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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지금처럼 사랑이 흔하지 않던 그 시절....
버림받은 여인의 대명사로 불리던
안타까운 여인이 있었다.
바로....
천관녀다.
천관녀....
그러나 아직도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술을 팔던 천한 기녀로 알려져 있다.
1500년 전....
목숨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천관녀
그리고 그 상대는 바로 당대의 명장 김유신이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
모두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술에 취한 김유신이 말을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 도착한 곳은 사랑하는 여인 천관녀의 집.
결국.. 김유신은 자신을 그곳으로 이끈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만다.
김유신....
그는 왜 그토록 단호하게
천관녀를 버렸던 것일까?
오래 전부터 내 궁금증을 잔뜩 자아냈던 그 이야기....
이제.. 내가 아는 그들의 사랑과 야망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어쩌면 보다 각박하고 냉랭한 이 시대에
또 다른 거울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1. 인간 김유신
신라의 장군이자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실제로 사서에 남은 각종 기록만 보더라도
김유신은 다른 어떤 역사적 인물보다 그 양이 방대하다.
< 김부식의 삼국사기 >
정통역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모두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10권이 인물들의 전기를 기록한 '열전'이다.
거기엔.. 궁예, 견훤, 장보고, 연개소문 등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의 전기가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 무려 3분의 1에 해당하는 3권 분량이
바로 김유신의 열전이다.
이렇게 적지 않은 기록이 남아 있다보니
김유신에 대해서는 워낙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영웅 김유신의 모습일 뿐
솔직한 인간 김유신.....
그러니까 그가 팔십 평생 동안 어떤 고민을 하고 또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 김유신 영정 >
김유신....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명장 김유신에 대한 많은 기록 중
그의 인간적인 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면
단연 천관녀와의 사랑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천관녀....
그녀는 김유신이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천관녀의 집앞으로 이끈 말의 목을 벨 정도로
그는 모질게 천관녀를 버린다.
이 비극적이며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
그러나 그속엔 인간 김유신이 80평생 동안 겪어야했던 인간적인 갈등
그리고 쉽게 넘어설 수 없었던 그 시대의 고뇌가 함께 담겨져 있다.
우선.. 인간 김유신과 천관녀는 어떻게 만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했는지
1500 여년 전..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만나보자.
2. 1500년 전의 사랑
지금의 경주시 도당산 기슭....
그곳엔 세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절터 하나가 있다.
바로.. 폐사지인 천관사지....
신라시대 사찰로 알려진 이곳은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도 뜬구름처럼 전해지고 있다.
지난 1970년대....
농부들에 의해 밭이었던 이곳을 논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뜻밖의 유물들이 대거 발굴되었던 것.
그리고 그 이후에도 농부들에 의해
중요한 유물들이 여럿 발견되곤 했는데
2000년대를 넘어서며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
천관사라는 절 이름....
그것은 김유신을 그리워하다 죽어간 천관녀를 위해
유신이 절을 짓고 천관사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천관녀와 가까운 사람들이 그 애닯은 사연을 듣고
그녀를 기리고 달래기 위해 천관사라 이름 지었다는 설도 있다.
이런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이야기는
3권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고려중엽 이후
그러니까 한참이나 후대에 쓰여진 것들이다.
책에 남아있는 내용들은 모두 비슷하다.
그 중 김유신과 천관녀의 만남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하루는 우연히 계집종의 집에 유숙하였다' ..라는 한 줄의 기록 뿐이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기록은
마치 중간은 모두 지워진 것처럼
급작스레 두 사람의 헤어짐에 대해서다.
어느날.. 김유신을 마주한 어머니는
더 이상 천관녀를 만나지 말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그러자 김유신은 어머니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한다.
기록에 남아있는 사랑 이야기는
뜻밖에도 이렇듯 간단하다.
하지만 그 길지 않은 기록속엔
두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 술에 취한 유신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말이 옛길을 따라 천관녀의 집앞으로 갔다. ' ..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다.
당시의 김유신....
사회적 지위로 볼때
한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또 부리던 말도 저절로 그 집을 찾아갈 만큼
그들의 사랑은 이미 오래였고 당연히 뜨거웠을 것이다.
단지.. 말 한마리를 통해서도 사랑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었던
신라인들의 문학적 깊이와 비유에 감탄할 따름이다.
그러나 결국 그 만남은....
최후의 만남이 되고 말았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있듯
김유신은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고 돌아선 것이다.
그후....
김유신에게 버림받은 천관녀는
머리를 깍고 평생 홀로 살며 유신을 위해 기도하다
쓸쓸히 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이런 비극적인 사랑에 대한 기록의 마지막엔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오릉 동쪽에 천관사가 있으며
그 절이 천관녀의 집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의 천관사지 자리이다.
< 2004년 가을 천관사지.. 이해해라. 이때는 이렇게 찍으면 뽀대나는 줄 알았다. -_-;; >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다
고려 중엽에 와서야 비로서 기록으로 남게된 사랑 이야기의 실체.... .
그것이 발굴작업이 진행되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발굴작업이 진행되면서
그곳이 분명한 절터였음을 짐작케하는 유물들이 계속 발견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탑이다.
탑재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천관사지 곳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외에도....
발굴작업을 통해 발견된 유물들이
지금은 국립 경주 문화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게 지금까지 천관사지에서는
모두 17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유물들 중
김유신이 살던 7세기의 유물들이 있다면
김유신과의 관련성을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단지 설화가 아닌 사실로서의 관련성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들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신라 가야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기마인물형 토기였다.
< 천관사지 출토 기마인물형 토기 >
이 토기가 주목을 받은 이유.....
그것은 이 기마인물형 토기가 이전의 토기들과는 명확히 다른
새로운 특징 하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확인이 가능하듯
발앞 부분에 발걸이가 새겨져 있었던 것.
이런 특징은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5-6세기 기마인물형토기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발걸이는....
기마인물형 토기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경주 황오동 고분에서 유사한 모양의 유물이 발견 되었는데
바로.. 7세기에서 8세기의 것이다.
그러므로 천관사지의 토기 또한 김유신이 살던
7세기의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이외에도....
7세기의 유물들은 또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기와다.
천관사지에서 발견된 기와중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바로 습비(習比)다.
그리고 경주박물관에서도
이와 유사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안압지에 출토된 기와들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바로 습부다.
뿐만 아니라 안압지에서 출토된 또 다른 기와엔
한(漢)이라고 새겨져 있다.
< 안압지 출토 기와.. 습부라는 글이 보인다 >
도데체 이 글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경주의 행정구역은 모두 6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각각의 이름들을 보면....
급량부(及梁部) 사량부(沙梁部) 본피부(本彼部)
점량부(漸梁部) 한지부(漢祗部) 습비부(習比部)
그렇다.
기와에 새겨진 습비(習比)라는 글씨
그것은 바로 이 6부의 이름중 하나로
기와를 만들어낸 생산 지역을 표시했던 것이다.
즉.. 습비라는 것은 신라의 6부 가운데 습비부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안압지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 습부라고 새겨진 기와들
그것은 습비부에서 만들어져 안압지의 기와로 사용되어진 것이다.
이런 습비부라는 이름은 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고 있다.
그 외에 7세기를 대표하는 유물들을 살펴보면
나는 말이 새겨진 천마기와가 있고
7세기 양식의 금동불상이 있다.
이렇게 김유신이 살던 시대인 7세기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천관사지는 김유신과 분명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정 되어진다.
그런데....
정작 김유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특별한 유물
그것은 따로 있었다.
불국사 석굴암등 경주문화재 연구에 관한한
국내 최고권위자중 한 사람인 황수영 박사
그가 우연히 손에 넣게된 석편이다.
< 대태각 석편.. 가운데 태(太)는 명확하며 위아래 남은 모양으로도 대태각이 확실하다 >
직사각형 모양의 석편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하지만 글씨를 새겼던 흔적만은 확실히 남아 있다.
석편에 새겨진 원래 글씨는
바로.. 대태각간(大太角干).... .
이는 신라의 최고관직인 태대각간과 같은 의미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리던 관직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김유신이 태대각간의 자리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대태각을 얻은 사람은 김유신 한 사람뿐이었다.
이렇게 천관사지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해
1500년 전의 사랑 이야기
그것이 단지 설화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3. 천관녀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김유신과 천관녀가 만난 건 언제였을까?
두사람이 만난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소시적이라고만 표현되어 있는데
소시적.. 말 그대로 풀이해서
소녀시대가 아니고 -_-;;
어렸을 때 또는 젊었을 때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김유신의 청년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확히 언제쯤일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이 화랑이 된 건 15살때 일이다.
그리고 17살에 단석산의 중악 석굴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무술을 연마한다.
컴터가 없던 시절이니
어두컴컴한 동굴속에서 야*-_-*동 따위를 보지는 않았을 테고
어린 연세에 제법이다. -_-;;
암튼..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빈번한 침입으로
상당히 위태로운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조국 신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김유신은
중악 석굴에 들어가 심신을 단련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해인 18살에
김유신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의 자리에 오른다.
좋겠다. -_-
그러니까 15살에 화랑이 되고
17살 이후엔 무술을 연마하고 마음을 닦는데에만 열중했으니
그 사이인 16살 즈음에 천관녀를 만났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16살이라....
요즘으로 치면 사춘기
충분히 방황할 연세셨다. -_-;;
그런데 질풍노도의 시기로 표현되는 그 혼란한 나이에
어떻게 그리도 단호하게
사랑하던 여인 천관녀를 버릴 수 있었을까?
다시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어머니의 반대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어느날....
어머니는 김유신을 앉혀놓고....
" 공명을 세워 군친의 영광이 되어야하거늘 지금 너는 술을 파는 아이와 함께
음방에서 유희를 즐기며 술자리를 벌이고 있구나. " ..라고 야단을 친다.
큰 뜻을 세워 실행해야 하는데
술을 파는 기생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최근 이 기록에 대한 의문들이 여럿 제기되고 있다.
천관녀는 기녀가 아니라는 주장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천관녀....
과연 천관녀는 술을 파는 천한 여인이었을까?
아니.. 천관녀는 누구였을까?
천관녀는 기녀가 아니라는 주장....
그 가장 주된 이유는.....
바로 천관사가 있는 특별한 위치 때문이다.
< 2005년 10월 경주 도당산 >
그지같은 ↑저 사진에서 보듯 도당산은
천관사 뒷편에 자리한 야트막한 동산이다.
신라시대....
과연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 남쪽에 정청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궁의 남쪽이면 곧 월성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이 자리가 궁궐의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도당을 베풀던 즉 도당정치를 행하던 곳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시대....
귀족들이 모여 정사를 논의했다는 것은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의미한다.
신라시대..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면
꼭 사령지라는 게 있었다고 전해진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행할 때는
아무데서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성한 곳에서 제사와 같은 신령스런 의식을 행했다는 의미였다.
실제 경주의 지리지인 '동경통지'를 보면
신라시대 정사를 논의하던 곳은 매우 신령스러운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도당산은 경주부 남쪽 5리에 있었는데
신라는 왕의 즉위의례를 반드시 이곳에서 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까 왕이 즉위한 뒤
신께 제사를 올리는 즉위의례를 도당산에서 했다는 기록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신궁의 제사기록을 살펴보면
모든 제사가 왕이 즉위한 다음 해에 거행되었다.
이는 신궁에서 즉위의례가 거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도당산에 신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그 밑을 보면
사제사.. 천관사.. 천은사가 있었다고 각각 기록되어 있다.
바로 하늘과 관련된 절터가 있고
천관사.. 천은사.. 사제사 등등이 도당산성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신라에 불교가 확산되고 자리잡기 이전
신라 고유의 토착신앙이 행해진 그 중심의 위치가
바로 도당산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천관사지 근처가
당시 토착신앙의 중심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유적이 있다.
바로.. '사제사지' 다.
지금은 주춧돌외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신라시대.. 그곳엔 사제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사제사터에서 발견된 기와와 돌들이
그곳이 옛절터였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 곳엔 매우 특별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사제사(四祭寺)가 새겨진 암막새 >
사제(四祭)....
바로.. 네 번의 제사를 지내는 절이라는 의미이다.
네 번의 제사에 대한 기록 또한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신라의 건국시조인 박혁거세의 사당에서
1년에 네 번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사제는.. 바로 시조신을 모시는 국가적인 의식이었던 것.
사제란 결국 넉사자에 제사할 제자이다.
그건 봄 여름 가을 겨울 1년에 네 번 제사를 지냈다는 의미이고
결국.. 토착신앙의 중심 사당이었던 이 사제사와 천관사가
나중에 이르러 강력한 국가 이념인 불교적인 것으로 바뀌며
'사당'이 하나의 '절'처럼 변형되어 불렸던 것이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당시 신라의 수도인 경주....
그 중심부에 있던 천관사 근처에는
국가의 중요한 제사를 지내던 신궁이 도당산에 위치해 있었고
사제사라는 신성한 사당이 있었으며
신라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이 있었다.
그리고 천은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신라초기 왕들이 묻힌 오릉이 있었고
왕의 우물이었던 왕정골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대로 신성하고 신성한 곳에
과연 일개 기녀가 술을 팔며 살던 집이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더욱 짙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천관녀라는 그 특별한 이름이다.
천관....
말 그대로 하늘의 관리라는 뜻이다.
천관이란 중국 주나라에서 6관의 하나였다.
천관.. 지관.. 춘하추동 6관이 있었으며
그 중 천관은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든다.
모계질서를 이미 벗어나 고대국가의 틀을 갖춘 당시
여성이 제사에 관여할 수 있었을까?
삼국사기에 보면 시조신 박혁거세를 모시는 제사를
박혁거세의 친누이인 아노가 주관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여성이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화랑의 기원을 통해서도
여성이 제사에 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
화랑의 전신.. 그것은 원화였다.
진흥왕 37년 원화를 뽑았는데
남모와 준정이라는 여성이었으며 이들은 제사를 담당했었다.
그러니까 처음 화랑의 전신인 원화는
주로 제사를 담당하는 일을 행했었고
이후 전쟁이 가속화되면서 전쟁에서의 승리와 무운을 빌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차츰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어 갔을 것이다.
결국.. 원래 제사는 주로 여성이 담당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 37년부터
여성 대신 남성을 뽑고 그 이름도 원화가 아닌 화랑이라고 명명한다.
자!!
이제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볼때
우리는 새로운 가설 하나를 세울 수 있다.
그동안 기녀로 알려진 천관녀.... .
사실 그녀는....
제사를 담당했던 여사제였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이다.
천관녀 그녀는....
세간에 퍼져 있는 이야기처럼
한낱 술을 팔던 천한 기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4. 의문의 연속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도데체 왜.. 천관녀를 기록한 3권의 역사서에서는
그녀를 모두 기녀로 기록한 것일까?
그 의문은 의외로 어렵지 않게 풀렸는데
사학을 전공한 누이가 단 번에 대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록 한 때일 망정 무언가를 전공하고 깊이 있게 공부한다는 것은
나 같은 뜨내기가 열과 성을 다해 찾고 뒤집어도 쉬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인스턴트 커피 한 잔 뚝딱 만들어내듯 손 쉽게 해결해 버리기도 한다. -_-;;
그러니....
제발 어줍은 지식으로 무장한 채
어디가서 아는척 쉬 자랑질 하지 말아야 한다.
숨은 고수들에게 개웃음 내지는 개무시 당한다. =_=
< 개 -_- 무 -_- 시 >
암튼....
몇 날 며칠을 컴 앞에 앉아
마치 심한 변비 걸린 사람처럼 끙끙거리며 고생하던 내게
실없이 웃으며 지나치던 누이가
툭 던진 그 한마디.... .
" 그거.. 그땐.. 원래 그랬어 " -_-
" .................................. . " -_-;;
그렇다.
그땐 그랬었다.
기녀 즉 기생의 기원이
바로 여사제였기 때문인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국가시절.... .
그러니까 제정일치 시절엔
비록 절대 권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하더라도
여사제는 최고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러다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는 제정분리시대가 되면서
그 지위가 점점 낮아져 여사제는 대부분 상징적인 존재에 그치고 말았다.
더욱이 그 책들이 쓰여진 시기는 고려말과 조선시대이기에
유교적인 이념으로 가득한 사관의 관점에서
당연히 여사제를 낮게 평가해
단지 기녀 정도로 속되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자 또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슨 스무고개도 아니건만
왜 이리 의문들이 자꾸 꼬리를 무는지 원.... .
암튼....
기록에 의하면
유신의 어머니가 천관녀와의 만남을 반대했던 이유
그것은 분명 기녀와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천관녀가 기녀가 아니라면
천관녀와의 만남을 반대한 진짜 이유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
마치 풀기 힘든 실타래 같은 그 의문의 해답
그것을 찾아보자.
5. 출신배경.. 그 지우지 못하는 흔적.... .
김유신의 어머니는 왜 그토록 천관녀와의 만남을 반대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인간 김유신'이 간직하고 있던
결코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자 상처이며 흔적이었던
출신배경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거진천'이라고 불리는 살기 좋은 땅
바로.. 충청북도 진천읍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접경지역으로
삼국간의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이다.
그곳 진천읍 상계리의 계양마을
거기에 뜻밖의 유적이 남아 있다.
바로.. 김유신이 태어났던 집터.. 생가다.
< 김유신 생가 - 출처 '생거진천' >
신라의 수도 경주가 아닌
당시 위험한 변경지역이었던 진천에
김유신의 생가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김유신 가문의 출신배경에 있다.
김유신....
그는 금관가야국의 왕족 후예였다.
법흥왕 19년 금관가야의 구해왕이 가족을 데리고 투항해 왔는데
그 구해왕의 증손이 바로 김유신이었던 것.
이렇게 신라에 복속된 구해왕은
상등의 관위를 받는데 이때 상등의 관위는 높은 직위를 의미한다.
즉.. 당시 김유신의 가문은
왕족인 성골이 아닌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당시 신라는 매우 엄격한 신분사회로
성골.. 진골.. 육두품.. 오두품 등으로 신분을 구분해 놓았는데
신분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관등과 관직이 철저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신라의 신분제도가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는데
바로 시대를 초월한 명문장가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12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데
6두품의 신분으로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에서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신라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한계와 회의를 느껴
아예 신라를 떠나버린 사람도 있었다.
우리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바로 '설계두(薛罽頭)'라는 낯선 이름이다.
신라의 6두품 출신이었던 설계두.....
그는 속박이나 다름없는 골품제하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믿고
오늘날 이민과 같은 형식으로 당나라를 향한다.
그렇게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다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때 참여하게 되는데
결국 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그의 용맹한 일화와 죽음을 전해들은 당태종이
손수 어의까지 덮어주며 누구냐 묻자
신하들은 신라의 설계두라 답하였고
후에 그는 대장군에 포상되는 일화를 간직하게 된다.
모두....
골품제라는 제한적이고 속박된 제도가 만들어낸
서글픈 이야기들이다.
한편.. 신라에 복속된 김유신 가문은
신라 최고의 신분중 하나인 진골귀족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같은 진골귀족이라 해도
그들은 신라의 정통 진골귀족 집단과는 달랐다.
어느 집단이고 또 어느 사회고
새로운 집단이 기존집단에 편입될 때에는
배타성이 작용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그 예를 보게 된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증조부대 구해왕
그가 신라에 투항해 와서 진골귀족으로 편입이 되고
거기에 상응하는 관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기존의 정통 진골귀족들이 그동안 어렵게 유지해 왔던 기득권
그 권위와 실권을 유지하는데 상당한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낯선이가 불쑥 찾아와 자신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걸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결국.. 토착 신라 집단에 의해
이주 집단인 김해 김씨는 그 배척과 압박으로 인해
초기에 상당한 고충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투항과 함께 신라에 편입된 김유신 가문
이후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명확한 행적을 알 수 있는 단서
그것은 충북 단양에 있다.
우리엔겐 청풍명월 아름다운 땅으로 알려진 충북 단양
거기엔 도담삼봉의 절경이 있고
지금도 충주호를 끼고 도는 청풍가도의 정취가 있다.
또한.. 비록 무지한 몇몇 중들에 의해 훼손되고 변형되어
그 오래고 친숙한 절집의 풍취는 한참이나 망가졌다 하지만
마치 수 많은 연꽃속에 포근히 안긴듯한 봉암사가 있다.
그리고....
충북 단양군 하방리에 세워진 '단양 적성비'
< 한때.. 마을 빨래판-_-; 으로 사용되던 단양 적성비 >
여기엔 진흥왕이 이 비석을 세우며
영토를 확장하는데 공을 세운 자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그런데 이 적성비에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 적성비 안내 현판.. 여기에도 무력의 이름이 등장한다 >
무력(武力)....
바로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진흥왕의 적극적인 영토확장정책으로
당시 신라는 거의 매년 전쟁을 치뤄야 했다.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차례로 빼앗긴 고구려와 백제가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자주 신라의 접경지역을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기에
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이 선택했던 것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실제.. 진흥왕 15년인 554년
백제와의 관산성 싸움에 출전했던 무력은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엄청난 공을 세운다.
정통 신라 출신이 아닌 가야계이기에
그렇게 죽음을 불사하며 투쟁하지 않으면
엄격한 신라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지속했던 것이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김무력은
신주의 군주로 임명된다.
신주는 지금의 한강유역으로
당시 삼국간의 분쟁이 가장 심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김무력의 뒤를 이은 아들 김서현은
만노군 태수로 임명되는데
이곳 역시 백제와 접경지역이었다.
외부 유입 출신인 김유신 가문은
이처럼 늘 위험하고 거친 변방으로만 떠돌았다.
정통 신라의 귀족세력 입장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유입세력에 대한 견제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
김유신 가문이
신라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한가지 중요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결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건 두사람의 결혼을 '야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도데체 왜?
삼국사기에선 야합이라는 박한 표현으로 기록했을까?
그 의문은....
바로.. 만명부인의 신분 때문이었다.
법흥왕에겐 입종갈문왕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그 입종갈문왕의 아들이 숙흘종이고
숙흘종은 진흥왕이 죽은 뒤 그 부인이었던 만호태후와 결혼을 했고
그렇게 낳은 딸이 바로 만명부인이었다.
즉.. 만명부인은 법흥왕의 조카인 숙흘종의 딸로
신라최고의 정통 신분인 성골 왕족인 것이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신라에서
정통 성골왕족이었던 만명부인과 편입된 진골귀족이었던 김서현의 결혼은
완벽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두 사람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는데
끝내 집에서 도망쳐 나온 만명부인은
김서현이 있던 진천으로 도망가 함께 살게 된다.
생명을 건 도주였고
목숨을 건 결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실로.. 사랑은 위대하다. -_-/
이렇듯 어렵게 결혼 생활을 진행했던 김서현과 만명부인
그 절절했던 위험한 사랑의 결과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그가 바로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의 출생지가 경주가 아닌 진천인 이유
그것은 바로 위험한 사랑
그리고 엄격했던 신분 탓에
금관가야국 출신이었던 김유신 가문이
신라사회에서 겪어야했던 절절했던 신분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신분의 한계를 안고 태어난 김유신이었기에
당시 하급귀족에 불과했던 여사제인 천관녀
그 사랑했던 사람과의 만남을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선조로부터 이어져 온 신분 상승에 대한 뿌리 깊은 강박관념
게다가 어쩌면 반전시킬 수 없이 추락할지도 모를 신분에 대한 불안감
그 절박한 시대적 처세의 틈바구니에
사랑했던 여인 천관녀가 위태롭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
여사제였던 천관녀와의 사랑
그 서글픈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데엔
또 한가지 커다란 이유가 있다.
< 경주 국립박물관에 소장 중인 이차돈(506~527) 순교비 >
법흥왕때 꽃미남으로 자자했던 이차돈....
그가 불교와 왕을 위해 순교하면서
신라 사회에는 불교가 확실히 뿌리를 뻗게 된다.
이후.. 진흥왕은
확고히 불교의 진흥책을 펴게 되는데
이미 불교에 매료되어 스스로를 전륜성왕이라 자처했으며
두 아들에게도 동륜태자 사륜태자라는
불교식의 이름을 붙일 정도였었다.
그리고 김유신이 활동하던 진평왕 때에 와서는
화랑에도 불교신앙이 폭넓게 전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김유신이 이끌던 낭도들의 무리인
'용화향도'다.
'용화향도'
이는 불교의 미륵신앙을 추구하던
단체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뿌리 내린 새로운 이념인 불교와
또 다른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토착신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여사제와 만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세인들의 시선...... .
그때.. 과연 김유신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고유신앙은 점차 사라져 가고
새로운 불교 이념이 사회적 주류로 진행되던 혼란의 시대
가문의 출세와 정치적 입장에서 괴로워하던 청년 김유신
그리고 토착신앙과 결별하고 새로운 이념에 흡수되길 강요했던 그의 어머니.... .
당시 만큼이나 혼란한 이 시대....
아니.. 당시보다 훨씬 혼탁하고 어지러운 이 상실의 시대....
천관녀는 안타깝게도....
'대의' 혹은 '큰뜻'을 위해
마치 아무렇게나 버려져도 마땅한 한낱 천한 기녀로 오인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천관녀는
고유신앙과 새로운 신앙의 갈등이 만들어낸
진정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이었다.
6. 김유신과 김춘추
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
그녀는 아들에게 유난히 엄했다고 한다.
'파한집'에 그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김유신이 젊었을 때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날마다 엄한 가르침을 더했다.' ..라고 적고 있다.
안락한 왕족의 권리를 모두 버리고
목숨까지 걸며 김유신 가문에 시집와
신분의 한계를 절감했던 만명부인이기에
아들에게 그토록 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이 있었기에
16살의 어린 유신도 그렇듯 단호하게 천관녀를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이후 김유신의 행적을 보면
유신도 자신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신분의 한계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김유신과 함께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름 하나가 있는데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두 사람은 친형제 그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알 수 있는
적절한 이야기 하나가 있다.
서기 642년 의자왕때....
백제군이 쳐들어와 신라의 대량주를 비롯하여 40 여개의 성을 빼앗고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품석장군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자 다급해진 신라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러 가게 되었는데
이 때 김유신과 김춘추는 피로서 함께 맹세를 한다.
만약.. 김춘추가 고구려에 억류돼 돌아오지 못하면
김유신이 반드시 구하러 간다는 맹세였다.
또 같은해....
김유신은 백제로 쳐들어가 빼앗겼던 대량성을 비롯한
40 여개의 성을 되찾게 되는데 이때 백제 포로 8명을 잡는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포로는 상대국의 정보를 캐낼 수 있고
또 여러 교환이 가능하기에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김유신은 이 포로 8명을 풀어준다.
대신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품석의 유골을 찾아오게 된다.
이렇게 친형제 이상으로 절친했던 김유신과 김춘추....
그들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7. 선택의 까닭
지금의 경주 서악동엔
신라 29대 왕인 태종무열왕 즉 김춘추의 릉이 있다.
김유신의 묘와는 지척의 거리다.
< 태종 무열왕릉비 가운데 석재는 파손후 소실되었다 >
사진에서 보듯
태종 무열왕릉비는
그 조각이 섬세하며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부인은
다름 아닌 김유신의 동생인 문희다.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
그것은 당시 신라사회에서도
대단히 극적인 사건이었다.
문희가 결혼도 하기전에 김춘추의 베이*-_-*비를 갖자
김유신은 문희를 죽이려고 어느날 마당 한 가운데 큰 불을 질렀다.
마녀사냥하듯 태워죽이겠다는 격한 시츄에이션. -_-
그런데....
마침 그 날은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동하는 날이었다.
커다란 불길을 본 여왕이 자세한 내막을 들은 뒤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을 명하게 된다.
그렇다.
이것은 김유신의 치밀히 계획된 전략이었고
그 결과물이었다.
한마디로 짜고치는 고스톱 내지는 쌩쑈.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귀족집단의 반대를
왕권에 명을 받으며 합리적으로 무마시켰고
극히 자연스레 김유신 김춘추 두 집단의 결합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김유신이
아직 확실한 세력이 부족했던 김춘추 집안과
저렇듯 확고히 결속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들의 첫만남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김유신과 김춘추....
두 집안의 만남은 이미 부친대부터 시작되었다.
진평왕 51년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과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은
함께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러 나간다.
이렇게 두 가문의 만남이 가능했던 이유는 상당히 극적인데....
먼저 김춘추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신라 25대 왕인 진지왕의 아들이 김용춘이고
그의 아들이 김춘추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로 왕족인 것이다.
그러나 진지왕은 즉위 4년만에 폐위되고 만다.
삼국사기에 당시의 상황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4년만에 죽었다고만 적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와 상당히 다르다.
' 진지왕은 정사를 어지럽게 하며 음탕한 짓을 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쪽은 마치 자연사에 의한 것처럼 적혀 있고
다른 쪽은 폐위를 논하고 있다.
역사를 기록하고 바라보는 관점
그것은 지극히 객관적이며 사실적이어야 함을
여기서도 또 깨닫게 된다.
권력에 굽신거리고 돈에 의해 논리가 결정되는
지금의 몇몇 언론이나 저널리스트들의 행태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저널리스트는 그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아야 한다 >
암튼....
일단 폐위쪽에 무게가 실린다.
자!!
폐위로 가닥을 잡을때
과연 진지왕이 폐위된 진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이와 관련된 기록들은 찾을 수가 없기에
정확한 이유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진지왕이
실권을 장악한 진골귀족들의 이해관계에
대단히 반하는 행위를 했고 그것이 극에 달하자
진골귀족들로부터 배척을 당해 왕위에서 쫓겨난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김춘추 가문은
기존 세력들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왕위에서 밀려나게 된다.
왕족이었지만 결코 왕이 될 수 없었던 비운의 케릭터 김용춘과
패망한 나라의 잊혀진 왕족이었던 왕의 길을 걸어야 할 남자 김서현
이것이 두 가문이 손을 잡은 결정적 이유인 것이다.
결국.. 소외된 약자와 비정통의 소외된 자 사이에
무언의 정략적 접근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바로 서현과 용춘의 랑데뷰였다.
이런 두 집안의 분위기속에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은
대단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이 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결혼을 치밀하게 도모한 것은
두 가문의 결속을 더더욱 강화하기 위한 당연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먼 훗날....
무려 61살이 된 김유신이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낳은 딸과 결혼하는 것도
무지한 이들이 함부러 말하듯 늙으막에 노망 든 것이 아니고
바로 그와 같은 전략적 이유 탓으로 보는 게 옳다.
8. 성장과 연속 그리고 도래한 기회
치밀한 계획 끝에 대내외적으로도 합법적인 결속을 강화한
김유신과 김춘추 두 가문은
서서히 신라사회의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전쟁터에서 세운 뛰어난 공적이었다.
김유신이 처음 전쟁에 참여한 기록은
낭비성 전투였다.
진평왕 51년인 629년
김유신의 나이 서른 다섯이 되던 해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던 신라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30대 였던 김유신이 출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후에도 김유신이 전쟁터에서 활약한 기록은 대단히 화려한데
대표적인 일화 하나가 기록화로 전해진다.
김유신이 자신의 집 우물물을 마시는 모습으로
바로 644년의 일이다.
당시 김유신은 백제를 침략해 일곱 개 성을 빼앗아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전쟁터로 가는 길엔 김유신의 집이 있었다.
가족들은 떠나는 김유신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집앞에 나와 있었고
그럼에도 그는 집앞을 지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가족들의 얼굴조차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한 병사를 시켜 자신의 집 우물물을 떠오라고 해 그 물을 마시며
" 우리 집 물맛은 예나 다름없구나 " ..라고 크게 소리쳤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물은 실생활에 대단히 소중한 존재다.
그런 물맛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종래엔 전쟁에서의 승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 계획된 치밀한 김유신의 행동은
당시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음엔 틀림이 없을 것이다.
< 경주 교동에 위치한 재매정의 우물.. 실제 김유신이 살았던 그 시절 그 우물이라고 한다 >
서른 다섯살 이후 무수히 많은 전쟁에 참여했던 김유신
그는 필사적으로 싸웠고 수 많은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한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전쟁에서의 승리로 세력을 키워가던 김유신에게
드디어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결정적이자 운명적인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선덕여왕 16년(647년)에 있었던
'비담의 난' 이었다.
9. 비담의 난
김유신.. 그에게 드디어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을 기회가 찾아온다.
선덕여왕 16년인 647년
전통의 실권 세력이자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상대등은 귀족세력의 대표로
왕위에도 오를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비담이 왕권에 도전하며 난을 일으킨 표면적인 이유는
' 여주불능선리 '
즉 여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담이 난을 일으킨 건
선덕여왕이 즉위하고 이미 16년이 지난 뒤였고
비담이 상대등에 오른지도 1년이 흐른 뒤였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난을 일으킨 것일까?
바로.. 진덕여왕 때문이었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신라의 두 번째 여왕이다.
이 진덕여왕의 즉위 과정에 비담이 불만을 품은 것이다.
요즘 시대로 말하자면
'풍운아'나 다름 없는 선덕여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 이건 드라마다. 제발.. 역사와 착각하지 말자. ^^;; >
그래서 선덕여왕에게 작은 아버지가 되는
국반갈문왕의 딸인 승만이 후계자로 떠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진덕여왕 이었다.
이때 진덕여왕을 선덕여왕의 후계자로
강력히 내세운 인물들이 김유신과 김춘추였다.
그때까지도 통념상의 명분과 반대 세력을 압도할 충분한 힘을 지니지 못했기에
여전히 여러 세력을 회유하며 규합중이었고
그렇게 기반을 강화해나가는 처지였기에
김춘추는 그가 즉위하기 위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벌기 위해
정통을 무시하며 다시 여왕을 내세웠고
여왕 제위 기간동안 체제를 정비하며 기반을 갖추려 했던 것이다.
이미 김춘추는
이렇게 차기 왕위 계승권을 일찍부터 노려왔고 또 준비했던 것이다.
물론.. 김유신과 함께 말이다.
이런 모종의 계획들은
운명적 라이벌이자 정적이었던
비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진덕의 즉위를 기정사실화 하게 되자
당연히 상대등으로 차기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비담은
심하게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 비담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것이
김유신과 김춘추였다.
김유신이 이끄는 군대는 왕성인 월성에 주둔하였고
비담이 이끄는 반군은 왕궁으로부터 불과 10여리 떨어진
명활성에 주둔하였다.
그런데 난이 발생하고 10일후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월성의 밤하늘에서
커다란 별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자 비담은 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라며 소문을 내고
이에 반군의 사기는 크게 고무된다.
이때 김유신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이용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연이다.
커다란 연을 만들어 연 끝에 불을 붙여 다시 하늘로 올리며 별처럼 보이게 해
어젯밤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만들었고
다시 반군의 사기는 떨어지며 결국 난을 진압한다.
비담의 난이 나던 그 해
선덕여왕이 사망하자 곧바로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른다.
이로써 김유신과 김춘추는 완벽히 실권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즉위 8년만에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드디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이다.
이때 김춘추의 나이 52 세 였고
김유신의 나이는 60 이었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뒤
드디어 김유신도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자리에 오른다.
당시 신라사회에서 김유신의 위치가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경주 충효동에는 김유신의 릉이 있다.
신라의 어느 왕릉에 뒤지지 않는 규모와 품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라 흥덕왕때 김유신은 흥무대왕으로 봉해진다.
왕이 아니면서 대왕의 존호를 받은 건
우리 역사에서 김유신이 유일하다.
드디어....
그는 왕에 까지 오른 것이다.
10. 뛰어넘은 신분의 한계
나이 예순에 드디어 김유신은
평생의 과업이자 무거운 짐이었던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김유신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김유신의 아들 원술에 대한 이야기다.
김유신은 아들 원술이 당나라와의 전쟁에 나갔다 패배하고 돌아오자
원술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김유신이 아들 원술에게 한 말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데
"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아니라 또한 가훈을 져버렸으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 " ..고 비정하게 말한다.
다행히 왕의 만류로 아들 원술은 목숨을 부지하게 되지만
김유신은 끝내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원술은 집을 나와 산속에 숨어 살아야 했다.
그러다 아버지 김유신이 일흔 아홉의 나이로 죽자
원술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머니 지소부인마저 아들 원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시 어머니 지소부인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 했다고 한다.
" 원술은 이미 선군(김유신)에게 자식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 노릇을 하겠는가. "
끝내..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원술은
다시 산속을 떠돌다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모진 소리를 들으며 끝내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던 원술을 보더라도
금관가야국 출신이었던 김유신이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그리고 낯선 신라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살아왔는지를 쉬 짐작하게 해 준다.
그리고 그 틈에서
아직까지도 기녀라는 오명을 쓰고
안타까이 희생되어야 했던 또 한사람
그녀가 바로 천관녀였다.
11. 끝나지 않았다
무려 1500년간 전해지고 있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
그러나 안타까운 건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 처절히 버림받은 천관녀일뿐
과연 김유신 또한 그러했을지는
김유신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경주시 교동엔 김유신이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다.
그 집터엔 여전히 우물과 주춧돌들이 전해지는데
살아생전 김유신이 사용하던 우물이라고 한다.
이 김유신의 집터와 천관사는 멀지 않다.
경주의 중심을 흐르는 남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다.
실로 두 사람의 사랑만큼이나
가까운 거리다.
사랑했지만 사랑만으로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던 사회
태어나면서 부터 신분이 정해진 닫힌 사회
그리고 몰락한 금관가야의 왕족으로서 지녀야 했던 강박관념
그렇게 김유신은 자신의 사랑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극으로 끝난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후세에도 전해져 '이익'은 자신의 저서인 '해동악부'에
천관녀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큰길로 쫓아가며 당신의 소매를 붙잡았으나
당신은 저를 못 본채 하고 또 말 목을 베었지요.
....뒤돌아보지 않고 바삐 떠나가시니
저의 사무친 한은 어찌하겠습니까?
우러러보며 발만 동동 구를 뿐.... .
이에 대한 김유신의 심정.....
그것은 '이광사'의 '동국악부'에
절절히 전해진다.
내 말이 동으로 가다 다시 서로 가누나.
내 집으로 가야 하는데 뉘 집으로 가는가?
여인이 아름다워 참으로 가련한데
어머님의 명을 어찌할 것인가?
지금도 경주에서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이야기를 기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신라의 문화를 보존하고 전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매년 11월이면 천관녀를 모시는 제사를 지낸다.
지난 1998년 시작되었다고 하니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이렇듯 천관녀는
여전히 신라 사람들 마음에 살아 있는 것이다.
노년에 접어든 김유신이
끝내 자신을 그리워하다
쓸쓸히 죽어간 여인을 위해 지었다는 천관사.... .
< 2004년 여름 천관사지 >
지금 천관사 절터는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 있다.
서쪽 남천 건너 지척에는
그토록 자신들의 사랑을 반대했던 만명 부인이 살던 재매정이 있고
멀리 산 등성이에는 사무치도록 그리던 님 김유신이 잠들어 있다.
죽어서도 그리운 님의 무덤이라도 보려면
만명 부인이 살았던 재매정을 거쳐야 하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천관녀에게는 사랑의 장애물이 놓여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제법 허허로웠던 젊은 시절....
부드러운 바람이 일고 싱그러운 풀내음이 떠다닐 즈음
그리 흐리지 않은 날로 골라 천관사지를 찾곤 했었다.
쓸쓸한 들녘..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깊은 풀 숲에 쌓인 저 돌 옆에 하염없이 앉았다 오는 것이다.
이렇듯 이제 페허로 남아
황망한 흔적만이 바람결에 나돌지만
1500년전 한 없이 절절했던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여전히 내 가슴속에 깊게 세겨져 있다.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와 버려진 이로 남아
또 다른 상념들을 계속 만들면서 말이다.
천관녀....
그녀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TRACK 01 이생강(Lee,SaengKang) - 진양조, 중모리
TRACK 02 이생강(Lee,SaengKang) - 중중모리, 자진모리
이생강 님의 대금산조다.
대학시절.. 우연히 손에 넣은 LP판 2장이 있는데
하나는 관리 소홀로 한 면은 거의 들을 수 없는 지경이고
다른 하나는 다행히 멀쩡하다.
대금에 대해....
개뿔 아는 게 있을리 만무하다. -_-;;
그러나 아는 바 없다해서
들을 권리마져 없는 건 아니기에
요즘 처럼 소슬한 가을 저녁이면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며 찾아듣곤 한다.
원래는.....
영화 '한네의 승천' 중 '한네의 이별' 이라는 곡을 올리려 했는데
막상 올리고 글을 읽어보니
김성녀 씨 보이스가 워낙 처절하고 한이 서려 있어
내 잡-_-글이 사뿐히 묻혀 버리더라.
결국.. 급히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_-;;
첫댓글 어차피 재료는 있고 어떻게 조리를 해낼 것인가가 명품조리사를 결정짓는 일일진데
칼질이며,불질이며 그 순서며 어떤 기명에 담아 낼 것인가?
요리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조리는 유자격자만 할 수 있는 이치에 따라
해묘님은 그런 측면에서 드물게 보는 일류 조리사요.
역사소설도 좋고,환타지 소설도 좋고 어쩌면 요즘 컨셉이 펙션이니 팔리는 작가가 될 수 있을듯.
문제는 손이 비어 있어야 큰걸 쥐는데 건축사란 안정된 직업이 있으니..
전업작가로 나서기엔 방해요인인 셈이나 얼마든지 병행이 가능하니
돈 되는 일에 아이디어를 함 내보시우.소설가가 싫으면 이런 답사기를 소설과
접목시켜 퓨전으로 가도 좋구...여튼,
글 푸는 그 솜씨만 두고로도 강권하고 싶구만요..주제에 천착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추론하고 재창작해내는 자질이며 대상을 두고 파고드는 완고함이 아닌 집요함, 근성..
무엇보다 이런 작업을 즐거운 기분으로,또는 설사 힘이 들었다 하더라도 이런 몰두의 시간을
제 하고 싶어서 갖는다면, 아니 할 수 없어서 하고만다면 작가정신으로서도 익셀런트 아니우??.
힘들여 쓴 이런 글을 우리만 보기엔 정말.......운주사에 이어 천관녀 또한 역작이고만요.
그러게요. 제 하고자 하는 것으로 밥을 먹을 수 있으면 직업으로 최고죠.
자운님..제가 왜 책내라신 말씀에 그 전부텀 귓등으로 흘려듣는지 이제 좀 아시겠죠?
전 프로듀스적 기질이 다소 있지만 역시...배우는 아니죠.위에 나열한 어느 것 한가지 전 아닙니다.
또 왜 이러세여. ^^
과찬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시네여. -_-;;
걍.. 잡글입니다 근본없는....
그러니 그냥 편하게 보아주시면 됩니다. ^^ (__*)
엘피판..한네의 승천...사랑가와 함께 한동안 듣다가
얼마전 처분했는데...아깝긴 해요..
김유신의 사랑과 야망..잘보고갑니다.
누군가의 사랑이야기 앞에선
늘 열등의식을 느낀다는...
내사랑은 자꾸만 작아진다는..ㅜ.ㅜ
내사랑이라 부를만한 사랑이 남아 있다면
아직 가슴이 덥다는 증거겠져?
남의 사랑이야 아무리 아름다워 바야 남의 것.
내 사랑이 짱임. -_-
삭제된 댓글 입니다.
씨저님께 다른 건 다 배우셔도 과찬하시는 그건 배우지 마세여. ^^;;
과한 평가는 고맙구여.
늘 행복하신 자운님 되시길요. ^^ (__*)
"1500년전 한 없이 절절했던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여전히 내 가슴속에 깊게 세겨져 있다."-<---
왠지 버림받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이 추위에 버림받으셔서 우짤라고..... ^^;;
부족하고 모났어도 내것이 최곱니다.
옆지기분과 알콩달콩 행복한 휴일되시길요.
행복하삼 마리님. ^0^/
폰으로 들여다 보는데... 묘지님의 글이 있어서
잽싸게 컴터로 달려왔답니다...
어제 운주사의 이야기도 폰으로 봤는데...
댓글을 보니까 음악과 너무 잘 어울려서
글이 쉬이 읽힌다고 하셔서,,,들...
1500년전의 천관녀와 유신의 사랑이야기...
천관녀는 사랑에 목마른데 유신은...또한 명예를 택하니///
유신이 사랑을 택했다면 역사상 가장 불세출의 장군은
없었을거란...
글이 너무 좋다 보니... 답글 다는데도
어렵네요... 아무렇게나 달지도 못하겠고
좋은 답글을 달아야 하는데
미욱한 저로선 택도 없는 일이고...
이해해주셔요....
모글님 앙글애요..
일천오백년전에도 축첩 성행했고..
유신랑은 이러나 저러나 훌륭한 장군였을 거예요.
제가 볼땐 유신랑이 엄마 핑게삼아 버렸음요~^^*
귀한 시간 내주시고.. 관심도 내주시고....
그렇게 정성으로 읽어주셨는데 무슨 말씀이세여.
그냥 사는 이야기만 썼으면 모글님이 편하게 댓글 다셨을 텐데....
갠히.. 게면스럽고 그렇습니다. ^^;;
그리구여.
아마 여기 이 카페에 글 올리시는 모든분들이 그렇겠지만
멋진 댓글.. 훌륭한 댓글을 바라는 게 아닐 겁니다.
그냥 점 하나만 찍으시더라도 모글님이 다녀가셨다는 흔적만 있다면
아마 묘지는 기쁠 겁니다. ^^
그러니 앞으론 제발 편하게 간단하게 하시고 싶은 말만 남겨주셔여.
점 하나도 상관없습니다. ^^
늦은시간에.. 마음의 댓글 고맙습니다. 모글님. ^^ (__*)
그럴까요.........??
남자들 마음 변하면
핑게가 엄마나 가문을 찾는다등만...
글쳐 모.글님 끄뜩..^^
제가요... 건망증이 심해요..
뭘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해 놓고는
다른 걸 하고 있거든요..
추천 누른다면서 잊어버리고선
뻬뻬로 데이 읽고 왔다는........
다시 왔어요 것 때문에...ㅎㅎ
ㅎㅎ
모닝!
이 시간까지 안자고......
요즘은 꽃에 대해 안 올리시구?
기다려요.
전 특별한 일이 안생기고 주절도 안되는 것이 글 솜씨가 바닥을 보이는지.
하이요.. 늦잠 퍼자고 좀 전에 인난 묘집니다. ^^;;
저도 요즘 모글님의 꽃강의가 궁금함.
오후부터 춰진데여. 옷단속 잘하시공.
행복한 오후요 방울님. ^^ (__*)
다음주에... 서울가게되어요..
그래서 다녀와서 올릴려구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이고 천관녀에 낚여 공부 윽시기
하네
이거 스토리 완전 영화 한편감인데요
낚이셔꾼하. ㅎㅎ ^^;;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보통 고대사는 자료가 극히 적기에 상상력과 추론이 중요한 요소이며
근대사의 경우 자료가 많기에 노력과 성실성이 좋은 글의 성패를 가름하곤 합니다.
이정도면 거의 고고학에 가까운데
너무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한가지 특기한다면 의학이 제사나 무속에서
분리되는데 조선조에도 궁중의녀들은 술자리 시중을 들었습니다^^
뉍. 의녀들이야 머.
이제 대장금 보신분들은 잘 알고 계실듯 ㅎㅎ ^^;;
벌써 겨울을 느껴갑니다.
계절은 참 빨라여.
늘 건강 잘 챙기시구여. 존 하루여 청련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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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노라 김가여? 아님 천관녀라 천가? -_-;;
흠......
김노라
천노라
천노라가 낫다.
천노라 콜!! -0-
난 그 키임이 아닌디...
이 글 읽기전엔... 3년이 지나서 그랬을꺼야???
했었다는..^^
안 읽은 게야. 또. -_-
공부해서 올려 주시니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도 알고 감사합니다. ^-^
답글 늦어 죄송...... ^^;;
몇편 글 올리니 관리하기가 나름 어렵네여. ㅠ_ㅠ
하루 한편씩만 써야겠어여.
소중한 시간내셔서 읽어주시고 답글까지 달아주시는데
일케 늦으며 저라도 짜증날듯. ㅠ_ㅠ
날이 춰여. 든든히 입으시고 행복한 오후되세여. (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몬드 들어있는 거면.. 페레로 로쉐?
그건 호둔가.. 피스타치오? 아 몰러. =_=
묘지도 초코릿 엄청 좋아함.
하긴 단 건 다 좋아함.
술도 달콤한 입술을 젤 좋아함. ㅎㅎ ^^ (__*)
묘지님
글 참 좋은글이다
천관녀에 대하여는
기생으로서 김유신의 앞길에
방해되는 사랑이라서
평생을 김유신을 절절히 그리워하며
그를 위해 절에 들어가 살았다는 ...
이정도의 이야기로만 알았는데요
역사적 사실적 관점에서
펼쳐진 이야기 숨돌릴 틈 없이 읽어내려 왔어요
와--묘지님 글 솜씨 굿 쵝오~~~
역시.. 그동안 대충 읽어왔던 게야. -_-+
ㅋㅋ 거마워여 향기님. ^^/
읽어가다보니 방대합니다 몰랐던 사실 일깨워주는군요 감솨~^^
하이요 천리향님 ^^/
차지만 여전히 화창한 마지막 가을입니다. 초겨울안가? ^^;;
찾아주셔서 ㄳㄳ
식사 맛나게 하시고 늘 행복하셔엽. ^0^/
댓글 달게 되어 기쁩니다.
살아있는 역사의 숨결이랄까요?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될 듯..
훌륭하십니다.
과찬...... 이져. ^^;;
소중한 시간내셔서 읽어주신 것만으로도 제가 고맙습니다.
마지막 가을 넉넉히 즐기시구요.
늘 행복하세여 아다지오님. ^^ (__*)
어슬프게 줏어 들은 쏘리에 의하면
여 군인과 술집여자의 사주는 거의 비슷하고 한 끗 차이다..라더만요.
제가 배운건 적고, 이해만 쪼금 ,설명하긴 더욱 역 부족입니다만,
억지추측으로 김 유신은 사주에 官이 많아
당연히 그렇게 선택했을거라는.(관은 자신의 본능조차 묶을려는 성질강함)
또 천관녀가 여사제였나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고대 신성의 여사제는 엑시터시인 상태에서 성 행위를 즐겼다는 말은 건들 건들 들은 바 있어 좀 신기했네요.
어! 어째,너무 마이갔나ㅋ (요즘처럼 쉬 잠 못들때, 복잡한 일거리 툭 놓고 잠시라도 퐁당~할수있어 감사^^* )
이른 새벽에 다녀가셨군요. ^^
미인은 잠꾸러기라는데 예외도 있나봅니다.
마리가 올려준 알흠다운 사진속 솜결님 모습 슬쩍 훔쳐봤어여 ㅎㅎ ^^;;
무용 전공하셨다는데.. 그 방면으론 아는 바가 없어.. 쿵! ..하고 벽 하나가 쌓인 느낌이.... -_-
그래도 머.. 새 해 행복과 행운을 빌어드리는데는 지장 없겠죠? ㅎㅎ
새 해 복 많이 받으삼요. ^^ (__*)
@해변의묘지 쿵...하고 벽 하나가 쌓이 느낌이..?
묘지님 글에서 내가 느낀건디.ㅎㅎ
무용은 내게서 흔적조차 있을까
글고보니 30년.
까마득 잊고 산 전설이 있었고나.ㅋ
30년 전 빛바랜사진. 근래에 어디서 툭 나오더만요.
따로이 글은 못 올리지만 댓글이라또 욜씨미 달아야 덜..ㅎ
@솜결
ㅎㅎ 사진이 옆으로 돌아가서 고개 돌리고 봤음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