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찬희
'헝그리 정신', '정신일도 하사불성'에서 '기량', '테크닉'을 외치게 된 전환점을 갖게 했던 복싱선수
출생 ; 1957년 3월 23일/대구 전적 ; 23전 17승 2무 4패 (6KO) 스타일 ; 라이트 복서 타이틀 ; WBC 플라이급(79년) | |
안타까운 천재
박찬희
1980년대 후반 장정구와 류명우가 나란히 WBC와 WBA의 라이트 플라이급을 장악하며 라이벌로 주목을 받기 전인 1980년대 초반 플라이급에서 김태식과 박찬희가 역시 두 기구의 챔피언으로 복싱팬들을 미치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김태식이 파워풀한 전투복싱의 전형이었다면 박찬희의 복싱에는 천재성이 있었다. 오늘은 WBC 플라이급 챔피언을 역임한 박찬희의 복싱라이프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복싱에 매료
1957년 3월 대구 삼덕동에서 태어난 박찬희는 초등학교 2학년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이후 선린중학교 3학년 때 복싱글러브를 처음 끼게 된다. 늘 지나던 원효로에서 창 너머로 들여다 보이는 복싱 체육관의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의 운명을 통째로 바꾸어 놓게 된다. 갇혀진 4각의 링 안에서 단지 두 주먹으로만의 싸움으로, 승자를 가려내는 '복싱'이라는 스포츠에 완전히 매료되고 만다.
사실 박찬희가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운동은 야구였다. 전통의 야구 명문, 선린중학교 운동장에서 훈련을 하던 야구선수들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 없었다. 하지만 박찬희가 야구를 하기엔 너무 작았기에 다행스럽게도 그는 야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복싱에 전적으로 메달려야 했다.
그의 복싱은 타고난 센스 덕분인지 우후죽순이라는 말처럼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쑥쑥 자라났고 한영고등학교 1학년 시절 첫 출전한 서울시 신인대회에서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4년 4월, 박찬희는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 고속질주 바로 그 자체였다. 복서 박찬희의 출발은 이렇게 눈이 부셨다.
그리고 1974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 박찬희는 라이트플라이급으로 출전,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고 1976년엔 태국의 킹스컵대회에서도 동체급의 우승과 더불어 대회 MVP까지 차지하게 된다.
프로로 전향
내친김에 올림픽 금메달까지 손에 넣으려던 박찬희는 1976년 몬트리얼 올림픽에 출전하며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부각되지만 8강전에서 쿠바의 에르난데스에게 패하며 좌초하고 만다. 1회전과 2회전에서 기분좋게 RSC로 승리하며 에르난데스를 만난 박찬희는 접전끝에 3-2의 판정으로 패하는데 기실 그 승부는 당시 약소국 한국인인 박찬희가 3-2라는 판정을 얻어낸 것 만으로도 이긴 승부라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아쉬운 한판을 뒤로 하고 박찬희는 그의 화려한 '아마 글러브'를 벗게 된다. 127전 125승이라는 엄청난 전적을 남기고.
이듬해 박찬희는 세기프로모션의 서순종씨의 프로포즈로 프로로 전향했고 1977년 7월 일본의 무토 쥬지를 상대로 프로데뷔전을 갖게 된다. 박찬희는 제2의 고향인 부산서 프로데뷔전을 치르게 되고 전광석화와도 같은 스트레이트로 1회에 TKO로 승리하며 신고식을 치른다. (그 두달 후 나중의 라이벌이 되는 김태식도 프로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3전째에 김성준의 일생의 라이벌이었던 정상일을 가볍게 판정으로 제치며 명불허전의 솜씨를 보여주었고 10전째에 세계랭커이자 김성준에게 도전해 애를 먹였던 필리핀의 시오니 카루포와 접전끝에 무승부를 기록하며 연승가도에 제동이 걸린다.
세기프로모션의 서순종씨는 김태식과 미구엘 칸토전의 이야기가 오가자 이를 중도에서 인터셉트하며 1979년 3월 WBC 플라이급 타이틀매치를 성사시킨다.
전광석화(電光石火) 박찬희
박찬희는 데뷔한 지 1년반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세계 챔피언의 벽을 두드리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11경기 만에 세계 챔피언전에 도전하는 국내 복서는 전무했다. 31살의 나이로, 14차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멕시코의 '링의 대학교수', 백전노장 미구엘 칸토는 아직도 플라이급 올타임의 최강자로 손에 꼽히는 굴지의 챔피언.
아무리 박찬희라지만 어렵지 않겠나 하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막상 판이 열리자 박찬희의 복싱은 마치 신들린 듯 한마당 질펀하게 펼쳐진다. 박찬희와 칸토의 일전은 우리 복싱사에 오랫동안 기억될 명승부로 꼽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질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는 명승부였다.
23세의 약관 박찬희는, 15라운드 시종일관 파이팅 넘치는 복싱으로 심판, 팬들 모두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고,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3심의 채점은 148-145, 150-141, 147-146으로 모두 박찬희의 우세를 채점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잘생기고 복싱 잘하는 ‘대학생 복서’ 박찬희에 대한 팬들의 애정과 기대는, 역대 어느 챔피언 의 그것과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일방적이고 뜨겁게 커져간다.
또 하나의 명승부 에스파다스전
박찬희는 1차방어전에서 일본의 이가라시 지까라를 상대로 일방적인 경기를 펼치고도 상대의 지저분한 권투를 와해시키지 못한채 판정(150-134, 150-141, 150-142)을 따내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링에 마주 서게 되는 미구엘 칸토와의 경기에서는 5회에 한차례 다운을 빼앗으며 멋진 출발을 하지만 체력을 적절히 배분하는데 실패하면서 무승부로 타이틀을 지키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 경기 이후로 박찬희는 펀치력에 물음표가 달리고 결정타 부재라는 악평이 꼬리처럼 달리기 시작한다. 3차방어전은 역시 멕시칸인 구티 에스파다스였다. WBA 플라이급 챔피언을 역임한 바 있는 에스파다스는 다이나믹한 복싱과 호쾌한 파워펀치로 인상적인 복서였고 그 경기는 박찬희에게는 그의 복싱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경기중 하나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싸워보고싶은 상대였다는 구티 에스파다스는 1회에 박찬희를 먼저 다운시키며 명불허전의 솜씨를 과시하지만 박찬희는 일어나자마자 에스파다스를 다운시키며 곧 다운을 되돌려주고 2회에 TKO로 승리하며 3차방어를 산뜻하게 매조지한다.
4차방어전에선 아넬 아로살을 판정으로 제압하며 우리나라 최초로 4차방어에 성공하는 첫 선수가 되고5차방어전은 역시 멕시칸 알베르토 모랄레스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며 3-0의 판정으로 승리 타이틀을 지켜낸다.
천적 오구마 쇼지
1980년 5월 18일 장충체육관, 일본의 오구마 쇼지를 맞아 6차방어전을 펼치는 박찬희는 충격적으로 KO로 패하고 만다. 노장 오꾸마 쇼지(29)에게 시종 허덕이다 9회 53초만에 충격적인 TKO패, 작년 3월18일 칸토에게 타이틀을 획득한 후 1년2개월만에 6차 방어에서 함몰됐다. 8회까지의 채점내용도 주심인 나타약(필리핀) 은 78-73, 부심인 우찌다(일본)는 79-75, 한국의 김광수씨도 78-77로 모두 오꾸마의 일방적 우세로 채점됐다. 박찬희는 5회에 복부를 강타당한 것이 치명타가 되어 이후 TKO 되기까지 서서히 무녀졌다. 박은 2, 3회에 머리를 약간 숙이고 파고들었으나 키가 크고 리치마저 긴 오꾸마에게 옆구리와 안면을 여러 차례 강타 당했다. 4회에 박은 더욱 초조한 듯 가드를 내리고 오꾸마를 외곽서 돌다 스트레이트를 가격하고 근접전에선 교묘히 붙잡는등 백전노장의 노련미를 과시했다. 박이 치명타를 맞은 것은 5회. 박은 배와 얼굴에 연타를 맞고 그로기 상태가 됐으며 7회에는 초반 눈옆이 찢어져 링닥터의 검진을 받기도 했다. 박찬희가 계속 붙들려하자 오꾸마는 유도식으로 넘어뜨리자 관중석으로부터 빈 깡통과 빈병이 날아와 경기가 1분간 중단되는 수라장이 빚어졌다. 경기가 계속되자 주심은 오꾸마에게 파울을 줘 관중들을 진정시켰다. 이미 기진맥진한 박은 8회에서는 안면과 복부를 맞고 휘청거리며 잡고 늘어지다 주저앉아 주심이 카운트를 했으나 공이 울려 겨우 살아났다. 그러나 9회에 들어 제정신이 아닌 박은 일방적으로 얻어맞다 주저앉아 주심은 오꾸마의 TKO승을 선언하고 말았다.
재전의 아쉬움
박찬희는 타이틀을 상실한지 5개월만인 10월 18일밤 일본 센다이 미야기 스포츠센터에서 벌어진 타이틀 매치에서 챔피언 오꾸마 쇼지와 맞서 1회 종료 5초전 다운을 뺏기도 했으나 중반이후 체력이 달려 유효타를 날리지 못하고 결국 2-1로 판정패했었다. 한국의 강규순 부심만148-144로 박의 우세를, 영국의 해리 깁스 주심과 일본의 모리따 겐 부심은 각각 144-143,146-145 1점차로 오꾸마의 우세로 판정했었다. 그러나 이 2차전은 박찬희의 우세가 확실했으며 결국 3차전을 잉태하게 된다.
그리고 3차전 역시 박찬희는 잘 싸우며 7회까지 30세의 노장 오오꾸마를 일방적이다시피 몰아붙여 남은 라운드만을 잘 운용한다면 WBC 플라이급 챔피언을 탈환, 한국 복서로서 처음으로 등급 챔피언 의 영광을 다시 누리는 순간이 3일 동경 고라꾸엔홀에서 탄생하는 듯 했다. 그러나 8회 이후 박찬희는 급격히 스태미너가 떨어졌고 기세가 오른 오꾸마 에게 약점인 배를 얻어맞고 전반과는 정반대의 양상이 되어 12회에는 거의 그로기 상태까지 몰렸다. 그리고 다시 판정패였다.
이후 세차례의 경기를 더 갖지만 마지막 경기인 위키 텐감과의 경기에서 패하며 글러브를 벽에 걸게 된다. 토탈 23전 17승(6KO) 4패 2무의 전적을 남긴채.
안타까운 천재의 빠른 퇴장
박찬희의 복싱 스타일은 상큼했다. 단점이 있었다면 상대성에 있어서 끈적거리는 스타일의 선수에게는 자신의 복싱을 완벽하게 펼치지 못한다는 점이 있긴 했지만. 또 하나 박찬희의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스태미너 부족도 사실은 아마추어 복싱스타 출신이었던 그에게 있어서 만들어진 이미지에 불과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엄청난 피로감을 주는 세계타이틀매치를 두달 건너 한번씩 치러내는 강행군을 펼쳤는데 그런 강행군을 치르고도 과연 스태미너가 왕성했던 선수가 또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미구엘 칸토전(1979년 3월 18일) 부터 오구마 쇼지에게 패하는 6차방어전(1980년 5월 18일)까지 7차례의 경기가 1년 2개월만에 다 벌어졌다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매니저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확히 평균 2개월마다 세계타이틀매치를 치른 것은 너무 과한 스케줄임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최절정기는 아니었지만 링의 대학교수라 불리던 테크니션 미구엘 칸토를 두차례나 잡아내고 하드펀처였던 구티 에스파다스를 시원하게 부셨다는 점에서 박찬희에 대한 평가는 아무리 짜게 준다 하더라도 플라이급 역대 올스타의 베스트10에 들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런 박찬희를 우리는 너무 일찍 소비해버린 것이다. 안타까운 천재의 퇴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