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웃긴 남자(45) - 상선
'상(上)'은 '하(下)'에 대해 상이다. 따라서 '상선(上善)'이라는 말도 '하선(下
善)'이 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차선(次善)이 없는데 최선(最善)이 홀로 있을
수 없다. 만약에 할아방이 '하선(下善)'에 대한 언급이 없이 '상선(上善)'을 얘기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할아방이 한잔 먹고 취해서 쓴 부분일거다.
바로 뒤를 보면 '중선(中善)'과 '하선(下善)'들이 줄줄이 따라 나오고 있는데,
그것들은 보지도 못하는 까막눈인지 이걸 '가장 좋은 것은...'하고 번역을 해부니
까 그 뒷줄들이 전부 덩달아 '제일 좋은 것들'로 같이 둔갑을 해부게 된다.
이때의 '상선'은 글자 그대로 '상의 선은...'하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뒤에 가
서 '반면에 중과 하의 선은...'하고 이어서 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약수(若水)'
는 글자 그대로 '물과 같다'라 읽으면 되겠다. 왜 물이 '선지상(善之上)'이냐?
그 이유가 두가지 나오는데 하나가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이고 다
른 하나가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다. 앞의 것은 도올의 해석대로 읽어도 무
방하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서로 다투지 않는다' 물론 이 번역도 제대
로 하자면 틀린 것이다. 한문 읽는 법이 그런게 아니다. 정확하게 읽으면 '물은 다
투지 않음으로서 만물을 이롭게 한다'이다. 그러나 도올이 이 어려븐 문장을 이정
도라도 읽어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한없이 기쁘다. 더 이상은 안 바란다. 계속
이 정도만이라도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우리 도올은 딱 두 줄을 제대로 넘
어가는 법이 없다. 어쩌다가 한줄 제대로 읽었다 싶으면 바로 다음 줄에서 고만 사
까닥질을 쳐분다. 특히 이 문장 읽는 꼬라지를 보면 나는 마 만정이 떨어지분다.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저렇게 읽을 수가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일부러 틀리게
읽으려고 애를 써도 저렇게 읽기는 어려운 문장이다.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얼매나 평이한 문장이고? 띄워쓰기 함 해보까 '처(處)'는 어떤 장소에 있다는 뜻이
다. 처하다 이런 말이다. 그 담에 '중인지소(衆人之所)'가 뭐꼬? 사람이 많이 있는
장소 아이가? 사람이 모여있는 곳. 그 담에 '오(惡)'는 싫어하다자나. 주욱 이어서
읽으면 되자나. '물은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곳을 싫어한다' 이런 문장은 다르게
읽을 수가 없능기야. 오직 한가지로 밖에는 읽을 수가 엄써. 그런데 도올이 읽은
꼬라지 함봐바.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라꼬 해놨어.
걍 지가 막 지어내고 있어. 내가 엔간하면 도올을 너무 안 머라칼라꼬 애를 쓰고
있제. 그래도 그기 안되능기야. 쪼께 불쌍하기도 해서 봐주고 싶어도 나도 모리게
매차리에 손이 가능기야.
첨부터 한번 보까? 물의 선이 선중의 상선인 이유는 '물은 다투지 않으면서 만
물을 이롭게 하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싫어하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떻노? 딱 말이 되제. 그리고 앞에서 했던 말, '외기신(外基身)'이 왜 세상의
밖에 몸을 두는 것이라고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겄제? 물이 바로 그렇기 때
문이고 그런 물의 성질이 상선이라고 할아방은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이 필요하니까 주로 강가에 집을 짓고 모여 살지만 그렇다 해도 강물
에 붙여서 집 짓는 사람은 없다. 사람 사는 동네와 물은 대부분 거리가 떨어져 있
다. 또 물이라는 것은 산 속의 계곡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번잡하고 시끄러운 사람
동네와는 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물의 선을 노자는 선중에서 가장 최고의 선
이라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할아방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한 것은 가장 상
의 선을 취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부처가 제자들이나 사바중생들에게 출가를 권
유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봐도 좋다. 할아방도 우리한테 속세를 떠나 산 속의 물
처럼 사람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있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그래야 도를 닦고 몸을
닦아서 '가물한 암컷의 거시기'를 구경하러 현빈으로 가볼 거 아인가베.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전부다 속세를 떠나 대가리 깎고 중이 될 수는 없자나.
그래서 부처님도 출가가 불가능한 사바 중생들을 위해서 재가불자를 위한 설법
을 하셨고 계율을 주신 것이다. 팔정도가 바로 재가불자를 위한 생활규범이다.
우리 할아방도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떠나 유유자적 구름 위에서 노는 신선이
되지 않겠느냐고 꼬시면서도 한편으로 그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중선과 하선을
주고 있다. 그게 바로 다음에 따라 나오는 거선(居善), 심선(心善), 여선(與善) 등
등 주욱 나라비 서있는 선들이다. 물의 상선을 취할 수 없어서 중인지소에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중선과 하선일 망정 이러이러한 선은 갖꼬 살아라 이거다.
상선은 물 하나로 끝난다. 그런데 도올이나 여타 모든 노자의 연구가들은 한결
같이 이하 나열된 여러 선들을 전부다 물로 보고 있다. 이건 바로 노자 할아방을
물로 보는 짓이다. '물로 보지 마!' 이게 요시 뜨는 음료수 CF제? 이거 맹긴 카피
라이터가 혹시 노자를 보고 힌트를 얻은게 아닐까? 그럴 리는 엄따꼬?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제발 부탁하건데 우리 할아방을 물로 보지 마라. 껄렁한 2%보다는 훨 시
원한 감로수다. 다음 회에 가서 할아방이 우리한테 선물 한 중선과 하선들을 살펴
보자.
노자를 웃긴 남자(46) - 중선,하선
'상선약수'란 말이 그냥 여게서 이유없이 튀어나온 말이 아이다. 할아방이 '외기
신이신존'이라고 쓰고 봉께 암만해도 나중에 사람들이 뜻을 몰라서 헷갈릴 것 같거
든. 그래서 '외기신이신존'의 이유를 들어주니라 넣어논 글이다. 할아방의 글쓸 때
마음가짐이 이리 세심하고 친절하다. 꼭 구르미 글 안 겉나? 그런데도 못 알아묵는
멍텅구리들은 어쩔 수가 엄써. 왕삐리부터가 그걸 모리고 이걸 다음 장으로 히떡 넘
겨분께로 도올이 같은 아는 더 헤매능기야.
물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머물기를(處) 싫어해서 멀리 떨어져서 유유히 흐
르기 때메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 가까이 있는 물은 더렵혀지기 마련이
야. 구르미 함 봐바. 내가 얼매나 깨끗하고 순수하게 차말로 선년데 말이다. 이거
통신을 하다봉께로 온갖 떨거지들이 앵기붙능기라. 그러니 암만 선녀라도 우찌 독
야백백할 수가 있겠노? 할 수 없이 거추장스러븐 선녀 잠자리 옷은 벗어불고 장자
할아방 지팡이 하나 훔치갖꼬 일마들 쌔리패기 시작했자나. 글다보이 선녀가 완죤
야차되붓다. 이기 다 상선을 택하라는 할아방 가르침을 잊은 탓이다. 외기신할라
꼬 그마이 애를 썼는데도 통신도 '중인지소'였던게라. 중인지소 중에서도 왕 골때
리는 '중인지소'라는 것을 통신 첨할 때는 몰랐다. 그래도 있제, '처중인지소' 하
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고 할아방의 중선과 하선은 따를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게
구름이다. 함 보자.
상선(上善)은 약수(若水)이니 ☜ 선 중의 상은 물의 선과 같은 것이니, 수선(水
善)은 이만물이부쟁(利萬物而不爭)하고 ☜ 물의 선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능히 만물
을 이롭게 하고, 처중인지소(處衆人之所)를 오(惡)하느니라 ☜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느니라. 고(故)로 기어도(幾於道)이니라 ☜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
깝다 할 수 있느니라.(幾는 '거의 ∼하다, '가깝다의 뜻이고 於는 감탄의 뜻을 내
포하는 어조사이다)
[만약 그대들이 상선을 따르기(外其身)가 어렵다면 중선과 하선이라도 따라야
만이 능히 자기 한몸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니라.(而身存)] ☜ 이 말이 할아방이
생략해 버린 구절이다. 상선이 나왔응께로 당근 다음 나오는 것은 중선 아니면 하
선일 수 밖에 없응께 굳이 설명을 안해도 알아먹겠거니 생각하신거다. 달나라에 갈
수 있게 된 훗날의 인류가 이 정도의 생략 때문에 할아방의 글을 못 읽는 수준으로
지능이 퇴화하리라고는 짐작을 못했던거다. 우찌 도올 한사람만의 죄이기야 하겠노?
다음의 중선 이하를 보자.
居善地,心善淵,與善仁,言善信,正善治,事善能,動善時,夫唯不爭,故無尤
거선지,심선연,여선인,언선신,정선치,사선능,동선시,부유부쟁,고무우
거선지(居善地) ☜ 머무를 때는 땅을 잘보고 누질러 앉아야 하고
심선연(心善淵) ☜ 마음은 언제나 그윽하게 가지도록 하며,
여선인(與善仁) ☜ 남을 대할 때는 인으로서 대하고,
언선신(言善信) ☜ 말을 할 때는 믿을 수 있는 말만 하고,
정선치(正善治) ☜ 바로잡을 때는 다스리는 법도로서 하고
사선능(事善能) ☜ 일을 할 때는 능력으로서 하며
동선시(動善時) ☜ 움직일 때는 때를 잘 보고서 움직여야 하리로되,
부유부쟁(夫唯不爭) ☜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남과 다투지 않는 것이니
고무우(故無尤) ☜ 그리하면 네가 우환이 없으리로다.
이 칠선(七善)은 종교적인 계율이나 도덕적인 덕목이 아니라 속세를 살아가는 중
생들의 처세요령이다. 그것을 지키고 따르는 목적이 대단히 속물적이다. 그리해야
내 한몸에 화가 없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소리다. 얼마나 솔직하노? 십계명을 지
켜야 천국에 가고 팔정도를 지켜야 극락왕생한다는 구라들에 비하면 노골적이지만
그만큼 가슴에 와닿는 구석이 있자나. 할아방은 백성들이 나중에 천국을 가고 극락
에 왕생하고 열녀비를 세우고 하는 그딴 것보다도 우선 백성들이 지 한몸 안 다치
고 우짜든둥 보신이라도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만큼 춘추전국 시대의 민초들의 삶
이란 위험하고 불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할아방은 거듭거듭 당부하기를 '제발 남과
싸우지 마라. 다투지 마라. 사소한 이익은 차라리 포기해라. 니 한몸 잘 보존해라.
죽으면 니만 섧다. 나서지 마라. 아는 척 하지 마라' 말끝마다 전쟁터 나가는 아들
붙잡고 한소리 또하고 한소리 또하는 오마니처럼 신신당부를 하는거다. 할아방의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그 보살피는 마음은 병아리 돌보는 어미 닭보다 더 지극하다.
사바중생에 대한 부처님의 측은지심에 비견할만 하다. 이 뒤에 가면 그런 할아방
의 애민지정에 구름이 눈물을 쏟은 대목이 나온다. 물론 도올은 그게 무신 소린 줄
도 모릉께로 아무 생각없이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요 하고 넘어가버렸지
만 말이다. 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할아방이 당부한 부쟁(不爭)에 어긋나는 줄은
잘 안다. 그러나 할아방의 말씀이 이토록 진흙탕에 뒹굴게 두고볼 수는 없는 것 아
이가? 안글나?
상선(上善)은 도를 따르는 일선(一善)이고 이하 중하선(中下善)은 세상 속에 살
아가며 새겨야 할 칠선(七善)이다. 이 여덟개의 선은 도교의 십계명이고 노자의 팔
정도라 할 수 있다.
도올이 이 대목을 갖꼬 뭐라고 또 횡수를 늘어놓는 지는 다음 회에 보자.
노자를 웃긴 남자(47) - 옛날 잡담
도올은 상선 이하 주욱 나열된 차선들을 보고 이기 도대체 뭔 소린지 알수가 없
었나봐. 상선약수에 처중인지소오는 우찌 겐또에 통빡을 섞어서 황당하게나마 풀었
는데 곽제 거선(居善),심선(心善),여선(與善),언선(言善) 하고 나옹께로 이기 뭔가?
한참 고민을 했겠지. 상선(上善)에 대한 차하선들(次下善)들이라는 것을 눈치도 못
채고 얼마나 속으로 꿍꿍 가슴앓이를 했는지 이래논거 있제.
『"居善地"로부터 시작하는 일곱구절은, 帛書本에도 거의 비슷한 형태로
실려 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방식은 너무도 다양한 가
능성이 있을 수 있다. 같은 글자에 대해서도 동사ㆍ형용사ㆍ목적어의
다양한 변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자와 21세기> 48쪽 하단
이래 놓고는 구름이 했던 것처럼 객관식 사지선다를 해보자고 판을 벌려 논기야.
그런데 웃기는 것은 문제를 출제한 사람이 내놓은 사지에 정답이 없다는 것이야.
도올이 거선지(居善地)를 샘플로 삼아 내놓은 객관식의 답안을 한번 보까?
① 거할 때는 땅을 좋은 것으로 삼고
② 거할 때는 낮은데 처하기를 잘하고
③ 좋은 땅에 거하고
④ 거할 때는 땅을 좋게 하고
나는 있제 도올이 고대에서 쫓겨난기 천만다행이라꼬 본다. 아직까지 동양학 교
수였어봐. 학생들이 얼매나 불쌍하노? 예문에 정답이 없는 객관식 문제를 교수가
시험에 턱하니 내면서 풀라카면 이기 환장할 일 아이가? 이런 문제를 내놓고 또 머
라카능가 보면 더 걸작이야.
『이 밖에도 다른 번역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번역해도
어느 것이 더 정답이라는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같은 책 49쪽>
불가능한거 좋아하네. 마 모리면 모른다 캐. 그라면 가르쳐 주기나 하제.
'거선(居善)'이란 머무를 때의 지혜를 말하는거자나. 이것은 비단 어디서 살 것
이냐 하는 거주지를 뜻할 뿐만 아니라 직장, 벼슬 등, 살아가는데 있어서 처하게
되는 모든 상황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다. '머무름에 있어서의 선(善)은 그 땅을 살
피는데 있다'라는 뜻이제. 땅은 꼭 대지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상황 전체
를 말한다. 주변 상황을 잘 살피고 파악해서 거하라는 처세의 방편을 일러주고 있
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발 뻗을 자리를 보고 앉아라'카능
기다. 거선지를 모르면 사람이 우찌 되는 주 아나? 도올이맹쿠로 사지(死地)에 빠
지분다. 지가 지금 테레비 강의로 한번 뜨갖꼬 천지분간도 못함서 논의 강의까지
하고 자빠지는데 지금 지가 서있는 테레비 녹화 장소가 바로 '죽을 자리'라는 것
도 모르능기야. 내가 앞에서 그랬자나 높이 나는 놈일 수록 대가리 박은 확실히 깨
진다고. 멍청하게 호랑이 아가리 앞에 자리를 깔고 드러눕으면 우짜자는 것이야?
그런 황당한 강의 나발을 구르미가 보고있는 테레비전에 나와가 불어제끼면 살자
는 것이야 죽자는 것이야? 대한민국에 사람이 없는 주 아나? 이 나라가 그리 만만
한 나라가 아이다. 잘나고 똑똑한 넘들이 곳곳에 쌔고 쌨다.
도올은 이 '거선지(居善地)' 이하의 나열을 물에 대한 설명이 계속되고 있는 것
으로 착각해서 끝도 없이 헛다리짚고 자빠지능기야. 그러다 보니 사지선다가 아니
라 십지선다를 해도 정답이 없을 수밖에. 물의 선(善)에 대한 이야기는 '고기어도
(故幾於道)'에서 이미 끝났는데 도올은 지 혼자 물을 붙들고 기를 쓰고 있능기야.
어떤 스님 둘이 내를 건느는데 물이 불어서 한 처자가 발을 동동 구르게 있응께
로 한 스님이 냉큼 업어서 건네줬어. 그리고는 한참 길을 가는데 다른 스님 하나가
물었어. '출가한 몸으로 처자를 등에 업어도 되능교?' 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나는 그 처자를 아까 등에서 내렸는데 자네는 아직도 업고 있구만.'
할아방은 물 이야기를 벌써 끝냈는데 도올은 아직도 그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
고 있어. 그러다 보니 말하는 지도 곤혹스러운게야. 생각을 함 해봐바. 도대체 물
의 성질하고 거(居),심(心),여(與),언(言),정(正),사(事),동(動)이 우찌 연결이 되
끼고? 도올은 절벽만 만나면 걍 대가리를 박는다.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해서 못 봐
주겄어. 야는 또 지가 막히면 나오는 버릇이 있제. 멀쩡하게 보이능기 곽제 횡설수
설을 막 하능기야. 강의 주제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나발을 신나게 불어제끼
갖꼬 사람들 혼을 약간 빼논 다음에 사람들이 눈치못챌 때 얼른 다음으로 도망가
부는 약은 꾀를 부리능기야.
여기서도 마찬가지야. 상선약수를 하다가 곽제 지나간 군사 정권 시절을 곱씹으
면서 애꿎은 '새마을 운동'까지 도매금으로 매도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당시에 수
경사에 끌려가서 존나게 맞은 기억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당시에 구름이 수경사
군바리였으면 도올은 얼반 죽었을 거다. 지금도 철딱서니없는 소리들 해 쌓는데 학
생 시절이야 오죽했겄어. 당시에 수경사에 달려 들어간 이유가 됐던 글의 제목이 '
새마을 운동은 문화박멸운동일 뿐이다'라는 것이었단다. 맞아도 싸제. 도올이 새마
을 운동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덕수궁 돌담길이 바뀌었다는 것뿐이지 아마.
박통이 새마을 운동을 제창할 당시의 이 나라 농촌의 실상을 도올은 모르능기야.
늘 지가 자랑해쌓는 잘나가는 집안에 태어나 대학을 다닐 때까지 고생이라고는
안 해본 브루조아지 출신이라서 여학생 손목 잡고 데이트하던 돌담길 허물어진 것
에 대한 적개심이 새마을 운동 전체를 보는 시각으로 고정되어 버린게야.
'덕수궁 돌담길이 밥 먹여 주나?'
지금 이런 소리하면 돌이 날아올지 모르겠지만도 그러나 온 나라 국민이 배를 쫄
쫄 굶고 어린아이들이 아사하는 지경일 때는 고궁 돌담이 문제가 아인기야. 오백 년
가보로 내려온 족보도 자식새끼 둘만 굶겨 죽이고 나면 고물 장사치한테 종이 값으
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훗날 살림이 펴지고 나면 그때 엿장수한테 팔아먹은 족보 책
이 생각나고 아깝기가 잠이 안 올 지경이겠지만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
었제. 우선 사람이 살고 봐야 한다는 명제는 그 무엇에도 우선한다. 문화재의 보존
같은 소리는 배부른 다음이라야 나오는 소리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가장 반문화적 폭거로 손꼽히는 사건으로 '몬테카시노 폭
격'을 들 수 있다. '몬테'란 '마운틴'의 이태리 말이니까 '몬테카시노'는 카시노
산이란 뜻이다. 이태리 중부의 고갯길에 우뚝 솟은 이 카시노 산 위에는 수백 년
내려오는 수도원 건물이 있었다. 물론 그 수도원에는 이태리의 값진 고서와 그림
등의 문화재가 있었고 수도원 건물 자체가 국보급 문화재요 인류의 유산이라 할만
한 것이었다. 이 산이 굽어보는 평야 지대를 진격하면서 연합군 장병들 수만 명이
죽었다. 그러고도 카시노 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발이 묶인 미군은 카시노 산 정상
의 수도원에 독일군의 지휘부와 관측반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폭격기를 동원해서
하룻밤 사이에 그 귀중한 문화 유적을 돌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이 카시노 수도원
폭격은 두고두고 지탄의 대상이 됐고, 폭격을 결정했던 미군 지휘부는 반인류, 반
문화 범죄자로 조사를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군 지휘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만 명의 부하장병들이 죽어나가는 판에 수도원이 문제가 아닌 것이
다. 수도원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당장 눈앞의 들판을 지나가야만 하는 수만명
인간의 생명보다 소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수도원을 폭격해서 만 명의 병사를 죽
음에서 구할 수 있다면 고민이 안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수도원 폭격이 전술적으
로 어떤 잇점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불리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자.
육이오 동란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설악산 일대에 북괴군 잔당들이 남아서
유격전을 해대는 통에 국군의 피해가 컸다. 그런데 이 괴뢰군 유격대들이 겨울에
얼어죽지 않고 잘도 돌아댕기는 이유를 알아보니까 산 속 곳곳에 있는 오래된 사찰
들이 은신처요 추위를 막아주는 숙영지가 되 주는 때문이더라 하는 것이었다. 국군
지휘부는 설악산 대관령 일대의 모든 사찰을 불태우기로 작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 때문에 왜란 호란에도 보존되었던 유서 깊은 명찰들이 모조리 불타버렸다. 지
금에 와 생각해 보면 실로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나 당시로서는 당시의 절박한 상
황이 있다. 국군의 지휘부를 무조건 문화 파괴범으로 매도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리산에서도 마찬가지였어. 지금 우리가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한순간 재가 될뻔 했어. 지리산 빨갱이들이 해인
사 주위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출격한 공군 편대가 천만다행스럽게도 한국공군이었
어. 싣고간 폭판에 로켓탄을 퍼부으라는 명령을 편대장이 묵살하고 기총소사만 하
고 돌아갔어. 그래서 팔만대장경이 살아남은기다. 그때 편대장이 박영희소령인가
그럴끼야.
새마을 운동도 마찬가지다. 당시에 우리 나라 사정이 어떠했노? 도시에서 5리만
밖에 나가도 시골 마을마다 얼라들이 부황뜬 얼굴로 똥 찍어먹고 놀았다. 여름만
되면 콜레라로 떼죽음을 당했다. 겨울만 되면 동사자들이 길에 나뒹굴었고 집안에
자는 사람도 언제 죽을지 몰랐다. 연탄 가스 중독으로 일가족이 몰사했다는 신문기
사가 매일 같이 나던 시절이다. 시골로 갈수록 현실은 참담하고 혹독했다. 새마을
운동의 본령은 길 닦고 집 고치고 덕수궁 돌담 바꾸는 따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정신 개조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에 유래가 없는 성공을 거둔 운동이다. 당
시 시골이 왜 가난했느냐? 다른 이유도 많았지만 가장 커다란 원인은 농사 짓는 사
람들이 모두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다는데 있다. 왜정의 수탈과 전쟁, 그리고 자유
당 정권의 무능 세월을 거치는 동안 농촌 인구는 대부분 알거지로 변해 있었다. 빚
이 없는 농가가 없고 빚을 갚을 희망도 전망도 깜깜한 절벽 같은 세월이었다. 그
세월을 촌사람이 뭐하며 지냈냐? 하나같이 노름에 빠져 있었다. 노름 빛으로 땅문
서 넘기고 꺼러지된 넘들이 한둘이 아니고 심지어 마누라 딸자식 팔아 넘기는 일도
비일비재했어. 이런 농촌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는 의욕과 자신감을
주기 위해 박통이 노래 가사까지 지어가면서 몰두했던 사업이다. 덕수궁 돌담길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야. 우리 나라 농촌이 이나마 살아나 주식의 자급자족이 이루
어진 것을 생각하면 덕수궁을 통 채로 갈아엎었다 해도 용서받을 이유가 충분하다.
당시의 경제 우선 건설 독재에 대해 비판의 소리들은 '옛날에 팔아먹은 족보책
생각'이야. 그때 굶어죽은 아새끼들은 살만해징께 잊어불고 족보책 아까븐 생각만
나능기야.
나중에 전경환이가 해먹은 것은 옥의 티다. 머리가 나쁜데다가 심성까지 비뚤어
져서 왜넘들은 필로소피가 있어 보이고, 지나라 정부가 해볼려고 애쓴 짓은 그래
반문화적 폭거로 밖에 안 보인다 소리제. 수경사 군바리들 진짜로 사람 좋았다.
물론 상대를 해주느라 이런 소리도 하는 거지만 도대체 노자 할아방 이야기에 왜
케케묵은 쌍팔년도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지 모르겠다. 자기도 군사 정권 시절에 한
운동했다는 걸 자랑하고 싶은 걸까? 현실을 방관하던 무기력한 인텔리가 아니라 행
동할 줄 알았던 식자였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유덕화 나오는 깡패 영화의 주
인공처럼 희생정신을 발휘하며 살았음을 알아달라는 것일까? 그래서 노자 할아방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했다고? 세상에나. 도올은 할아방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하면서 살았다는 점에서 할아방을 팔아먹을 자격이 없다.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군사 정권이 들어서건, 문민정부가 헛소리를 하건, 국
민의 정부가 지랄육갑을 하건 그런 건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대통령 이름
도 모르고 산다. 박통, 전통, 노통, 김김통 밖에 모른다. 지금은 2차 김통 시대라
는 게 내가 아는 전부다. 그래서 나는 여지껏 이 한 몸 잘 보존하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왜, 떫어? 그러면 안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자를 배운다는 인간은 헤깝
은 짓 하다가 수경사 달려간 일을 자랑하면 안 되는 거다. 그거부터 아는 것이 도
를 배우는 첫걸음이다.
노자 사상에 대한 불세출의 명 해설서 <노자와 21세기>는 이 장에 대해 꽤나 길
게 중언부언 잡다한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다. 노자 할아방이 이 장에서 물에 대해
언급 한 것은 단 네 줄에 지나지 않고,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싫어
하는 물의 성질로서 도를 비유했을 따름이고 그와 같이 은둔함이 좋지 않겠는가 하
고 은근슬쩍 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올은 이 장 전체가 물에 대한 기술이라
고 보고 노자가 '물'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단단히
착각한 나머지 노자 해설서를 '물에 대한 보고서'로 바꿔 놓았다. '상징화(symboli
zation)'니, '상징적 표상(symbolic representa-tion)'이니, '보편적 적응의 원리(
a principle of universal applicability)'니, 하면서 그 전매특허 같은 유식이 철
철 넘치는 소리를 잔뜩 한 다음에 약방의 감초같이 왕필의 주가 나온 끝에 '물은
유(有)로서 관념의 세계고, 도는 무(無)로서 사실의 세계다'라고 강아지 풀뜯어먹
는 소리를 또 하고 자빠진다. 이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가 단순히 강아지 풀 뜯
어먹는 소리가 아니고 사실은 언어의 제약과 상징 체계를 벗어나는 심오한 철학적
꽈배기 언어의 산출물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런 다음에 곽점죽간본이라는 근자에
발견된 <도덕경>의 또다른 사본의 내용인 '태일생수(太一生水)'의 원문을 옮겨 놓
고서 장황스레 연구 결과를 과시하고 있는데, 이것도 매우 웃긴다. 곽점죽간본의
태일생수편 내용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도덕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개념과
말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을 비롯해서 사시(四時)
라든지, 차고 덥고 습하고 건조한 것 등 훗날 오행(五行)에 대입되는 개념들이 나
오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학의 대가씩이 못 되는 올챙이 아마추어 동양학자가 봐도
공노(孔老) 시대의 사상이 아님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훗날 전국시대 말기에 동북
(東北) 변방의 제(濟)나라에서 융성한 황노학(黃老學)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양오행의 철학 체계는 빨라도 전국시대 말에서 한대(漢代)에 걸쳐 발생한
것이다. 할아방 살았던 시대에는 음양 사상이 태동하기도 전이었다. 곽점죽간본의
태일생수편은 후대의 황노학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할아방은 물이라는 것에
대해 도올이 착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도덕경> 전
체에 물이 나오는 것은 이 장의 단 네 줄로 처음이고 끝이다. 책을 똑바로 보지 못
하다보니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를 알지를 못하고서 그저 고추 먹고 맴맴
오리야 기리야 하능기다.
하긴 할아방도 시원한 물은 좋아했다. 그러나 음양오행설을 동원해서 노자를 설
명하는 것은 상대성 이론을 동원해서 뉴튼을 설명하는 꼴이고 달마선으로 부처를
말하는 것이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예수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노자와
21세기>에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태극도설이니 음양 사상이니 하는 것들은 할아방과
는 거리가 먼 소리들이다. 할아방은 태극이라는 말도 몰랐던 사람이다. 그래서 '곡
신불사(谷神不死)'니, '현빈(玄牝)'이니 해서 할아방이 손수 이름을 지어가며 설명
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을 노자의 사상이라 말해서는 안 되능기다.
도교를 이루고 있는 주역과 음양오행과 황제의 의술을 포괄하는 사상 전반에 대
해서 한번은 설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마는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산천경계 구경 다하면서 가다가는 노자를 웃긴 남자 노망들 때까지
계속되겄다. 벌써 들었다꼬? 에이 설마.
노자를 웃긴 남자(48) - 8장 번역
8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개괄하여 보고 다음으로 가자.
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居善地,心善淵,與善仁,
상선약수,수선리만물이부쟁,처중인지소오,고기어도,거선지,심선연,여선인,
言善信,正善治,事善能,動善時,夫唯不爭,故無尤
언선신,정선치,사선능,동선시,부유부쟁,고무우
◆ 도올 역 ◆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
마음 쓸 때는 그윽한 마음가짐을 잘하고,
벗을 사귈 때는 어질기를 잘하고,
말할 때는 믿음직하기를 잘하고,
다스릴 때는 질서있게 하기를 잘하고,
일할 때는 능력있기를 잘하고,
움직일 때는 바른 때를 타기를 잘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
♡ 구름 역 ♡
선 중의 상은 물의 그것과 같다.
물의 선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며
뭇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은 도와 가깝다 할 수 있다.
(만약 물과 같은 상선이 어렵다면)
머무를 때의 선을 땅을 살피는 것으로 하고
마음을 간직하기를 그윽함으로서 선을 삼고
남과 어울릴 때는 어진 것으로 선을 삼고
말을 할 때는 믿음으로서 선을 삼으며
올바름을 세우는 것으로 다스림의 선을 삼고
능히 해낼 수 있느냐로 일을 할 때의 선을 삼으며
움직이는 것은 때를 가리는 것으로 선을 삼아야 하나니
모름지기 다투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리해야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