜 동학군을 추격하다가 4월 7일에 고부(정읍시 덕천면) 황토재에서 전투를 벌였다.
부안에서 떠난 동학군은 4월 6일에 감영군을 황토재로 유인했다. 전봉준 장군은 관군이 술로 밤을 새우는 것을 보고 7일(양 5.11) 새벽에 기습전을 벌였다. 많은 관군을 무찌르고 무기와 식량을 노획하니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사기가 충천한 동학군은 여세를 몰아 정읍을 점령한 다음 8일에는 흥덕과 고창을, 9일에는 무장현을, 4월 10일에는 여시매로 이동했다. 여기서 11일에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 세 사람의 공동명의로 창의문을 반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의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치 않고 밖으로 향제鄕第를 베풀어 오직 홀로 보전할 방법만 도모하고 한갓 녹위를 도적질하니 어찌 그것이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보잘것없는 백성이나 … 앉아서 국가의 위태로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팔로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가 의논하여 이제 창의의 깃발을 들고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을 같이할 맹세를 하였으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라 할 것이나 절대로 겁내어 망동하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편안하여 한 가지로 태평 세월이 되기를 빌며 다 같이 임금의 덕화에 잠기면 천만 신심이라.
한편, 정부에서도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삼아 출동시켰다. 인천을 출발 4월 5일에 군산항을 거쳐 11일에는 전주성에 입성했다. 군산에서 전주까지 오는 도중에 반 이상의 군대가 도망하여 싸워 보지도 못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런 군대로 동학군을 토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홍계훈은 추가 병력을 요청하고 전주성에 머물러 있었다. 동학군은 4월 12일에 여시매에서 영광으로 이동하여 함평과 무안을 점령하여 전라 북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홍계훈은 4월 18일에야 증원군이 법성포로 파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출동하여 영광에 도착한 것은 21일 저녁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봉준 장군은 모든 동학군을 밤사이에 나루뫼(나산)로 이동, 22일 새벽에 장성 쪽으로 출동시켰다. 전주성이 비어 있으므로 곧바로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던 것이다. 동학군이 전주로 향한다는 보고를 받은 홍계훈은 급한 나머지 4월 23일에 이학승 부대를 급파하여 저지시키려 했다. 이학승은 점심때에 월평까지 진격하여 동학군을 공격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동학군은 놀랐으나 곧 역습으로 나서 신효리 일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정부군은 완전히 궤멸되어 이학승 등 여러 장졸이 전사하고 말았다. 동학군은 이 황룡전투에서 두 번째의 대승을 거둔 것이다.
장흥동학혁명 기념관 전시물. 장태는 본래 닭을 키우는 기구였으나, 동학혁명 당시 전남 장흥의 이방언은 장성전투에서 장태를 차폐물로 삼아 뒤에 숨어 밀고 가 위력을 발휘했고, 이로해서 사람들은 이방언을 장태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학군은 24일 새벽에 전주로 향해 떠나서 정읍, 태인, 원평을 거쳐 4월 27일에는 비어있는 전주성을 무난히 점령했다.
홍계훈은 전군을 독촉하여 동학군을 뒤따랐으나 하루가 늦어 28일에야 완산에 진을 치고 대치하게 됐다. 양측은 몇 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전주성이 함락되자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급급한 정부는 4월 30일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 나라의 장래는 생각해 보지 않고 경솔하게 청병을 했던 것이다. 청국군은 5월 5일에 900명의 병력을 아산에 상륙시켰으나 이 움직임을 주시하던 일본은 즉각 병력출동을 서둘러 5월 7일에 400명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결국 정부는 청일 양군을 불러들여 나라의 위기를 자초하고 만 것이다. 당황한 정부는 5월 7일에 동학군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화약을 이루고 5월 8일에 동학군이 전주성을 철수하자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구실이 없어 출동하지 못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정부의 요구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이 땅에서 전쟁이 터졌으니 이것이 청일전쟁이다. 그리고 6월 21일 새벽에는 일본군이 불법으로 경복궁을 침입하여 뒤이어 친일 정권인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김학진은 각 군현에서 동학군들이 민정을 직접 다스리는 것을 막기 위해 6월 3일자로 면․리 단위의 집강소 설치를 발의했다. 동학군은 포包단위 조직상 군현 단위 집강소로 설치하여 활동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 경복궁 침입사건이 있은 뒤 정부는 동학군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어 동학군의 주장대로 군현 단위 집강소 활동을 용인하였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대접주가 집강소의 장이 되었고 폐정개혁안으로 12개 조목을 내걸었다. 대체로 동학군이 강한 곳에서는 지방 대접주가 지방관을 지배했고, 보통 지역에서는 대접주와 지방관이 의논하여 운영했다. 그리고 세력이 미약한 곳에서는 관의 눈치를 보며 활동 했다고 여겨진다.
집강소 활동은 나주목사 민종렬의 완강한 반항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나주의 오권선과 태인에서 내려간 최경선이 병력을 모아 7월 5일에 나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동학군의 뒷심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 장군이 직접 민종렬을 찾아가 설득해 보았으나 여전히 거절당해 나주성은 동학군의 활동에 여러모로 지장을 주었다.
청산 총기포
동학군은 8월초부터 일본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해 재기포를 서둘렀다. 호남동학군은 포덕 35년(1894) 9월 8일경 재봉기를 서둘러 확정짓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9월 9일부터 전봉준과 전주 일대의 동학군은 무기ㆍ군량미ㆍ군복 등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집결지로 삼례를 정하였다. 삼례를 제2차 봉기의 집결지로 삼은 것은 교통의 요지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신사도 9월 18일(양 10.17)에 청산 도소에서 동학군에게 기포령을 내렸다. 신사의 명에 따라 충청 경기 동학군들은 9월 하순부터 각지에서 기포했다가 10월 6~7일을 전후하여 보은 장내리로 집결했다. 며칠 후 이들 대부대는 청산으로 이동하여 신사의 명을 받아 호남 동학군과 합류하게 됐다. 10월 11일 경 신사는 “친히 대통령 기호旗號를 서書하사 손병희에게 사하시고 정경수포로 선진을 삼고 전규석포로 후진을 삼고 이종훈포로 좌익을 삼고 손병희로 중앙진에 거하여 각 포를 지휘케 하시었다.”
10월초에 전국에서 동학군이 기세 좋게 기포했으나 일본이 후비보병 독립제19연대라는 특별 병력을 편성하여 투입하는 한편, 관군도 신식무기로 무장시켜 출동시키자 정세는 급변했다. 김홍집 내각은 동학군 진압을 위하여 순무영을 설치하고 신정희를 순무사로 임명하였고 선봉으로 이규태군을 남하시켰다. 이들은 월등한 화력으로 동학군을 도처에서 물리쳤다. 10월 21일의 세성산 전투를 위시하여 10월 14일의 하동 고성산 전투, 10월 22일의 홍천 서석 풍암리 전투, 10월 28일의 홍성 전투, 11월 6일의 해주 철수, 11월 7일의 해미성 전투, 11월 11일의 공주 우금티 전투, 11월 13일의 김개남 청주 전투 등에서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에게 연속 밀리고 말았다. 동학군이 일본군을 맞아 유일하게 승전한 곳은 당진 승전목전투뿐이다.
승전목 : 당진동학혁명승전목기념사업회는 이곳에 2017년 10월 장승을 세웠고 당진시와 협력하여 기념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동학군이 결정적으로 기세가 꺾인 시기는 공주성 공격에서 대패한 11월 11일부터이다. 전봉준과 손병희의 연합군 2만 여명은 10월 22일부터 공주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11월 11일에는 우금티 고개까지 육박하여 혈전을 벌이게 됐다. 40여회의 피아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일본군의 엄청난 화력에 밀려 수많은 동학군이 쓰러지며 통한의 후퇴를 하였다. 이로부터 후퇴를 거듭하니 전세는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11월 25일 원평 전투를 마지막으로 동학군의 주력은 해산하였고 이후 나주 인근 지역의 전투, 장흥 석대벌 전투를 마지막으로 서남부 지역의 동학군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고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 김덕명 장군, 손화중 장군, 최경선 장군 등은 모두 관에 체포되어 재기의 꿈도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전봉준 장군을 위시하여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5인은 1895년 3월 30일(양4.24)에 서울에서 교형으로 순도했다.
전봉준장군 동상 제막 설명=올해 4월 24일 서울 종로에 개막된 전봉준 장군 동상
“하늘과 사람의 뜻이 합하고”
충청도에서는 의암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군 수백 명이 공주 전투에서 패한 다음 호남으로 내려와 정읍 내장산 갈재를 넘어 순창 복흥을 거쳐 11월 19일에 임실 갈담까지 내려왔다. 의암 성사는 즉각 사람을 보내어 신사를 모셔오게 했다. 신사는 재기포 이후 청산을 떠나 전라도로 남하했었다. 장수와 남원을 거쳐 임실 청웅면 입석리 새목터(조항)에 이르러 허선과 조석걸의 집을 번갈아 가며 머물고 있었다. 신사를 모신 후 며칠 유진했던 의암성사는 장수 장계와 무주를 거쳐 영동 용산까지 진출했다. 신사를 비롯한 동학군이 살아남아 동학 재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지도부와 동학도인과의 신뢰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다음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동 용산장터에 진을 친 12월 12일은, 신사께서 내린 9월 18일 기포령에서부터 82일째 되던 날이다. 이 기간 동안 동학군은 대규모 병력이라 주로 들판과 산속에서 숙영했고 식사를 제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용산장터 역시 편안한 곳이 될 수 없었다. 진압군이 속속 도착했다. 청주병영에서 파견한 남영병 180명, 경리청 병대 60여명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예병이었고, 옥천민보군이 가세하여, 12일 새벽 용산장터 인근 산위의 호서동학군을 전면 공격했다. 이 와중에 상주 소모영의 유격병이 호서동학군의 후방을 공격하였다. 전투는 종일 계속되었고 13일 오후 2시경 관군이 패해 철수했다.
용산전투 승리 후 신사는 동학군 모두에게 북향해서 네 번 절하게 하고 “하늘과 사람의 뜻이 합하고 나와 함께 들이밀면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탄환을 하나도 맞지 않는다.” 말했다 한다. 그러자 공주 사람 두 사람이 “우리는 다 죽어도 우리 도를 세상에 퍼뜨릴 해월신사가 사시도록 해야 후세에 우리의 수치를 면할 수 있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보은 종곡리에 들어선 동학혁명기념탑
동학군은 다시 북상하여 청산현을 점령하고 15일까지 유진했다가 상주 소모영군과 일본군이 추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16일에 보은 북실(종곡)로 전군을 후퇴시켰다. 동학군은 청산에서 모여든 동학도를 재편하여 1만 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일본군과 관군은 12월 17일 밤 10시경에 불을 피우고 있는 동학군을 기습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아 일시 퇴각했던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병력이 많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몇 차례나 역습을 시도했다. 밤새도록 전투는 계속됐으나 야간 전투라 사상자는 별로 나오지 않았다.
본격적인 공방전은 18일(양1895.1.13) 아침 동학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됐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아침에 동학군은 북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일본군은 부득이 후퇴하여 야산 고지에 진을 치고 방어에 들어갔다. 동학군은 무모하리만치 맹공을 가했으나 3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고 한다.
황산(음성) 동학군은 1894년 10월 남진에 나서 그해 12월 22일 되자니(음성)에 도착해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대동여지도> 부분. 신영구 교수가 발굴한 『균암장 임동호씨 약력』에 관련 내용이 기술돼 있다. “무극리를 쳐들어가는 중 동구에 기병 5~6인이 나왔다가 도로 돌아들어감으로 포군이 뒤를 쫓아 한 10리 지경 되잔니 근처에서 관군 수천명이 매복하였다가 돌출하여 서로 전투하다가 북편에서 관군이 에워싸고 들어옴으로 형세가 불리하기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 충청일보(2016.6.6.)
이 전투에서 동학군 대부분은 해산되었고 기백 명만 신사를 따라 괴산 쪽으로 후퇴하여 12월 20일경에 음성군 금왕읍 되자니(도청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3일간 유진하자 24일에 일본군과 관군이 공격해 왔다.
당시 동학군은 남쪽에서 올라와 3일간 체류하면서 식량과 의복을 조달했다. 청주병영에 연락하여 관군과 일본군은 무극 방면에서 협공해 왔다. 지세가 불리한 동학군은 되자니 건너편 능선으로 이동하여 응전했다. 실개울을 사이에 두고 몇 시간 싸우다 탄환이 떨어져 동학군은 패주했다.
동학군은 이 되자니 전투를 마지막으로 해산하였다. 일부가 사창리까지 후퇴했으나 관군의 추격으로 그마저 완전히 해산되고 말았다. 12월 24일(양1895.1.30)은 동학군 최후의 전투일이 되었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