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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30
창세기 7:6-24
노아 홍수
노아 홍수에 대하여 우리는 그저 오래전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는 선에서 그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단순히 과거에 엄청난 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셨고 그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니까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두려워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노아 홍수에 대한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똑바로 살라고 겁박하기 위한 그런 본문이 아니라 성경에서 ‘노아’, ‘홍수’, ‘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씀하시는 언약이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6절). 우리 성경에 “있을 때에”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 ‘하야’이다. ‘~이 되다, ~이 임하다, ~이 발생하다, ~이 살아나다’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홍수가 땅에 임하였다’라는 말이다. “홍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맙불 마임’인데 굳이 번역하자면 ‘많은 물, 큰 물, 범람한 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단어는 성경에 13회 나오는데 시편 29:10에 한 번 나오는 것 외에는 창세기 6-9장에서만 사용된 독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겔 43:2)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계 1:15)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
이런 본문들을 통해 볼 때 ‘많은 물’과 ‘소리’를 서로 연관성 있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 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3, 10-11)
여기서 ‘좌정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야샤브’는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지로 삼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홍수를 통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고 하나 되심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평강의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육백 세”라고 하였는데 ‘6’의 의미는 ‘7’에서 하나 모자라는 것으로 ‘인간 수’로 상징된다. ‘6’을 100배 하여 육백 세에서 홍수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육체가 된 인간을 철저히 심판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노아는 “육백일 년”(8:13)이 되어서 방주에서 새로운 세상에 나온다. 이 표현은 ‘육백에 첫 번째 해’(히, ‘에하드’)이다. 수가성 여인에게 남편 다섯이었으나 지금 있는 여섯 번째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요 4:18). 그래서 7번째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죄인은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은혜를 입히실 것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7-9절). “들어갔으며”라는 말은 히브리어 ‘보’인데 2:19에서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라는 말씀이 ‘아담 안으로 들어간다’라는 뜻이라고 하였고 또한 2:22에서도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는 말씀이 ‘아담 안으로 들어갔다’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하나 된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암수”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네케바, 자카르’이다. 즉 씨 가진 존재와 씨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우리 성경에 “며느리들”이라고 의역을 하였는데 ‘잇샤’(‘여자들’)이다. 직역하면 ‘노아는 아들들과 여자와 아들의 여자들’이다. 홍수를 통해 ‘남자와 여자’가 방주 안에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하나 되는 것으로 새 창조를 보여준다. 그것이 ‘아들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노아’, 즉 ‘안식’이라는 뜻이다. 안식의 의미를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21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 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 33:21-22)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10-12절). “칠 일 후에”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칠 일이 되다’라는 말이다. ‘7’이라는 수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낸다. 여기서도 “땅에 덮이니”라는 말이 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야’를 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6절의 “땅에 있을 때에”라는 말이나 12절에서 “쏟아졌더라”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하야’이다. 즉 단순히 홍수가 땅을 덮었고 하늘에서 쏟아졌다는 말이 아니라 ‘땅에 임하였다’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으로 나타낸다(참고 사 14:28, 렘 1:3, 학 1:1, 슥 1:1 등)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삼상 15:10)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욘 1:1)
단순히 홍수가 땅에 덮이거나 쏟아진 것이 아니라 노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고, 7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으며,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고 본문은 반복하여 강조한 것이다.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13-16절). “곧”이란 히브리어로 ‘에쳄’인데 ‘뼈, 몸, 실체’라는 뜻이다. 출애굽기 24:10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하늘같이”(히, ‘샤마임 에쳄’)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하늘의 어떤 실체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곧 그 날에”라는 표현은 하늘의 실체를 보여주는 날이라는 의미이다.
“문을 닫으시니라”라는 말씀을 개역한글판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라고 번역하였고, 새번역에서는 “주님께서 몸소 문을 닫으셨다”라고 하였고, 킹제임스흠정역에서는 “주께서 그를 안에 넣고 닫으시니라”라고 번역하였다. 히브리어로 ‘사가르’인데 ‘닫다, 잠그다, 넘겨주다’라는 뜻이다. ‘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방주의 안과 밖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을 보여준다.
방주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나타내시는 상자이다. 이런 점에서 상자의 문을 하나님께서 닫으셨다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문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구원, 생명이란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닫아 넣으신 문 안 방주에는 하늘의 생명이 주어지는 은혜를 나타내고 방주의 문 밖은 하나님의 심판인 죽음의 세계를 보여준다. 1차 독자의 입장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른 문을 통해 출애굽의 상황은 이런 의미를 잘 나타낸다.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 12:21-23)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 28:16-17)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그곳을 야곱은 하늘의 문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이 지향하고 보여주는 것은 언약의 실체가 하나님의 집이요 문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7-10)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제물을 위한 ‘양의 문’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밝히셨다. 그래서 양의 문이신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로서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이루신다고 선언하셨다(요 10:1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 안은 생명이요 문 밖은 영원한 사망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다고 밝히고 있다(계 4:1).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주시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린 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닫힌 문이다.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이다(마 25:1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6-37)
방주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생명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게 하셨을지라도 그 양식이 그들에게는 먹고 멸망 받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23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24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25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시 78:23-25)
(202302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