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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言 율시 스크랩 遊山西村(유산서촌)
古方 추천 0 조회 222 16.05.21 17: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遊山西村(유산서촌)

 

 

남송/南宋 육유/陸游

 

 

--산서촌을 유람하고--

 

농가의 납주가 텁텁하다 비웃지 마라.

풍년에 손님 머물러도 닭과 돼지 충분하다.

산 첩첩 물이 겹겹하여 갈 길 없다 싶었지만

버들 색 짙고 꽃 빛 밝은 또 한 고을이 있었구나.

피리 불고 북 치며 따르니 춘사가 가까워짐이라.

의관이 소박하고 간소하니 고풍이 남았음이라.

지금부터 허락된다면 한가로이 달 밝은 때를 타서

지팡이 짚고 무시로 밤에라도 문 두드리리라.

 

莫笑農家臘酒渾(막소농가랍주혼)

豊年留客足鷄豚(풍년류객족계돈)

山重水複疑無路(산중수복의무로)

柳暗花明又一村(류암화명우일촌)

蕭鼓追隨春社近(소고추수춘사근)

衣冠簡朴古風存(의관간박고풍존)

從今若許閑乘月(종금약허한승월)

柱杖無時夜叩門(주장무시야고문)

 

*납주(臘酒)-12월에 빚어서 봄에 마시는 술. *춘사(春社)-입춘부터 다섯 번째 술일(戌日)에 하는 봄 축제. *승월(乘月)-달빛 밝은 기회를 타서. *막(莫)-말다. *소(笑)-웃다. *농(農)-농사짓다. *랍(臘)-섣달. *혼(渾)-흐리다. *풍(豊)-넉넉하다. *유(留)-머물다, *객(客)-손님. *족(足)-충분하다. *계(鷄)-닭. *돈(豚)-돼지. *중(重)-거듭. *복(複)-거듭. *의(疑)-의심하다. *로(路)-길. *암(暗)-어둡다. *명(明)-밝다. *우(又)-또. *촌(村)-마을. *소(簫)-피리. *고(鼓)-북. *추(追)-쫓다. 따르다. *수(隨)-따르다. *사(社)-모이다. 땅 귀신. *의(衣)-옷. *관(冠)-관. 모자. *간(簡)-간결하다. *박(朴)-소박하다. *고(古)-예. *풍(風)-풍속. *존(存)-있다. *종(從)-따르다. -부터. *약(若)-만약. *허(許)-허락하다. *한(閑)-한가하다. *승(乘)-타다. *주(?)-짚다. *장(杖)-지팡이. *고(叩)-두드리다.

 

감상

 

농가의 납주를 흐리다고 비웃지 마라. 풍년이 들어서 손님 모시기에 충분히 안주로서 닭과 돼지가 있다. 산이 겹겹으로 둘러있고, 내가 거듭 겹쳐 흘러서 막다른 곳인 줄 의심했는데, 버들이 어둡게 짙푸르고, 밝은 꽃이 피어서 이런 곳에도 마을이 있구나 하고 느낀다. 북과 피리가 쫓아오듯이 울리는 것은 봄 축제가 가까워지기 때문이고, 마을 사람들의 옷차림이 간결 소박한 것은 고풍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달 밝은 한가한 밤에는 무시로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문을 두드려 다오.

이 시는 작자가 낙향하여 봄 축제 때 초대를 받고 그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제 1, 2구에서는 그 마을 사람이 하는 말이 비록 술은 탁하지만 안주는 닭고기나 돼지고기가 충분히 있다고 한다. 마음 흐뭇하게 하는 광경이다. 제 3, 4구에서는 <산중수복(山重水複)>과 <유암화명(柳暗花明)>, <의무로(疑無路)>와 <우일촌(又一村)>이 대구를 이루어 마을의 위치와 풍치를 그리고 있는데, 산이 겹겹으로 둘러싸 있고 시내가 겹쳐 흘러 막다른 곳인 줄 알겠지만 마을이 있어서, 버들은 어둡다 할 만큼 짙푸르고, 꽃은 밝게 피어있다고 한다. 제 5, 6구에서는 <소고추수(簫鼓追隨)>와 <의관간박(衣冠簡朴)>, <춘사근(春社近)>과 <고풍존(古風存)>이 대구를 이루어 축제가 가까워진 모습과 마을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보며 고풍이 남아 있음을 좋아한다. 제 7, 8구에서는 한가한 때는 언제든지 놀러와 주시오 하는 마을 사람들의 기분을 읊고 있다. 요즘 말로 <이곳을 찾아 주심을 환영합니다.> 하는 마음이다.

 

작자

육유(陸游)(1125-1209)

 

남송의 시인이다.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이다. 월주산음(越州山陰)(절강성소흥/浙江省紹興) 사람이다. 29세에 과거 성시(省試)에 합격했는데, 당시의 재상인 진회(秦檜)의 방해로 전시(殿試)에는 불합격했다.

당시 남송 조정은 화북을 점령하고 있던 이민족인 금(金)에 대한 화친론자와 항전론자가 대립되어 있었다. 그는 열렬한 항전론자였기 때문에 관료로서는 출세하지 못하였다.

그는 젊어서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강서파(江西派)의 기교적인 시작법을 배웠으나 기주(夔州)에 부임할 무렵부터 강서파를 떠나서 장대하고 활달한 독자의 시풍을 만들어내어 남송 시단의 제1인자라고 불려졌다. 놀라운 다작가로서 작품은 1만 4천수에 달한다고 하는데, 현재에도 1만 수 정도가 남아있다. 그의 작품은 율시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것은 율시가 요구하는 형식상의 세세한 규정을 따르면서도 자유자재의 작풍을 만들어내고, 특히 대구를 만드는 솜씨가 교묘함에 높이 평가를 받는다. 그의 고시(古詩)는 힘 있고 분방한 취향을 지니고 있어서 ‘소이백(小李白)’이라고도 불려진다.

그의 시의 내용을 분류한다면, 이민족인 금을 타도하려는 민족주의적 정신의 고양을 나타내는 것, 자신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늙어 가는데 대한 연탄, 향리의 자연이나 농촌 생활에 대한 깊고도 섬세한 애정을 표현 한 것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전원을 사랑하는 은둔적인 시인이라고도 하고, 열렬한 애국 시인이라고도 한다. 그는 범성대(范成大), 양만리(楊萬里) 등과 함께 남송의 삼대시인이라 일컬어진다.

시집은 <검남시고(劍南詩稿)>외에 역사서로 <남당서(南唐書)> 8권, 수필집 <노학암필기(老學菴筆記)> 10권, 기행문 <입촉기(入蜀記)> 6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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