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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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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이야기) 스크랩 명고서원
관보 추천 0 조회 20 11.12.15 19: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명고서원(明皐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 383번지
건 축 주 :  정담(鄭湛, 1548~1592)
건축시기 :  1800년대 건립
소 유 자 :  정재홍(관리자 : 정구식)

건축 배경
명고서원(明皐書院)은 임진왜란 때 공신 장렬공(莊烈公) 정담(鄭湛, 1548~1592)과 황간(黃澗) 현감을 지낸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 1559~1616)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다.
1710년(숙종36)에 정담의 후손이 그의 충렬을 추모하여 영해 인량리에 향현사(鄕賢祀)를 세우고 매년 향사를 올렸다. 그 후 그의 자손들이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로 옮겼고, 종가 또한 이주하면서 명고서당을 서원으로 고치고 위패를 모신 뒤 명고서원이라고 불렀다. 그 후 이 서원에 황간현감을 지낸 오극성의 위패를 함께 추향하게 되었다.
이 서원 부근에는 한양조씨(漢陽趙氏), 함양오씨(咸陽吳氏), 야성정씨(野城鄭氏)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춘추로 향사를 지내며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 1871(고종8)에 전국 서원 철거령에 의하여 묘우는 철거되고 서당만이 남았다.

건축 구성
명고서원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아담한 건물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이었으며, 좌측 2칸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기둥은 모두 방주(方柱)를 사용하였고, 퇴칸은 헌함을 돌출시켜 누마루처럼 꾸몄다. 사방에는 토석담을 둘렀으나 많이 무너졌으며, 기단은 시멘트로 처리하였다.

현판
명고서당(明皐書堂)
정의재(正義齋)
성인재(成仁齋)
명고서당중수구기(明皐書堂重修舊記)
완산(完山) 류치명(柳致明, 1777~1861)
명고서당기(明皐書堂記)
완산(完山) 류필영(柳必永, 1841~1924)

 

내력과 기능

관련문집
- 『충렬록(忠烈錄)』
『충렬록』은 임란왜란 때 전라도 김제군 웅치전투에서 전사한 정담(鄭湛, 1548~1592)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 정형규(鄭亨逵)가 1869년(고종 6)에 자신이 전해 들은 것이나 당시의 여러 문헌 자료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시·서·유사·행장·전·묘지명·제문·만사·「사략잡기(事略雜記)」·기발(記跋)·상량문·「정각상량문(?閣上樑文)」·「소계수록(疏啓隨錄)」·「청시사략(請諡事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략잡기」는 정담의 웅치전투에서의 전공 및 전적지가 수록된 문헌에서 뽑아 모은 것이다. 기발은 충렬록 간행의 경위에 대한 기록이다. 소계수록에 의하면 정담은 김제군수(金堤郡守)로 임진왜란을 맞아 권율(權慄, 1537~1598)의 행주대첩에 버금가는 전공을 세웠음에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지 못한 것에 대해 김제유생과 및 자손들이 추록훈(追錄勳)을 바라는 소·계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청시사략」은 정조와 순조 대에 그동안 시호와 증직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추증 방침에 따라 선조 때 정담의 전공과 녹훈 전말의 사실들을 밝혀 시호를 청하는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관문(關文)의 내용이 들어 있다.
-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은 오극성(吳克成, 1559~1617)이 지은 문집이다. 본집은 4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두에 류치명(柳致明)과 이돈우(李敦禹)가 쓴 서문이 있고, 그 뒤에 목록이 있다. 권1은 시, 소, 서, 기, 제문이다. 시는 모두 9제(題)로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1595년(선조28)에 올린 군무에 관한 상소는 남쪽으로 내려가 적정을 살피고 나서 올린 것으로, 산성(山城)을 구축하고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다. 서는 1592년(선조25)에서 1597년(선조30)까지 왜적의 침입과 관련하여 묘당(廟堂)의 여러 사람과 장수에게 보낸 것이다. 기는 인감(仁鑒)의 죽립암(竹立庵)에 대해 1613년(광해5) 4월에 써 준 기문이다. 제문은 이순신(李舜臣)과 이대규(李大圭)에게 시집간 딸에 대한 것과 「사직단기우문(社稷壇祈雨文)」이다. 권2~3은 잡저로 「임진일기(壬辰日記)」상하와 「황간방유문(黃澗榜諭文)」이 수록되어 있다.
권4는 부록이다. 정경세(鄭經世), 서성(徐?), 이준(李埈) 등 9명의 만사(輓詞)와 조덕린(趙德?)이 지은 묘표(墓表), 이한응(李漢膺)과 이휘녕(李彙寧)이 지은 행장, 저자를 명고서원에 봉안할 때의 봉안문과 상향축문이 실려 있다.
권말에 홍희승(洪羲升)의 발(跋)이 있고, 「선무원종훈록전지(宣武原從勳錄傳旨)」와 「장악원계첩(掌樂院契帖)」이 별도의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관련인물

주향자
- 충렬공(忠烈公) 정담(鄭湛, 1548~1592)
자는 언결(彦潔)이고, 호는 일헌(逸軒)이며,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아버지는 정창국(鄭昌國)이고, 어머니는 전의(田義) 이씨(李氏)이다. 그는 어려서 경서와 역사서를 읽고 시를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향시(鄕試)에서 낙방한 뒤로는 무술 연마에 뜻을 두었다. 그는 18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무관에 종사하여 무인의 기질을 마음껏 펴기 시작하였다.
정담이 영남동도병마사(嶺南東道兵馬使) 홍치무(洪致武)의 부장으로 있을 때 평양군(平陽君) 김순신(金順申)의 도움으로 병서를 탐독하여 무예가 뛰어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북병사(北兵使) 이제신(李濟臣)에 의해 북변방어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정담은 이광(李洸)을 따라 용인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비록 패하고 돌아왔지만 다행히 장병들 중에 한 명도 사망한 사람이 없었다. 또 왜적이 전라도와 충청도를 침범하자, 정담은 웅현(熊峴)에 배치되어 적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는 웅치를 넘으려는 적병들과 싸우다가 포위되었다. 주위에서 정담에게 퇴진하기를 권했으나, 그는 “차라리 적을 죽이다가 장열하게 죽을지언정 차마 달아나서 적으로 하여금 이롭게 할 수 없다.”고 하고, 적을 맞아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최후를 맞이하였다.
-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 1559~1617)
자는 성보(誠甫)이고, 호는 문월당(問月堂)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오민수(吳敏壽)이다. 1594(선조27)에 아우 오윤성(吳允成)과 함께 권무과(勸武科)에 합격하였다. 이후 선전관이 되어 남방의 적정을 탐지해 보고하고 다음날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가 되었다.
1596년(선조29) 황간현감(黃澗縣監)에 제수되어 기발한 계교로써 적을 토벌한 공이 많았다. 그러나 벼슬은 시강원시독관(侍講院侍讀官)으로 원종록(原從錄)에 참가하는데 그쳤다. 1597년(선조30) 왜적이 다시 침입하자,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의 진(陣)으로 가서 접전을 벌였다. 죽인 왜적이 2백여 명이었다. 그는 남원의 천병(天兵)이 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원하러 갔으나, 성이 이미 함락되어 돌아오는 길에 적을 만나 30여 수급을 획득하였다. 1598년(선조31) 10월 아우 오윤성과 통제사 이순신의 막하로 가 왜적을 대파하였다.
1601년(선조34) 훈련판관(訓練判官)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음주와 글을 읊으며 ‘문월당’이라고 호를 지었다. 1617년(광해9) 영해를 지나다가 별세하니 향연 59세였다.


관련인물
- 관련인물
완산(完山) 류치명(柳致明, 1777~1861), 완산(完山) 류필영(柳必永, 1841~1924)

마을이야기

영양 > 일월수비권 > 일월면 도곡리
- 맑은 샘물이 흐르는 도곡리도곡리는 월자봉(月字峰)으로 올라가는 중간쯤에 있는 마을로 맑을 냇물이 흐르는 곳이다. 마을은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하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도곡리는 원래 영양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이었다. 마을에 신당(神堂)이 있어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구도실’이라고도 불렸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상부곡(上部谷)을 합하여 도곡리라고 하고 일월면에 들게 하였다.
도곡리에는 명고서원(明皐書院)이외에 취은당(醉隱堂) 과 수송정(睡松亭)이 있다. 취은당은 오삼달(吳三達, 1667~1744)장군이 만년에 지은 정자이고, 수송정은 오세완이 1885년 건립하였던 것을 권상두가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서원골[書院谷]

도곡리 동쪽 음지 마을 상단부에 작은 골이 있는데 서원고을이다. 이곳은 조선조 중엽에 병조참판을 지낸 충렬공(忠烈公) 정담(鄭湛, 1548~1592)의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면서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명고서당을 지었다. 그 뒤 영해 향현사(鄕賢祀)의 정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여 서원으로 승격하게 되었으며, 봄가을로 향사를 올렸다.
1871(고종 8)에 전국 서원 철거령에 의하여 묘우는 철거되고 서당만이 남았다.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을 서원골이라고 하고, 그 앞에 있는 논들을 서원앞들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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