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10월28일주일설교.hwp
2007.10.28 온고을교회 주일설교(황의찬전도사)
거래 관계냐 은혜 관계냐?
창18:1~15
우리 속담에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이 있다. 낯선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에 그냥 소 닭 보듯 하면 편하다. 그러나 이 속담은 그야말로 소나 닭들 사이에서 통용되어야 할 태도이지 사람이 사람을 보는 자세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가?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한다. 아브라함이 낯선 사람들을 응대하는 자세를 예시함으로써,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교훈하신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요즘 화두가 되는 친절-서비스의 당위성을 제공하는 원전(原典)이다.
아브라함이 점심 무렵 문간에 기대어 잠깐 쉬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껴 눈을 들어보니 낯선 사람 셋이 와 있었다. 요즘 같으면 의당‘자기네들의 용건이 있으면 무슨 말이라도 하겠거니!’했겠지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는가?
첫째, 그는 달려 나가 영접하면서 몸을 땅에 굽혔다. 요즘의 우리 시각으로 보자면 필요 이상으로 지나칠 만큼 깍듯한 예우를 갖추고 있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이것이 「사람이 사람 보듯 하는 것」이 아닐까?
둘째, 초면임에도“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면 나도 그에 상응한 것을 베풀겠다는 현대인들의 각박한 실상을 반추하게 한다.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이렇게 마주친 사람 사이가 추후에 서로 은혜를 입고, 은혜를 끼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셋째,“휴식을 취하고 계시면 떡을 조금 가져올 터이니 요기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나그네 길을 가시라”고 권한다. 이 말은 상대방이 큰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이다.
넷째, 제왕에게 대접하는 수준으로 음식을 준비해서 차려 내온다. 제자들에게“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라고 정의하는 베드로의 언급이 연상된다.(벧전2:9)
다섯째, 나그네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아브라함은 그들의 뒤에 부복한다. 마치 최상급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한 팔에 넵킨을 걸고 정중하게 고객을 섬기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요즘 이런 서비스를 받으려면 대단히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지만, 본디 이것은 무상으로 거래되어야 하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임을 보여준다. 소가 닭을 보는 태도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이렇게 엄청나게 다르다.
이 시점까지 아브라함은 이들 나그네 세 명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히13:2에서 풀이한 것처럼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들을 접대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도 이런 이치를 말씀하신다.(마25) 마지막 심판 날 복 받을 자들에게“창세 때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으며,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었노라”고 회상하자, 이들이 의아해 하면서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대답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행하여야 할 서비스의 당위성이고, 또한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다. 이 축복의 전제가 바로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말씀인데, 사람들이 다른 사람 대하기를 엉터리로 하고 있는 현실에 빗대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음식을 다 먹고 난 후에야 이들의 신분이 서서히 드러난다. 숟가락을 놓으면서“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9절)고 묻는데,‘아무개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하나님 전용의 관용구이다. 창3:9에서의“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4:9의“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를 연상하는 이 질문에서 나그네들의 신분이 점차 드러난다.
그리고 천사들은 사라가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을 것을 17장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천명한다. 이때 사라는 장막 뒤에 서 있다가 속으로 웃었다. 천사들은 장막 뒤에서 웃은 사라의 행동을 훤히 아시고 당사자가 아닌 남편 아브라함에게 힐책하시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일깨운다.
태어날 아들의 이름이‘웃음’즉, 이삭인데, 사라는 두려워서 자신이 웃지 않았다고 변명하면서 부지중에 장차 태어날 아들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다. 낯선 나그네 대접이‘웃음’으로 결말지어진다는 해피 앤딩 구도가 또한 괄목할 일이다. 초면의 손님에게 이렇게 대접하는데, 어찌 서로 간에 기쁨과 은혜가 오가지 않을까?
이쯤에서 본문의 순서를 우리에게 익숙하도록 편집해 보기로 하자.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신분을 모른 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대접을 하고, 나그네들은 음식을 다 먹은 후에야 신분을 드러내고 용건을 말한다.
이것을 나그네 세 사람이 천사라고 신분을 먼저 밝히면서 내년에 태어날 아들 이삭에 대한 예언을 하고, 그에 감격한 아브라함 부부가 극진히 음식 대접을 하는 것으로 바꿔보자! 사실 이렇게 되어야 현대인들에게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렇게 재구성하고 보니, 이는 상대가 대단한 지위에 있는 분인 줄 알고 나서, 또 그들로부터 엄청난 선물을 받았으니, 아브라함과 사라는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향응을 제공한 것으로써, 흔히 있는 거래에 지나지 않는‘조건 반사’사건의 기록으로 그치고 만다.
이것은 서비스가 아니라 비즈니스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이런 순서는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거래 관계 속에 있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은혜 관계 속에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런 때, 우리로 하여금, 일단 사태를 지켜 본 다음 그 사람을 평가하여 그 수준에 맞는 격식과 예우를 하고, 그들이 가지고 온 선물의 경중에 따라 그에 걸맞게 대접하는, 잇속에 따른 계산으로 살기보다, 은혜 관계로 살도록 해 놓으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차 자기 본위로, 이기적으로, 피폐해져 가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뒤집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성경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본문은 웅변으로 깨우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