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분 |
장녀 |
2녀 |
장자 |
3녀 |
4녀 |
차자 |
5녀 |
庶子 |
합계 |
노비 |
15 |
16 |
9 |
10 |
13 |
8 |
8 |
2 |
81口 |
논 |
22斗 |
15斗 |
21.5斗 |
28斗 |
24斗 |
23斗 |
22斗 |
5斗 |
160.5 |
밭 |
21斗 |
12斗 |
20斗 |
21斗 |
21斗 |
19斗 |
22斗 |
10斗 |
146 |
※ 奉祀位:노비 2口, 논 14斗, 밭 28斗
분재기에서도 나타나듯이 16세기말까지는 장자라고 해서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대체로 공평하게 나누어주었다. 한편 위의 분재기에 나타난 조상제사를 위한 봉사위는 거의 한 사람 분에 버금가는 재산으로서 대개 조상제사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특히 당시의 상속관행에서 흥미로운 것은 출가한 딸에게도 재산 상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하회의 류운룡(柳雲龍) 류성룡(柳成龍) 형제분의 어머니가 기록한 ꡔ곤문기(昆文記)ꡕ를 보아도 두 아들과 사위(딸)에게 가산과 노비를 공평하게 분할상속시키고 있다. 그 외 안동지역 대부분의 가문에서 전해지고 있는 분재기에서도 처가에서 재산을 물려받은 사위들의 서명을 흔히 볼 수 있다.
16세기만 하더라도 유교이념에 바탕 한 종법원리가 크게 확대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이른바 유교적 전통에서 말하는 “장자에게 집을 잇게 한다” 곧 “장자가 조상제사를 물려받는다”라는 관념이 덜 강했다. 이런 까닭에 당시에는 자녀들이 함께 제사를 지내거나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가 크게 유행하였다. 1671년에 작성된 천전 의성 김씨 종택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분재기를 보면, “아버지가 생전에 구전(口傳)으로 5남매에게 논과 노비를 나누어주었으나 그 수량이 정확하지를 않았다. 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머지 재산을 5남매가 균등하게 나누어 갖고 부모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기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716년에 김방걸(지례 의성 김씨)의 처가인 예천 동래 정씨 가문에서 작성한 분재기에도 “유언으로 남긴 조부모와 외조부모의 제사윤회를 제대로 지키지 않을 때는 장자 집에서 단독으로 행하는 것이 옳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관행은 16세기를 거쳐 17세기에 접어들어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특히 17세기 이후부터 적장자 중심의 종법 원리가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적장자에게 집을 물려준다는 관념이 강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윤회봉사가 사라지고 장자에 따른 제사독점상속이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또한 적장자가 조상제사를 독점하다보니 자연히 재산상속에서도 적장자를 우대하는 경향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보면 재산상속은 유교이념에 따른 집의 관념 곧 조상제사의 계승원리와 맞물려 있는 셈이다. 즉 조상제사의 계승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이에 발맞추어 재산상속의 형태가 달라지곤 하는데,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유교이념에 입각한 종법원리가 이러한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왔다.
2) 외손봉사에서 부계혈통의 양자로의 변화
후손에게 집을 계승시키려는 의지는 동성마을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집의 계승을 조상제사로 상징화되어 실천되어진다. 따라서 부계혈통에 입각한 집의 관념이 희박했을 당시에는 조상제사를 누가 지내는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상제사를 집의 계승이 아닌 조상의 사후봉양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아들이 아닌 딸도 조상제사를 지내는 일도 흔히 있었다. 특히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굳이 양자를 들이지 않고 사위나 외손자에게 제사를 물려주곤 하였다.
안동지역에도 외손봉사를 하고 있는 가문들이 상당수 있다. 이를테면 천전의 의성 김씨 가문은 해주 오씨의 외손봉사를 하고 있으며, 금계(검제)의 의성 김씨 가문은 안동 권씨의 외손 봉사, 하회의 풍산 류씨 가문도 안동 권씨의 외손 봉사를 하고 있다. 한편 외손봉사를 하는 가문들은 처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처가 터전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경우가 많다. 즉 후손이 없는 가문에서 사위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제사를 맡김으로써 외손봉사가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손봉사 역시 종법원리에 바탕 한 집에 대한 관념의 강화와 이에 따른 제사계승방식이 정착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외손봉사보다는 부계혈통의 양자를 들여 집을 잇게 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교이념이 강화되면서 집을 물려 줄 후계자(아들)가 없을 경우에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양자를 들일 때는 성씨가 다른 곧 부계혈통이 아닌 사람을 양자로 들이지 못하는 ‘이성불양(異姓不養)’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항렬과 연령의 순서를 따지는 ‘순행서치(順行序齒)’의 원칙도 지켜야 한다. 양자의 항렬이 양부(養父)의 자식 항렬과 같으면 일단 적합하기는 하지만, 양부보다 나이가 많으면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항렬과 연령을 함께 고려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천전의 의성 김씨 가문에서 행한 양자사례를 보기로 하자. 청계공파(靑溪公派)의 족보에 따르면 청계공의 장남 김극일(金克一)에게 딸만 넷이 있고 아들이 없기 때문에 아우 김수일(金守一)의 차남 철(澈)을 양자로 들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의 양자신청에 관한 문서는 1578년 1월 19일자로 작성하여 관(官)에 제출되었다. 관에 접수된 문서는 안동현감과 경상북도 관찰사를 거쳐 조정에 전달되었고, 1581년 7월 11일에 임금의 승낙을 얻어 7월 25일에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문서에는 양자를 들여야 하는 이유와 양가 부친들의 개인 이력, 양자합의에 대한 증인으로 김극일의 숙부 김수(金璲)와 김수일의 아내의 사촌 등이 기재되어 있다.
청계공파의 족보에 따르면 약 400년 동안 종택에서 행한 양자사례는 21세 김철(澈), 27세 김시원(始元), 28세 김계운(啓運), 32세 김병식(秉植)까지 모두 네 명이다. 이 가운데 김철과 김시원(당시 종손과 김시원은 13촌)까지는 경국대전의 규정대로 차남의 신분으로 들어왔으나, 김계운(당시 종손과 김계운은 5촌)은 외아들, 김병식은 작은 집의 장남 신분으로 양자로 들어왔다. 학봉파 종가에서도 11세 흥락(興洛)에게 후손이 없었던 탓에 아우인 승락(承洛)의 세 아들 가운데 장남 응모(應模)를 양자로 들였다. 그런데 응모 역시 후손이 없어 12세 응걸(應杰:응모의 동생, 승락의 셋째 아들)의 세 아들 가운데 장남 용환(龍煥)을 양자로 맞이했다. 이렇듯 종가로의 양자는 장남 심지어는 외아들이라는 신분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유교이념이 점차 강화되면서 본종(本宗)을 중시하는 종가존중에 대한 관념이 철저해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2. 종부의 안살림권
1) 종부들의 일거리
종손이 종가의 총책임을 지고 있다면 종부는 종가가 체통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여기서는 하회 풍산 류씨 서애 종택과 천전 의성 김씨 청계공 종택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흔히 아버지를 바깥주인, 바깥어른, 바깥양반이라 하며 어머니를 안주인, 안어른이라고 한다. 호칭만이 아니라 하는 일도 제각기 다른데 그야말로 바깥주인은 바깥살림을 맡고 안주인은 안살림을 꾸려나간다. 안살림이란 가족의 의식주를 돌보고 자식을 기르는 등의 주로 집안에서 해결해야 할 일을 말한다. 종가의 종부는 예사 집의 안주인에 비해 지켜야 할 격식이 많다. 이러한 종부의 막중한 임무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라는 말로 곧잘 표현된다. 서애 종택에서는 1년에 18번, 천전 종택에서는 20번 그리고 진성 이씨의 토계(土溪) 종택에서는 22번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잦은 제사만이 아니라 1년 내내 쉴 새 없이 찾아오는 손님 접대도 결코 수월하지만은 않다. 종가를 찾아오는 손님 중에는 며칠 혹은 몇 달씩 묶고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면 종가의 체통이 깎이므로 정성껏 모셔야 한다. 청계공 종택의 종부는 시어머니가 생전에 “손님 접대라는 것은 가문의 체통이 깎이지 않도록 너무 분에 넘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서애 종택의 종부는 아침에 일어나서 안채 대문을 열면서 시작되는 집안 일로 하루해가 저물었다고 한다. 사랑채에 손님이 들면 음식을 마련해야 하고 안채 손님을 맞아 대접하고 다리미질, 다듬이질, 바느질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2) 며느리에게 안방 물려주기(안방물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안살림권을 넘겨준 것을 “안방 물려주었다”라고 표현한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안살림권을 물려주면서 그 동안 거처하고 있던 안방을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건넛방으로 옮겨간다. 따라서 안방을 누가 쓰고 있는가를 살핌으로써 그 집의 안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안방을 차지하는 안주인은 이른바 ‘안방마님’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살림권을 물려주면서 방을 서로 바꾸는 것을 안동 지역에서는 ‘안방물림’이라 한다.
시어머니가 안살림권을 물려줄 때는 안방만이 아니라 반드시 물려주는 것이 또 있다. 바로 곳간열쇠이다. 곳간에는 집안 식구들이 먹을 식량만이 아니라 언제라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곡물도 저장되어 있다. 따라서 곳간이야말로 안주인이 지켜야 할 집안의 가장 실질적인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사당이 있는 경우에는 사당열쇠도 함께 물려받는다. 두 종가의 종부 역시 안방물림을 할 때 사당열쇠도 함께 건네 받았다고 한다. 또한 청계공 종택에서는 안방물림을 한다고 문중에 알린 후, 문중에서 정해준 날에 방을 바꾸었다고 한다. 안방물림을 하고 나서는 문중으로부터 논 세 마지기를 받았다고 한다. 특히 종가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안방물림을 한 후에는 반드시 문중에 알리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안살림권을 물려준다는 것은 집안 살림에서 은퇴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은퇴를 하는 나이가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부모가 환갑을 맞이할 무렵에 물려준다는 말은 있으나, 그 시기는 각 집안의 사정에 따라 다르다. 서애 종택과 청계공 종택의 종부는 첫아들을 낳고 몇 년이 지난 후에 물려받았다고 한다. 청계공 종택에서는 종부가 시집온 지 8년만에 첫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약 10년만에 물려받게 되었다고 한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종가에서도 집을 이을 후손에 대한 기다림이 상당하다. 특히 종가의 첫아들은 장래 종손이 될 인물로 문중 전체의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며느리가 아들을 낳는다는 사실은 단순히 안살림권을 물려받을 수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며느리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완전한 가족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두 종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혼인한 여성들의 지위변화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혼인을 하여 시댁으로 들어간 여성들은 일생 동안 세 번의 자리바꿈을 경험한다. 여성이 가장 먼저 차지하는 지위는 며느리로서의 학습기간이다. 이 때가 이른바 “고초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보다는 덜 맵다”라는 시집살이 기간인 것이다. 두 번째로 획득하게 되는 지위는 집안의 안주인으로서의 지위, 곧 안살림권을 장악하는 기간이다. 아들을 낳음으로써 안방물림이 행해지고 며느리는 비로소 안주인의 자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주인은 며느리가 손자를 낳으면 이번에는 며느리에게 안방을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시기로 접어든다. 이와 같이 여성이 일생동안 경험하게 되는 자리바꿈은 아들, 손자라는 집안의 후손(아들)을 출산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안방물림을 행할 때 바깥살림권을 둘러싼 아버지와 아들도 방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남성들이 거처하는 사랑채에는 큰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이 있다. 집안을 대표하는 바깥주인이 큰 사랑방에, 아들이 작은 사랑방에 거처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깥살림권을 물려주면 아들이 큰 사랑방을 쓰게 되고 아버지가 작은 사랑방으로 옮겨간다. 서애 종택과 청계공 종택에서는 여성들이 안방물림을 하면서 남성들의 사랑방 바꾸기도 함께 행했다고 한다.
3. 택호의 다양한 쓰임새
일반적으로 택호(宅號)는 ‘여성의 출신지역명(친정마을 이름) + 댁’이라는 식으로 양반 아녀자에게 붙여주는 명칭이자 호칭이다. 여자가 시집을 오면 시부모님이나 집안 어른들이 택호를 지어주신다. 만약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은 마을 출신이라면 며느리는 마을 이름이 아닌 리(里) 이름을 차용하여 짓는다. 시집 온 마을에 이미 같은 마을 출신의 여성이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뒤늦게 들어온 여성의 택호는 마을 이름이 아닌 리(里), 면(面)처럼 단위를 확대시켜 짓는다.
택호의 쓰임새는 실로 다양하다. 택호의 주인인 여성만이 아니라 그 가족이나 집을 칭할 때도 택호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성의 출신마을이 솔뫼이면 그 여성의 택호는 ‘솔뫼댁’이 된다. 이로써 그 남편은 ‘솔뫼양반’ 혹은 ‘솔뫼어른’이라는 식으로 불려진다. 뿐만 아니라 아들은 ‘솔뫼댁 큰아들․작은아들’로 불린다. 집을 칭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솔뫼댁’이라는 자체가 그 집을 가리키는 의미를 가지는데, 가령 “어제 솔뫼댁에 잔치가 있었다”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솔뫼양반네’ ‘솔뫼어른네’라는 식으로 집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집에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계실 경우에는 며느리와 비슷한 연령층에서는 며느리의 택호를 쓰고, 시어머니와 비슷한 연령의 사람들은 시어머니의 택호를 주로 사용하여 그 집을 가리킨다. 그리고 평소에는 안주인의 택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며느리가 안살림권을 물려받고 안주인으로서의 지위가 다져지면 며느리의 택호로 불려지는 것이다. 집을 가리킬 때 관직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 집의 선조가 진사(進士)였다면 그 집은 ‘진사댁’이 된다. 마을에 진사댁이 여럿 있을 때는 여성의 택호를 앞에 붙여서 ‘○○진사댁’의 식으로 구별한다.
조선시대 이후 우리 나라는 혼인을 하면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는 시집살이혼을 취하고 있었던 탓에 택호를 지을 때 당연히 변별성이 뛰어난 여성의 출신지 이름을 따르게 되었다. 이렇듯 시집살이혼의 경우 남자들의 출신지가 동일하기 때문에 전혀 변별성을 가질 수 없다. 이를테면 내앞(천전)이라는 마을에서 택호를 지을 때 남자의 출신지 이름을 따른다면 모든 집이 ‘내앞댁’이 되어버린다. 택호의 주요 기능은 변별적 기능이다. 택호가 이름 대신에 불려지는 것이니 만큼 적어도 이름에 버금가는 변별성을 가져야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외부에서 들어 온 여자의 출신지 이름을 따라야만 변별성을 제대로 가질 수 있다.
흔히 택호는 시댁에서 지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친정에서도 시집간 딸에게 별도의 택호를 지어준다. 시댁에서 지어준 택호를 ‘시집택호’라고 하며, 친정에서 지어준 것을 ‘친정택호’라고 한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여성은 두 개의 택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를 천전 의성 김씨 청계공 종택의 택호 쓰임새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시댁에서 지어주는 시집택호
청계공 종택의 종부는 와룡의 ‘외내(烏川 : 광산 김씨)’마을 출신이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외내댁’이라는 택호를 지어 주셨다고 한다. 먼저 동성집단 내에서의 쓰임새를 보기로 하자. 동성집단의 사람들은 가까운 친척이 아니더라도 항렬로서 상대와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부르는 사람(남자)이 손항렬에 해당한다면 종손을 ‘외내할배’라고 하며 종부를 ‘외내할매’라고 부른다. 자항렬의 사람들은 ‘외내아재’와 ‘외내아지매’로 각각 부른다. 종손과 항렬이 같은 경우에서 종손보다 나이가 어리면 ‘외내형님’이라 부르며 종부를 ‘외내댁’이라고 한다. 나이가 위이면 종손의 ‘자(字) + 씨’라 하며 종부를 ‘외내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종손보다 항렬이 위인 남성들은 종손의 자(字)를 그대로 부르거나 종군(宗君)이라 하며 종부를 ‘외내댁’이라고 부른다.
부르는 사람이 여성일 경우에는 마을출신의 집안 여성과 이 집안으로 시집온 여성들이 사용하는 택호가 약간 다르다. 손항렬에 해당할 경우에는 모두 ‘외내할배’와 ‘외내할매’라고 하지만, 자항렬의 경우에서 집안 여성들은 ‘외내아재’와 ‘외내아지매’라고 부르지만, 시집 온 여성들은 ‘외내아지뱀’과 ‘외내아지맴’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같은 항렬에서도 부르는 사람이 나이가 아래일 경우 집안 여성들은 ‘외내오라배’와 ‘외내형님’이라고 하는데 시집 온 여성들은 ‘외내아지뱀’과 ‘외내형님’이라고 부른다. 동항렬에서 나이가 위인 경우 그리고 항렬이 위인 경우에는 이들 모두 종손을 ‘아이이름 + 아배’라고 하며, 종부를 ‘외내댁’이라고 각각 부른다.
마을에 살고 있는 각성받이의 경우에는 항렬을 따질 수 없는 탓에 주로 연령이 기준이 된다. 부르는 사람의 연령이 동생, 아들, 손자뻘에 해당하면 ‘외내어른’과 ‘외내댁’이라고 부른다. 형님뻘이라면 ‘외내양반’과 ‘외내댁’이라는 택호를 사용한다. 아버지뻘에 해당하는 사람의 경우 만약 지체가 대등하다면 ‘이름이나 字’로 종손을 부르고, 종부를 ‘외내댁’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르는 사람의 지체가 낮은 경우에는 ‘외내양반’과 ‘외내댁’이라고 부른다.
2) 친정에서 지어주는 친정택호
일반적으로 친정에서 시집간 딸을 부를 때는 사위의 성(姓)에다가 실(室)을 붙여서 ‘김실아’라는 식으로 부른다. 그런데 사위가 여럿 있으면 성씨가 같은 경우도 많고, 또한 친정의 집안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김실이’라는 호칭은 더욱 변별성을 갖기 힘들다. 친정에서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방지하기 위해 시집간 딸들에게 사위의 출신지 이름을 차용하여 택호를 지어준다. 앞서 예로든 외내댁은 내앞이라는 마을로 시집갔기 때문에 친정에서는 ‘내앞김실이’가 되는 것이다. 사위도 마찬가지이다. ‘김서방’이라는 호칭대신에 자신의 출신지 이름이 차용되어 ‘내앞김서방’으로 불려진다.
그런데 ‘김실이’라는 호칭은 집안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것이며 그 외의 마을사람들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외내댁은 친정마을에서 ‘내앞댁’으로 불려진다. 즉 외내댁은 친정인 외내마을에 가면 ‘내앞댁’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외내댁은 내앞댁이라는 또 하나의 택호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사위 역시 처가의 집안 사람들 외의 마을사람들로부터 ‘내앞새양반’ ‘내앞새서방’ ‘내앞어른’ ‘내앞새손님’이라는 택호로 불려진다.
이와 같이 여성의 친정에서 사위의 출신지 이름을 따와서 택호를 짓는 이유는 시집에서 며느리의 출신지 이름을 빌어와서 택호를 짓는 이치와 동일하다. 친정마을 입장에서 보면 사위가 들어 온 사람이기 때문에 사위의 출신지 이름을 차용해야만 변별성을 제대로 가지기 때문이다. 만약 외내마을에서 시집간 여성들의 택호를 지을 때 “택호는 여성의 출신지 이름을 따온다”라는 일반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외내마을에서 출가한 모든 여성들의 택호가 ‘외내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3) 택호를 이용한 친족호칭
택호의 변별적 기능은 친족호칭에서도 발휘되고 있다. 이를테면 안동지역에서 숙부를 ‘아재’라고 하는데, 숙부가 여럿 있을 경우 큰아재와 적은아재로 구분된다. 그런데 큰아재는 한 명이지만 적은아재는 여러 명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숙모의 택호 + 적은아재’라는 식으로 구분을 한다. 이런 식으로 택호가 모든 친족호칭 앞에 붙을 수 있다. 즉 해당친족관계에 속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탓에 친족호칭만으로는 변별성을 가지지 못할 경우에 모두 ‘택호 + 친족호칭’으로 불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고모를 부를 때이다. 고모가 여럿 있을 경우 요즘에야 첫째고모, 둘째고모라는 식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원래는 ‘택호 + 고모(원래 안동지역에서 고모는 아지매라고 함)’라고 불러야만 한다. 그러나 고모들의 출신지는 모두 내앞마을이다. 따라서 ‘내앞고모’라고 한다면 모든 고모들이 ‘내앞고모’가 되어버리는 격이다. 이런 경우에는 고모가 시집을 간 지역 곧 ‘고모부의 출신지 이름 + 고모(아지매)’라고 부른다. 고모부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고모의 출신지 이름을 따르지 않고 ‘고모부의 출신지 이름 + 고모부(새아재)’라고 해야 한다. 이모도 예외는 아니다. 이모의 출신지는 어머니와 동일한 외내마을이다. 따라서 모든 이모들이 ‘외내이모’가 되어 버리는 탓에 이럴 때에도 ‘이모부의 출신지 이름 + 이모(아지매)’라고 부르고, 이모부도 ‘이모부의 출신지 이름 + 이모부(새아재)’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택호는 여성의 시댁, 친정에서 각기 지어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친족호칭에까지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처럼 택호가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은 택호가 가지는 변별적 기능에 기인한다. 즉 호칭사용에서 보다 높은 변별성을 지니기 위하여 시댁에서는 며느리의 출신지, 친정에서는 사위의 출신지, 친족 호칭에서는 변별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친족)의 출신지 이름을 차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흔히 알려져 있듯이 “택호는 여성의 출신지 이름으로 짓는다”라는 일반적 견해는 “시집살이혼을 취하는 경우에는…”라는 전제를 달아야만 통용될 것이다.
4. 문중이라는 거대혈연조직
동성집단의 친족조직 가운데 가장 거대한 조직이 문중이다. 문중은 동성동본의 남자라면 누구나 소속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 때문인지 같은 문중에 속해 있어도 평소 면식이 없는 탓에 촌수를 따지지 못할 경우도 많다. 이처럼 단순히 성과 본이 같다는 이유로 혈연적 친밀감을 느끼므로 그야말로 문중은 거대 친족조직체라고 할 수 있다.
사대봉사원리에 따른 고조부모까지의 제사는 당내(堂內) 종손의 위토에서 충당하지만 그 이상의 조상 제사는 별도의 경비를 필요로 한다. 이에 따라 후손들이 계를 모아 재산(토지)을 마련하고 이 재산을 묘전(墓田)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계를 종계(宗契) 혹은 문계(門契)라고 하는데, 종계가 발달한 것이 바로 문중(門中)이다. 그러나 종계가 문중이 되려면 파시조나 입향조와 같은 상징적 인물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종계와는 달리 문중은 경제적 기반만이 아니라 특정 시조와 뚜렷한 조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문중을 종중(宗中)이라고 불려지기도 하며 성과 본이 같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문중을 부계친족의 최대 범위라고 한다면 고조를 중심으로 한 8촌 범위의 당내는 동성집단 부계친족의 최소 범위라 고 할 수 있다.
문중은 크게 대문중과 파문중으로 가를 수 있다. 대문중은 파문중의 상위에 있다는 의미에서 대문중이라 한다. 대문중은 성씨의 원시조(原始祖)를 중심으로 하는 경우와 파시조의 상위 조상을 중심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의성 김씨의 경우 시조 석에서 8세까지의 인물들의 내력은 분명하지 않다. 족보에 확실한 시조는 9세에 해당하는 용비(龍庇)이다. 따라서 9세 용비를 중심으로 한 문중이 대문중이 되는 것이다. 풍산 류씨의 경우에는 시조부터 9세까지의 조상을 위하는 문중을 대문중이라 한다. 대문중은 파문중에 비해 실제적인 행사나 조직이 빈약한 편이다. 대문중의 재산으로는 위토, 묘소, 재실 등이 있으나, 이러한 재산은 파문중의 공평한 출자로 마련한다. 그리고 대문중의 운영도 각각의 파문중에서 선출된 사람들에 의해 공동으로 행해진다.
안동에서 흔히 문중이라 할 때는 파시조를 중심으로 한 파문중을 말한다. 즉 문중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이 바로 파문중인 것이다. 파문중은 재산과 조직에서 서로 독립적인 집단으로 존재한다. 보통 하나의 동성집단은 여러 개의 파문중을 형성하고 있다. 의성 김씨의 경우에는 총 49개의 파를 형성하고 있으며 풍산 류씨는 12개의 파를 갖고 있다. 파가 다를 경우에는 일상적인 교제는 불천위 제사, 시사 등과 같이 파를 초월한 문중행사 외에는 별로 없다. 따라서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서로 마주치어도 일가(一家)라는 인식만 있을 뿐, 타인과 거의 다름없다.
문중이 하나의 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기 위해서는 이를 대표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문중의 대표자를 문장(門長)이라고 한다. 문장은 학덕을 겸비한 원로 중에서 한 사람이 선출된다. 그리고 문장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유사(有司)를 보통 2명 둔다. 유사의 한 사람은 제사를 담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재산을 관리한다. 원래 문중은 조상 제사를 봉사하기 위해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조상제사는 문중의 가장 으뜸가는 역할이다. 특히 파를 초월한 전체 문중을 단위로 하는 불천위 제사와 시사는 문중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고 성원들의 단결을 도모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문중의 또 다른 역할은 족보를 편찬하는 일이다. 족보에는 대동보(大同譜)와 파보(派譜)가 있다. 대동보는 동성집단 전체를 시조에서 지손까지 나타낸 것으로 대개 한 권으로 되어 있다. 파보는 동성집단에서 갈린 파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며 후손이 번성한 경우에는 여러 권으로 편찬되기도 한다.
5. 동성마을의 혼인과 혼반
예로부터 성이 같고 본이 같으면 혼인을 할 수 없다는 ‘동성불취(同姓不聚)’의 원칙이 있어 왔다. 따라서 동성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양반들은 자연히 배우자를 외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동성마을에도 각성받이가 많이 살고 있다. 그러나 동성마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혼인을 보면 그 집안 지체를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어느 가문과 혼인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고 있다. 이른바 ‘걸맞는 혼처(婚處)’를 찾아 혼인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성받이가 한 마을에 살고 있어도 가문의 격(格)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성마을 양반들의 혼인은 안(內)이 아닌 밖을 향하게 된 것이다.
걸맞는 혼처라는 것은 이른바 ‘양반은 양반끼리’ 혼인을 해야 어울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격이 비슷한 집안끼리 혼인을 하다보니 자연히 특정 집안과의 혼인관계가 누적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것을 ‘혼반(婚班)’이라 한다. 즉 혼반이란 ‘대등한 지체를 가진 양반층의 누적된 혼인관계’라고 할 수 있다.
진성 이씨 퇴계파(退溪派) 종가를 중심으로 친가, 외가, 처가의 혼인관계를 정리한 조강희에 따르면, 135쌍이 65개의 문중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으며 100쌍이 30개의 문중과 거듭되는 혼인을 하고 있다. 즉 혼인을 하는 상대가 상당히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54쌍의 혼인은 진성 이씨, 풍산 류씨, 의성 김씨, 재령(載寧) 이씨, 진양(晋陽) 정씨, 성산(星山) 이씨, 청주(淸州) 정씨, 옥산(玉山) 장씨, 월성(月城) 최씨, 여주(驪州) 이씨 등 10개의 문중에 집중되어 있다. 서로 지체가 비슷한 배필을 찾아 혼인을 하려다보니 자연히 혼인상대도 제한되어 버린다. 그리고 제한된 상대 가운데서 혼인을 하려니 결국에는 몇몇 문중과 거듭되는 혼인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동성마을 혼인의 또 다른 특징은 학통(學統)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의성 김씨의 16세 김한계(金漢啓)에서 22세 김시온(金是榲)까지의 혼인을 살펴보면, 진성 이씨와 잦은 혼인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한계의 동생 김한철(金漢哲)은 이식(퇴계의 부친)의 장인으로 퇴계의 외조부가 된다. 김한계의 둘째 아들 김만신 역시 이계양(퇴계의 조부)의 사위이다. 또한 김한철의 증손녀는 퇴계의 질부(姪婦)가 되며, 김진의 손자 김용(金涌)은 퇴계의 손서(孫壻)이다. 학봉 김성일의 손자 김시추(金是樞)는 퇴계의 증손서이다. 뿐만 아니라 의성 김씨는 진성 이씨를 비롯하여 안동 권씨, 전주 류씨, 광산 김씨와의 잦은 혼인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 가문들은 모두 퇴계 문인으로서 학문적으로 서로 사우(師友)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동성마을에 가면 ‘길반(吉班)’ 혹은 길혼(吉婚)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혼인한 부부가 서로 장수하고 훌륭한 자손을 많이 낳아 가문을 빛내게 할 경우 그 문중과의 혼인을 ‘길혼’이라고 하며, 이에 해당하는 가문들을 ‘길반’이라고 한다. 따라서 길혼으로 여겨진 문중과 혼인을 되풀이하다보니 이른바 혼반이라는 것이 형성된 것이다. 이와 반대로 특정 문중과 윗대부터 혼인을 많이 해 왔지만 자손이 귀하고 남편이나 부인이 일찍 죽거나 하면 그다지 좋은 혼처로 여기지 않는다. 이런 문중과는 자연히 혼인을 꺼려하게 된다.
출처 : 안동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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