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부흥의 길(復興之路)3부 자막 대사 녹취문
제3부 中國新生 중국,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하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다. 근대에 들어 중국에게 주어졌던 역사적 임무도 완성되었다. 바로 민족의 독립과 인민의 해방이다. 이로써 중국 국민의 안정된 생활과 행복을 위한 밑거름이 마련되었다. 중국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새롭게 탄생된 공화국.
반년이란 짧은 기간 안에 전국의 물가를 안정시킨다. 이는 옛 중국이 해결하지 못했던 고질병이었다. 농촌에서는 토지제도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약 3억 명의 농민들이 7억 묘의 토지를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는 여정은 멀고도 험했다. 1949년, 전 구간 운행이 가능한 철도도 아직 없었고 1인당 GNP는 겨우 27달러였다. 이는 평균 아시아 국가의 3분의 2 수준이었고, 4천만의 수재민이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구(舊)정권과의 냉전 국면 하에 탄생된 새로운 중국은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까?
모택동이 주축이 된 제1대 중앙 지도부 단체는 앞으로 어떻게 중국의 부흥을 이끌어 갈 것인가?
1953년 11월 30일. 안산철강소의 노동자들은 긴장과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은 중대한 역사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9시경 중국 최초의 철도 레일이 생산되었다. 백년 가까이 수입 철도 레일에 의지해왔던 중국 기관차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해 안강철강소에서 중국 최초의 무봉강관(無縫鋼管 : 이은 데가 없게 만든 강철관)이 생산되었고, 국제규모의 자동화 용광로도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모택동은 축하 전보를 보냈다. 안강철강소의 성과에 대해 1953년 중국 중공업 발전의 대사건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의 새 정부는 국민경제를 회복시켰다고 자축했다. 의원들은 경제건설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제안하기도 했다.
➡팡송(중앙당사 연구실)
1952년 국민경제회복이라는 임무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 모택동은 공산당의 과도기 노선에 대해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기간을 목표로 중국만의 사회주의 공업화를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 상공업을 사회주의로 개조하는 것으로 사회주의 공업화와 사상개혁이 동시에 진행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953년부터 시작된 사회주의적 공업화 건설과 사회주의 개혁은 왜 동시에 진행되어야 했을까? 이것은 중국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주었을까?
1945년 중국 공산당 제 7차 전국대표대회. 모택동은 미래에 대한 구상을 발표한다. 빠른 시일 내에 중공업과 경공업 시설을 설립할 것이며, 중국을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바꾸겠다는 야망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된 후에야 자신이 그린 중국의 미래를 건설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40년대 후반, 미국과 소련은 세계를 무대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일촉즉발의 상황. 세계는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냉전의 어두운 구름과 제3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우려가 전 세계를 뒤덮었으며 이는 중국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윌리엄 C. 커비 (하버드대학 교수)
냉전은 중국을 고립시켰습니다. 이는 미국이 유도한 것이었죠. 미국은 중국의 수출입을 금지했고 서방국가나 일본시장에서 중국제품의 거래를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신중국 설립 3일 후, 소련 정부는 외교 각서를 보낸다. 세계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게 큰 힘이 되었다.
두 달 후 모택동은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한다. 그의 첫 번째 출국이자 가장 긴 외국방문이었다. 1950년 2월 14일. 중·소 우호동맹 상조조약이 체결된다.
➡칭광청 (사회과학원 러시아연구소)
중국은 소련과 이 조약을 체결한 후, 작게는 국가의 안위에서 크게는 세계평화까지 법률상의 보장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는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조약 체결 후 모택동은 귀국한다. 그는 “조약을 체결하여 기댈 곳이 생겼고 마음 놓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당시 중국 북동쪽 국경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있었다. 따라서 개발을 향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미국은 함대를 파견하여 타이완 해협에 진입했다. 중국은 한국의 38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미군은 압록강까지 진출한다. 이것은 중국 새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한국전쟁에 개입하고 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한을 지원하며 미국과 일전을 치룬 한국전쟁을 통해, 중국은 국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했다.
➡죠셉 S. 닐 (전 미국 국방장관)
미국은 중대한 실수를 했습니다. 중국이 한국전쟁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몰랐죠. 미국이 38선을 넘은 것은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1950년 미국의 철강생산량은 8천 7백만 톤, 중국은 겨우 61만 톤. 약 140배의 차이였다. 세계 제1위 공업국가인 미국에 대항하여 싸운 중국은 국력의 차이를 절실히 느꼈다.
그것은 진정한 강대국의 힘이었다. 중국인들은 강대국을 향한 길이 아직 멀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선즈화 (화동사범대학 교수)
그 당시 중국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경제발전계획을 실현하는 방법을 몰랐어요. 사회주의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소련을 모델로 삼아야 했습니다.
1920년대와 30년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보여준 계획경제 방식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고도로 집중된 계획경제체제. 소련은 건국 후 1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중국을 포함한 신생국가들은 이 방법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중소 양국은 경제지원 문제에 대해 두 달 동안 협상을 한다. [주은래 및 중국 대표단의 모스크바 방문] 양국 정부는 향후 5년 동안 소련이 중국에게 필요한 지원을 하고, 주요 건설을 시작하는데 합의했다. 중국의 공업 건설은 소련의 도움으로 가속이 붙는다.
1953년 첫 번째 5개년계획이 세워졌다. 이는 계획과 실행, 수정이 동시 진행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존 A. 쿼치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
계획경제는 직접적이고 고효율적이며 특히 대형 기반시설 건설에 유리합니다. 이는 빠른 발전을 원하는 중국이 가장 필요한 것이었죠.
열정이 불타는 시대였다. 생기와 활력이 가득했고 기계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중국에는 매일 변화가 일어났다. 매일 새로운 건설계획이 시작되었고 중국이 경험하지 못한 공업 분야도 불탔다. 자동차 생산 공장, 비행기 제조 공장과 대형 발전설비 공장 등이 건설되었다. 새 중국은 짧은 기간 안에 공업화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1951년 9월, 태행산(太行山) 구역에 살던 농민 이순달은 모택동을 세 번째 만난다. 그는 ‘생산설비의 부족 문제’를 해결해낸 인물이다. 농민 여섯 가구와 상호 협조 팀을 만들고 각 가구의 생산 공구를 함께 사용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좋은 성과를 얻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모택동의 생각과 일치했다.
1951년 12월, 중국 공산당 중앙정부가 출판한 ‘농업생산 상호 합작의 결의’에서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보다 더 많은 곡식과 공업원료를 얻고, 농민의 구매력을 높여 공산품을 팔 소비시장을 마련하려면, 반드시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고
1952년 전국에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830만 개의 상호협력팀과 3.600개의 초기 농업 합작사가 나타난다. 농업의 사회주의로의 전환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1953년 개인 수공업과 자본주의 상공업도 잇달아 사회주의로의 변모를 시작한다.
➡주쟈무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
주체는 공업화이고 양 날개는 ‘3대 개조’입니다. 새에 비유하면 ‘3대 개조’는 새의 두 날개라 할 수 있죠. 두 개의 날개가 있어야만 우리의 공업화가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주의로의 변화는 사유제(私有制)에서 공유제(公有制)로의 변화였다. 중국의 역사상 가장 뜻 깊은 사회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변화는 당시 중국의 생산력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중국이 사회주의를 선택한 것은 1950년대에 발생한 주요한 사건 중의 하나다. 이로부터 중국은 국가 부흥을 위한 여러 가지 길 중 사회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피터 놀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중국과 같이 빈곤하고 문제가 많은 경제구조에서 사회주의는 매우 합리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제재 없는 경제발전은 매우 비합리적인 일입니다. 제재가 없었다면 중국의 공업화 과정과 국민의 생활 및 복지에 많은 문제를 야기했을 것입니다. 중국이 50년대 초기와 70년대 후반기에 내린 선택은 중국의 발전에 매우 적절한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이것은 1950년대에 매우 유명했던 사진[한 노동자가 보안경을 이마에 턱 걸치고 웃는 사진]이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리사오쿠이. 1953년 모택동은 빠른 속도의 제강공장을 완성한 그에게 축하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리사오쿠이와 신중국 건설자들의 열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 제련 노동자의 말에 그 답이 있다.
“자신을 위해 일하는데 어떻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습니까?”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중국의 국민은 처음으로 국가의 주인이 된 것이다.
1953년,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에 걸쳐 총선이 진행되었다. 인민대표대회는 하급부터 상급대표회의까지 개최되었다.
1954년 9월, 제1회 인민대표대회의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중국의 인민 민주주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새로운 중국의 탄생과 함께 찾아온 중국 인민정부의 협상제도는 계속해서 정부와 사회에 중대한 작용을 하게 된다.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자치제도를 시행해 민족의 평등과 지역발전을 촉진했다. 사회주의 건설은 각 민족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이 조각상은 한 농민과 국가지도자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쿠얼반 투르문은 구(舊)정권시대에 노역을 하며 무시를 당했던 농민이었다. 그는 60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자신 소유의 토지에서 황금빛 옥수수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자신과 약속을 한다. ‘당나귀를 타고 북경으로 가서 나에게 행복을 알게 해준 모택동 주석을 만나 인사를 하겠다!’고 말이다.
그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북경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계속 걷다보면 북경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다.
➡카스무 러서마이티 (쿠얼반의 고향 주민)
1958년, 쿠얼반은 모범 노동자로 선출되어 처음으로 북경에 가서 모택동 주석을 만나게 됐습니다. 돌아올 땐 모택동 주석으로부터 옷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쿠얼반은 그것으로 옷을 해 입었죠. 1959년, 쿠얼반은 자치구의 인민대표가 되어 또 북경에 가게 됐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번엔 트랙터를 받아오라고 했고 쿠얼반은 모택동 주석에게 트랙터를 요구했습니다. 모택동 주석이 승낙하셔서 우리 마을에 처음으로 트랙터가 생기게 됐습니다.
쿠얼반의 이야기는 작곡가 망워딘에 의해 ‘사랑의 모(毛)주석’이란 흥겨운 민요로 만들어졌다. 이 노래는 지금도 불려지고 있다.
1956년, 첫 번째 5개년계획이 앞당겨 완성되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의 새 정부가 얻은 성과는 구(舊) 중국의 백 년 동안의 성과보다 컸다. 바로 그 해 중국의 사회주의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사회주의의 기본 경제제도가 전면적으로 구축되었고, 18년을 예상했던 목표는 7년 만에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제도의 확립은 중국의 성장에 기반이 되었다. 중국은 전면적인 사회주의 건설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1·5 계획(제1차 5개년계획)이 순조롭게 완성되면서 중국 공산당은 국가건설에 대한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1956년 4월, 모택동이 발표한 <10대 관계론>은 중공업과 농업, 경공업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소련과 같이 모든 문제가 중앙정부에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중앙과 지방 정부가 각각 그 역할을 해나가야 하며, 모든 민족과 국가의 장점을 배우되 단순한 답습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0대 관계론은 중국만의 사회주의를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또 중국 공산당 8대 전국인민대회를 위한 이론상의 준비였다.
➡모택동 (연설)
우리가 고립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내디디며 중국을 위대한 사회주의 공업화 국가로 만들 것입니다!
➡스중취엔 (중앙당사 연구실 초대 부주임)
그 당시 문제는 과도한 변화였습니다. 정부의 임무는 과거의 계급투쟁에서 국민 욕구 만족으로 바뀌었으나, 당시 중국의 생산력으로는 이를 만족시키기 어려웠기에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공산당의 목표는 빠른 경제발전, 생산력 증대였습니다.
중국 공산당 집권 후 개최된 제1차 전국대표대회. 중국이 사회주의 길로 들어선 후 처음으로 개최된 중요한 회의였다. 8대 회의 참가자들은 건국 후 7년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계획을 세웠다.
➡류지엔후이 (중앙당교 교육연구부)
8대 회의에서 거론된 모순과 사상, 경제건설에 대한 생각은 참신하고 새로웠습니다. 사회정치 건설, 민주정치 건설, 집권당 건설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을 고려해보면 8대 회의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57년 2월, 모택동은 최고 국무회의에서 <국민 내부 모순에 대한 문제 해결 방안>을 발표한다. 사회주의 사업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을 연구해 체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이때 중국은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도자들은 앞 다투어 중국의 새로운 모습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각자의 꿈을 실현하려는 열망이 너무나 컸다. 1·5 계획의 거대한 성과 또한 정부의 지도자들에게 자만심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주관적인 생각에 빠져 경제법칙을 경시했고, 성과에 급급해 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 장기적이며 다각적인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사회주의 진영이 얻은 성과에 중국 지도자들은 신이 났다. 소련 제1서기 후르시초프는 15년 내에 미국을 앞질러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시월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모택동은 중국의 철강생산량은 15년 내에 영국을 앞지를 것이라고 장담한다.
1957년 11월 13일. 인민일보 논설에 <대약진>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한다. 빠른 성장과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대약진운동이 전국에 걸쳐 전개된다.
➡조셉 E.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
중국은 빠른 공업화와 그 방식에 대해 많은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대약진운동’과 ‘용광로 자체제작’ 등 새로운 의견 대부분은 의도는 좋았지만, 지나치게 이상적이었습니다.
고속성장은 농업분야에서도 나타났다. 1958년 전국에는 농촌 인민공사화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한 달 동안 전국 74만 개의 농업생산협동조합이 합병되어서 2만 6천 개의 인민공사가 되었다.
정상적인 경제 질서가 파괴되고 심각한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는 국민경제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다.
1960년 곡식과 소금의 생산량은 10년 전의 수준으로 하락한다.
1957년 극소수 우파는 당의 재정비 분위기를 틈타 지도자와 사회주의를 공격했다. 이는 반(反)우파 투쟁으로 번졌으며, 곤란한 상황은 확대되고 만다.
이것은 항주(杭州) 시 경춘로의 건물이다. 중국 최초로 인구증가 통제이론을 주창한 경제학자 마인초(馬寅初, 마인추 1882-1982)의 생가다. 1958년 79세의 마인초는 ‘신인구론’으로 비판을 받아야 했다. 과학적 논점과 실제 연구조사로 이루어진 이 논문에 대해 비판자들은 이것이 정치적인 음모이며, 그가 주장한 가족계획은 민족의 대(代)를 끊는 행위라고 말했다.
학문의 자유는 사라졌다. 중국의 사회구조는 변형되기 시작했다. 선진국으로 발전하려던 중국의 희망은 좌절을 맛보게 된다.
1960년, 소련은 중국과 체결한 6백 개의 계약서를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파견했던 전문가들을 모두 귀국시켰으며, 경제건설에 필요한 중요 설비의 공급을 중단했다. 때문에 250여 개의 대형건설공사가 중단되고 만다. 신중국은 유일한 조력자를 잃었고, 건국 이래 가장 힘든 시기를 맞이한다. 신중국은 발걸음의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중국의 이웃 국가인 일본은 황금시대를 맞고 있었다. 국민소득은 7년 만에 두 배를 넘어섰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했고 GNP의 증가 속도도 두 배로 뛰었다. 1968년 일본은 당시 미국과 소련의 뒤를 잇는 3번째 경제 강국이 된다.
어려움에 처한 중국. 중국은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것인가?
➡청중위엔(중국연구소 연구원)
3년간 계속된 자연재해로 국민경제는 난관을 맞았습니다. 중앙정부는 이를 해결하고자 ‘조정, 강화, 충실, 향상’ 등 8대 방침을 제의했습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중국의 경제는 점차 회복된다. 마을에서는 시장거래가 이루어졌고 농민의 개인 토지 소유가 가능해졌다. 많은 농촌에서 ‘농가생산청구제’를 통해 생산을 시작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당과 정치활동을 통한 집단지도원칙과 민주집중제 원칙도 힘을 잃고 서서히 사라졌다. 권력은 지나치게 개인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모택동은 당시 중국의 계급투쟁 상황과 정치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중앙정부가 수정주의를 제창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부활했다고 믿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통해서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판단했다.
1965년 11월 10일. 상해문예보는 신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에 대한 평가를 게재한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1966년 5·16 명령이 내려졌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의 문화대혁명은 지도자의 오판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임표(林彪, 린뱌오), 강청(江靑, 장칭) 등의 반혁명조직에 이용되었던 내란. 이는 중국 공산당과 국가와 국민에게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을 가져다주었다. 국민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민주와 법치제도는 유린당했다. 과학 기술력은 퇴보하고, 중국은 선진 국가들과 멀어졌다.
이곳은 산동성 치박(淄博) 시의 평범한 마을이다. 1968년 왕가후(王家后) 마을은 부족한 농사 일손을 해결하기 위해 방과 후 학생들을 동원해 풀을 베게 한다.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서 풀 한 근당 5리(五厘)를 지불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5리의 보수는 사람의 영혼을 빼앗는 물질만능주의라 비판받았다.
➡왕옌 (왕가후 마을 제3생산대)
당시 시골 사람들은 단순했습니다. 비료를 어디에 뿌리느냐에 따라 사상을 평가했죠. 비료를 나라의 땅에 뿌리면 사회주의를 따르는 것이고, 개인 소유지에 쓰면 자본주의 사상이라 했죠.
이는 중국민족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비극이다.
중국만의 길을 찾기 위해 이 젊은 공화국은 이렇게 고된 역경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당시에도 새로운 중국 건설에 대한 연구는 끊이지 않았다. 중국은 나름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외교 분야에서 아시아·아프리카·아랍국가와 우호관계를 쌓아갔다. 1960년대와 70년대, 신중국은 냉전 사상에서 벗어나 서방세계를 향해 걸었던 빗장을 거두었다. 그리고 더 넓은 세계를 받아들였다.
➡아키라 이리예 (하버드대학 교수)
모택동과 주은래 등 다른 지도자들도 문화대혁명의 결말을 예측했을 것입니다. 또한 미국과 소련에 대한 대항은 비현실적이란 것도 알았겠죠. 1970년, 모택동은 워싱턴에 전갈을 보냅니다.
[미국 기자 에드가 스노우 중국 국경일 행사 참석]
[미국 탁구팀 중국 방문]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 비밀 방문]
[미국 대통령 닉슨 중국 방문]
➡스치홍 (인민대학 미국연구센터)
중국과 미국 간의 냉전기류는 중국 외교정책으로 호전됩니다. 중국은 단기간에 서방 주요국 또한 그 연맹국과 외교관계를 맺었죠. 이로써 중국은 대부분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게 됩니다. 중미관계의 호전은 향후 중국의 개혁개방에 장점으로 작용했죠.
➡왕지스(북경대학 국제관계학)
비록 1949년에 건립된 젊은 중국이지만 앞으로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을 이루고, 국제적인 영향력도 확대해 가리라는 것을 미국도 느꼈을 것입니다. 비록 문화대혁명이라는 혼란을 겪었지만, 중국의 뿌리를 흔들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미국은 알고 있었죠.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4개월 전인 1971년 10월 25일. 중국은 제26회 유엔총회에서 합법적인 의석을 회복하게 된다. 후에 중국의 지도자가 되어 개혁개방을 지휘한 등소평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우리가 이러한 국제적인 환경에서 현대화 건설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은 모택동 주석의 공로다.”라고
20여 년 간의 노력. 새로운 중국은 정치의 독립 뿐 아니라 인민민주전제정치의 체제를 만들어나갔다. 인민대표대회와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당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정치협상제도, 민족자치구 자체제도 등도 확립해 나갔다. 경제부흥에 대한 노력도 이어졌고, 낙후된 농공업과 문화와 과학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중국만의 방법과 노력으로 공업체제와 경제체제를 바꾸어나갔고,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경제발전이 가능했고 과학기술의 기반도 다질 수 있었다. 일부 첨단과학기술분야에서 중대한 성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새로운 기업을 세운 지식인들의 사례는 새로운 중국에 있어 정신적 자원이 되었다.
역사는 시대마다 다른 사명을 요구한다. 모든 이들은 자신이 속한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 역사는 사람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공정하게 기록할 것이고, 앞으로의 과제를 후대에 남겨줄 것이다.
1970년대의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가져온 어려움 속에 갇혀 있었다.
중국의 국민들은 새로운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래로 나가는 길을 가리고 있는 안개를 거두어주길 말이다.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중국은 어디로 나가야 할까?
가혹한 현실과 아름다운 이상 앞에서 모든 중국인은 그 해답을 찾고 있었다.
역사의 협곡을 지나고 있는 중국이라는 배는 새로운 항해사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