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誡命 / 律法 / 福音 스크랩 산상보훈강해(3) 사랑과 율법 [나두산목사]
總會神學大學校 추천 0 조회 31 14.07.22 22: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기독넷에서 펌]

 

산상보훈강해(3) 사랑과 율법

[나두산목사]

 

제목: 사랑과 율법
성경: 마5:17-20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 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17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율법과 구약성경을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완선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밝히고 계신다.

기독교는 한쪽만 보면 위험성이 있다.
구원파들 처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자유하게 살아야 한다. 라는 논리가 위험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네(Heine)는 “신의 일은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생애를 어찌 살았던지 신은 용서 할것이다”라며 기독교를 냉소적으로 표현 했다.
루터는 또한 로마서를 읽으며(1515년 또는 1516년) 하나님의 공의와 칭의와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기를 그렇게도 소원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을 하나님이 공의로우셔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그리고 죄인인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공의로우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미워했고 불평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나는 밤낮 묵상하면서 그 뜻을 이해하기를 원했다. 드디어 ‘하나님의 공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란 말을 연결시킴으로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이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인 것을 깨달았다.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 나는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마치 천국의 문이 열려서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이제 모든 성경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나의 마음 속에 미움으로 가득 채웠으나 이제는 너무나 달콤한 사랑으로 채워준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이 나에게 천국으로 가는 문이 되었다.”
루터는 이 진리를 깨닫고 종교개혁을 일켰으며 무소불의의 교황과 맞섰다.
그러나 [이신득의]라는 진리는 진리이다.
그러나 문제는 루터의 말을 듣고 개혁에 동참한 사람들은 오해하여 “어떻게 살아도 하나님은 용서 하신다”라는 식으로 받아 드려 도덕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생각은 자유이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이 생각대로 오해하시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1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하셨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해서 율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의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

1) 사랑은 방종이 아니다.

자신의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마음대로 사는 자녀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진정한 교사는 학생들의 방종을 용서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규칙(율법)을 만들고 행동을 제약하고 궤도를 가르쳐 주고 버룻을 잡아 주고 꾸지람과 벌을 준다.
만일 아이들이 칼을 가지고 놀면 내버려 두고 먹고싶어 하는 것만 먹게하면 먹게하고 행해야 할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그냥 둔다면 그 아이가 행복해 질 수는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만든 율법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더 완전하게 만드는 사랑 운동을 일으켰다.
바울은 율법을 가정 교사라 하였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4절)  그러나 가정교사는 아이가 자라면 역할은 끝난다.
마찬가지로 율법으로 인하여 자신을 알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달으면 이제는 예수의 사랑을 이해한 수준에서

벗어나 실천하는 단계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셨다고 했다.

2) 죄를 깨닫게 해주기 위하여 율법이 필요하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갈3:19절)라고 바울사도는 밝혔다.
즉 죄를 밝히려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예덴 동산은 사랑의 동산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샬롬이 가득찬 곳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가운데에 금단의 열매를 두셨다. 이것이 율법이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서 마음대로 살 수 있도록 했지만 인간의 양심을 지키면서 일깨워 주기 위한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나 죄는 가책과 법만으로 해결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율법은 죄를 들추어 내는 것이며 그것을 덮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는 곧 예수님이므로 예수는 율법의 완성자이다.
일본의 도지샤(同志社) 대학에서 몇몇 교수 퇴출을 위하여 학생들이 데모스트레이션을 일으켰다.
그때 총장이었던 니이지마 죠 교수가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종아리를 치며 책임자로서의 잘못을 빌자 소요 사태가 해결 되었다.
법을 시행하는 동시에 사랑이 그 법을 마무리 짓는 해결이었다.
예수님를 통하여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의(율법)과 사랑(은혜)이다.

3)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율법의 근본 정신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절)고 하셨다.
율법학자는 율법을 연구하는 전문가요 바리새인은 율법을 실행하는데 철저한 사람들이지만 그 학식과 실행은 형식을 갖추는 껍데기 율법이며 정말 그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링컨은 이런 말을 남겼다.
“옛날 옛적에 사람들이 조용한 생활을 할 당시의 법을 오늘날과 같은 격동하는 변화기에 그대로 적용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시대에 맞도록 살아야 합니다”(1862년 국회 개회 연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율법사나 바리새인처럼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하고 기계적으로 답습하여 조목조목 지키는 곳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순종을 위하여 율법이 있는 것이다. 산상수훈을 주님이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표현하는 의식이다.
봉사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예배는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즉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 어린양 그리스도께 바치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명예를 포기하는 순종을 가리킨다.
예수의 최고의 기적은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한 것이었다.
이때 사람들은 저 사람이 뉘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 하는가?하고 고백하였다.
자연까지 순종하는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자였던 것이다.

4) 율법을 온전케 하는 것은 사랑이다.

율법이 지적하여 주는 양심의 가책과 죄에 대한 책임을 무엇으로 치료 할 수 있나?
빚을 지면 그 빚과 이자만큼 갚으면 되지만 부모에게 진 빚은 갚을 길이 없다. 사랑의 빚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상처를 남긴 것에 대하여 율법 몇가지 잘 실천 했다고

몇가지 좋은 일 했다고 보상 되지 않는다. 오로지 화해의 길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넓으신 사랑 밖에 없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율법이 요구하는 댓가를 치루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람하게 길을 열어서 율법을 완성 시킨 것이다.
욕을 하랴 축복을 하랴
미국에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etro Goldwin Mayer)라는 유명한 영화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 설립자는 회사 이름의 끝자인

메이어(Mayer)입니다. 메이어가 어렸을 때 친구와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메이어는 친구에게 맞고 집에 돌아와 분통을 터뜨리며 친구를 욕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메이어를 산으로 데리고 가 친구 욕을 실컷 하라고 합니다. 메이어는 산을 향해 소리칩니다. “나쁜 놈아. 못된 놈아.” 그런데 이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자신에게 10배의 소리로 되돌아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이번에는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신다”고 외쳐보라고 말합니다. 메이어가 그렇게 말하자 동일하게 메아리가 자신에게 축복의 말로 되돌아옵니다.
그때 메이어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남을 향해 한 번의 욕을 하면 그것이 10배로 되돌아오고 남을 한 번 축복하면 10배로 축복이 되돌아온다.” 메이어는 이 교훈을 평생 마음에 새기고 MGM이라는 큰 영화사를 세우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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