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반야심경 15강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소승불교 교리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 중
하나가 12처설입니다.
12처는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인 안이비
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
(色聲香味觸法)을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작용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안다는 게 별 거 아니에요. 앎이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육근과
육경이 만나서 형성된 것이라는 것이
12처설입니다.
그런데 당시 소승 불교인들은 12처설을
또다시 요소설로 이해한 거예요.
색이란 실체가 있고, 성향미촉법,
안이비설신의 역시 각각 다 실체가 있는 걸로
생각한 겁니다.
세상 속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실체가 있다’ 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지만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 보면 해가 뜨고 해가
지니까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장은 12처 앞에 무(無) 자가 각각 다
붙어 있는 것인데, 무(無) 자가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12처설의 요소화, 실체화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 문장은 18계설의 요소화, 실체화를
부정하는 내용입니다.
일체가 12처라면, 같은 것을 눈으로 보고,
같은 것을 귀로 들을 때,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알아야 되겠죠.
그런데 제가 지금 강의를 하는 중에도
여러분들이 똑같은 목소리를 듣고 똑같은
모습을 보지만 여러분들 각자 받아들이는
게 다르잖아요.
이것은 12처설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법륜스님 얘기를 듣고 알았고, 법륜스님
모습을 보고 알았다.
아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인식
기관과 인식대상이 만나서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12처설로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왜 사람마다 아는 것이 다른지는
12처설로 설명이 안 돼요.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결과가 똑같이
나오는 것 같지만, 흑백으로 찍는지, 칼라로
찍는지, 카메라 성능이 어떠한지에 따라
사진이 다르게 나오잖아요.
그렇듯이 사람마다 각각 인식을 할 때 그
바탕이 되는 ‘식’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알게 됩니다.
그걸 업식이라고 해요. 볼 때도 업식이
작용하고, 들을 때도 업식이 작용하고, 냄새
맡을 때도 업식이 작용합니다.
똑같이 된장찌개 냄새를 맡아도 업식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수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역겹게 느끼게 됩니다.
냄새에 객관적인 실체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껴야겠죠.
이렇게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코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고, 된장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각각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업식 역시 형성된 것입니다.
업식은 볼 때도 작용하고, 들을 때도, 냄새 맡을 때도, 맛볼 때도, 감촉할 때도, 생각할 때도 작용합니다.
그래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이렇게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
미촉법(色聲香味觸法), 여기에 더해서 안식
(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까지
이렇게 18가지가 일체라고 보는 것이 18계설입니다.
오온설은 약간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면, 12처설은 약간 객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쪽을 보완해서 나온 것이
18계설이에요.
대승불교가 일어날 당시 기존 불교는
18계설을 18가지 요소설로 이해했습니다.
요소설은 각각이 실체가 있는 근본 종자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실체가 있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18계를 다 나열하지 않고, 첫 번째와 마지막
것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해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렇게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