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大)씨의 시작과 종적은 어떻게 되었을까.
"속말말갈은 고구려 백성이었고, 성은 大씨 이었다.
대진국을 세운 말갈부(靺鞨部)의 말(靺)은 마루(宗), 머리(頭), 말(大)이고,
갈((鞨)은 일본 말 가라(韓)와 같아서 한(一, 大, 王)이다.
즉 말갈은 대왕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大), 한(大)을 발해나라 왕의 성씨로 삼은 것이다"고
朴時仁은 알타이 신화(神話)에 썼다.
허목(許穆 1595-1682)은 옛 발해의 세자 광현(光顯)이 대신들과 함께
고려로 망명해 오니 고려에서는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리고,
종적(宗籍)에 붙여 태씨(太氏)로 하여금
그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고,
그가 쓴 기언(記言) 제34권 원집(原集) 외편
동사(東事) 말갈(靺鞨) 편에 남겼다.
고려 고종 2년인 1218년 최충헌이 무사의 인심을 얻고자
낭장 대집성(大集成) 등 다섯 사람을 차장군(借將軍)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보여 태씨 사성과 더불어
대씨의 종적은 별도로 계속 이어 왔음을 보여 준다.
대집성은 1228년 대장군에 이어
다음 해 법관, 후군진주(後軍陳主) 상장군이 되고,
1232년 고종 19년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승차된다.
어사대(御史臺)의 으뜸 벼슬인 어사대부의 품계는 정삼품으로
사헌부의 대사헌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이 시기는 무신정권의 절정기로 1232년 2월
그의 딸이 최우(崔瑀)의 계실(繼室)이 되므로써
그 또한 절정을 맞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기록은 고려사절요 외에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에도 보인다.
1251년 고종 38년인 3월 최우의 서자이며 집권자가 된
최항(崔沆)이 계모(繼母) 대씨(大氏)를 시해(弑害)하고,
그 일족을 멸하였다는 동사강목 제11상 내용과
고려사절요 제18권 원종 9년인 1268년
주영뢰(周永賚)의 아내가
대씨(大氏)였다고 밝힌 내용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 대씨의 종적이 유지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금사(金史)를 인용한 해동역사(海東繹史) 인물고(人物考) 편에,
“금나라 폐제(廢帝)의 원비(元妃) 대씨(大氏)는 발해 사람 대호(大昊)의 딸이다.
폐제의 어머니 대씨는 대호천(大昊天)의 딸로, 역시 발해 사람이다.
폐제의 궁인(宮人) 고씨(高氏)는
동경(東京)에 사는 발해 사람 고존복(高存福)의 딸이다.
이들은 모두 《금사》에 나오나, 발해국이 망한 뒤의 사람이므로
모두 입전(立傳)하지 않았다.”고 한 기록으로 보면,
대씨는 금나라 왕통을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위 기록 외에는 전무하다.
이로 보아 대씨는 태 성씨로 변성이 된 것으로도 보인다.
국내 태씨는 현재 협계(浹溪), 영순(永順), 밀양(密陽),
남원(南原), 통천(通川) 등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또 협계 태씨는 주(周) 나라 태전(太顚)의 후예라고도 하고,
기록상에는 발해국왕 대조영(大祚榮)의 후예라고도 한다고
그 후손들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편에는
영순폐현(永順廢縣) 본주(本州)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이다.
고려(高麗) 때에 촌 사람 태씨(太氏) 성을 가진 자가
도둑을 잡아 공이 있으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승격하여 현을 만들어서 그대로 붙이었다.
주 북쪽 35리에 있다고 썼다.
황제국, 대륙을 호령했던 대호(大虎)의 기상
발해국은 영욕의 뒤안길로 머물고 마는 것일까.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행운이 만당하시길 바랍니다.
명태가 명천의 태서방이 잡아서 명태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태씨는 많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 선생님께도 맑고 밝은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