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지도와 그림은 오늘 소개해드릴 1943년에 동부전선에서 치뤄진 끔찍한 대량 살상 전투이자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 쿠르스크 전투(독일명 "성채 작전")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밑에서 하나 하나 짚어가며 설명드리겠지만 얼핏 보아도 다음 사항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아! 맨위 지도에서 쿠르스크 동쪽으로 스탈린그라드가 보이는 것을 보니 1943년 1월말에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끔찍한 패전을 겪은 다음 이야기겠군. 결국 독일군이 서쪽으로 밀리다가 쿠르스크라는 곳에서 소련군과 巨하게 한판 붙었나보군!
둘째, 쿠르스크 전투 지역을 확대한 상세 지도가 좌측 하단의 지도인 것 같은데....원~ 글씨가 작아서 안보이지만 얼추 보아도 양국의 병력들이 집결해서 엄청 대규모로 충돌한 전투인가 보네!
세째, 가만! 오른쪽 하단에 탱크 사진들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양국이 투입한 탱크들 같은데, 어이구! 드디어 타이거와 판터가 등장하는군! 게다가 엘레펀트도 눈에 띄네? 소련측은 그 대단한 名전차라고 꼽았던 T-34가 드디어 활약을 하나보군. 2차대전의 최고의 전차들이 (미군 셔먼 전차만 빼고) 거의 다 등장하는구먼!
뭐 이정도가 위의 예고편 격의 그림을 보고 대충 감을 잡으실 수 있는 내용들일 것입니다. 자! 지금부터 단 1.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양측 합해서 무려 110만명이 넘는 사망자와 8,000대 이상의 전차들 그리고 2,000대가 넘는 전투기들이 격추되는 엄청난 대전투가 시작되겠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독소전쟁에서 독일은 다시는 제대로 공격다운 공격을 못하고 2년 후에 베를린이 함락되며 제3제국의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각설하고, 우선 쿠르스크 지역의 지도를 좀 자세히 보시면, (아무리 귀찮아도 지도와 친해지셔야 전투 상황이 이해가 되고, 맥이 잡힙니다.)
지난 글에서 1943년 1월말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의 항복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후 남부 전선에서 승기를 잡은 소련군의 반격으로 독일군은 위에 지도에서 보듯이 쿠르스크에서 전선을 형성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위의 세부 지도를 참고하시면,
쿠르스크 전투(독일명 "성채 작전")를 통해 독일이 취하고자 했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위에 지도를 보면 오늘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쿠르스크라는 곳은 마치 "ㅓ"자를 보는 것처럼 서쪽으로 볼록 튀어난 소련군 점령 지역에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 이후에 남부 전선에서 승기를 잡은 소련군은 총공세를 시작하여 순식간에 서쪽으로 전진하여 독일군은 쿠르스크 근방까지 밀리게 되지만 쿠르스크 남쪽에 하르키우를 다시 탈환하게 되자 위에서 보는 것처럼 서쪽으로 돌출된 형태의 전선이 형성되게 된 것입니다. 독일군이 1943년 7월부터 8월 사이에 전개한 "성채 작전"은 바로 이돌출부를 중앙 집단군으로 하여금 북쪽을 치고, 스탈린그라드 항복으로 급격히 약화된 남부 집단군이 다시 충원되어 편성된 남부집단군이 남쪽에서 치고 올라와서 양쪽에서 협공으로 점령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B라고 마크 된 곳이 쿠르스크이고 남쪽에 하르키우가 보입니다. 1943년 1월말 스탈린그라드
항복 이후에 서쪽으로 밀리던 독일군이 다행히 쿠르스크 바로 남쪽에 하르키우를 탈환한 덕에
서쪽으로 돌출한 전선을 형성하게 되는데 만약 쿠르스크를 탈환한 후에 동남쪽으로 향하면
스탈린그라드와 코카서스 유전지대를 다시 점령하기 위한 기회를 노릴 수 있을 것이고, 복쪽
으로 방향을 돌리면 모스크바 후방 공격으로 다시 한번 모스크바 함락을 위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쿠르스크 전투의 전략적인 중요성이었습니다.)
남부집단군의 사령관 폰 만슈타인 원수는 1943년 5월에 공격을 계획했는데 더 늦어지면 땅이 녹아서 소련군들이 참호를 깊게 파고 방어선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으므로 단 하루라도 빨리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를린에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이후 소련군에 대한 공포심으로 만슈타인 원수의 공격을 멈추게 하고 기갑부대의 보충과 재편성이 완료되는 6월에 공격을 시작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깐만! "집단군"이란?
정말 그동안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을 자제했는데 이유는 2차대전사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한테 도리어 혼란을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단군"이라는 개념입니다. 히틀러는 독소전쟁을 시작하면서 북부집단군,중부집단군,남부집단군 이렇게 세개의 커다란 육군 부대를 편성하여 세방향으로 소련을 쳐들어갑니다.
여기서 "집단군"의 정의는 보통 40만명~150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의 다수의 야전 부대들을 대장이나 원수의 지휘 체계에 두고 특정 전투 지역의 전투를 책임지고 무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부대 단위를 의미합니다. 결국 부대 편성 단위 중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할 수 있으며 2차대전 중에 소련군이나 독일군 정도가 제대로 운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단군 하나가 거의 왠만한 나라의 전체 군대 병력보다 클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거대한 규모의 편성은 왠만한 국가에서 쉽지 않을 수 밖에 없었지요. 독일의 각 집단군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한편 소련군 역시 현재 전선에서 독일군을 박살내면 어렵게 잡은 승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군이 다시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 수 없도록 주력 병력을 궤멸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동안 점령당했던 소련 영토를 수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의 원흉인 베를린에 히틀러를 실권시키고 독일을 공산화 시켜서 소련의 위성 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야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에리히 본 만슈타인 원수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이 그러했듯이
동부전선에서 뛰어난 독일의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결국은
나치 독일의 패망과 함께 가장 불운한 영웅으로 평가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북쪽과 남쪽으로 병력을 집결하며 본격적인 협공을 계획하자 소련군 역시 총력전으로 이곳에서 독일과 결전을 벌일 준비를 하게 됩니다.
스탈린과 소련군 총사령부는 현지 사령관 주코프로 하여금 소련 역사상 최대의 방어 작전을 준비하게 합니다. 즉 총 3,000마일이 넘은 십자형 참호를 만들고 (당시 소련군의 참호를 파는 기술은 독일군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서 만슈타인 원수는 후퇴 후에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에 참호를 팔 시간을 주지않고 최대한 빠른 시간에 반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거듭 강조했다고 합니다.) 무려 40만개의 지뢰를 매설할 정도로 철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소련군 총 인력의 40%와 기갑 부대의 75%를 이 지역에 투입되었을 정도여서 만약 쿠르스크에서 독일이든 소련이든 패배를 한다는 것은 향후 전쟁의 전개에 엄청나게 커다란 변수가 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중에 작전을 설명 중인 소련군 장교와 부대원들)
즉, 양쪽 어느 쪽이든 승리했을 때 향후 얻을 수 있는 전략적인 잇점도 엄청났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패배했을 때 패자에게 돌아올 끔찍한 상황도 생각조차 하기 섬뜻할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소련군은 언제 독일군의 총공세가 시작될 것인가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지속적으로 전투기로 독일군 진지와 비행장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무려 500대의 독일 전투기를 3회에 걸친 비행장 공습으로 파괴하는 대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이 성공은 영국 정보부에 심어둔 소련 스파이가 제공한 동부전선에 독일 공군 기지의 세부 정보를 입수한 결과입니다. 히틀러는 5월 중순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보급의 부족으로 롬멜 군단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슈타인 원수에게 6월로 연기했던 쿠르스크 총공세(독일명 "성채 작전")를 다시 7월로 연기하고 좀더 보급 지원을 받을 것을 명령합니다.
최종 총공세 일시는 7월 5일 3시로 결정되는데 여기서 공세 시간에 임박했을 때 소련군의 포로로 잡힌 독일군 병사들이 정확한 총공세 시간을 실토하게 되면서 주코프 사령관은 독일이 계획했던 3시에서 1시간 전에 항공 공습과 포격으로 선공을 퍼붓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쿠르스크 대전투는 막을 올리게 됩니다.
북쪽 전투 상황
독일군은 소련군의 선공에 초반에 무척 당황하였지만 그 공격이 단순히 방어적인 자세에서 독일군 공격의 예봉에 치명타를 가하는 목적이지 총공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되지 쿠르스크 전투에 최초로 투입하게 되는 타이거 전차를 앞세워서 7월 5일 오전 4시 30분에 본격적인 총공세를 시작하게 됩니다.
소련군은 보병 병력133만, 대포 2만문, 전차-자주포 3,600대, 항공기 3130대로 독일군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규모였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독일과 소련의 전차 대결 국면이었습니다. 독소 전쟁 초기에 독일의 3호전차와 4호전차가 보여준 전격전의 위력은 소련군에게 절망감을 안겨줄 만큼 효과적인 공격이었습니다. 하지만 T-34와 KV-1으로 대표되는 소련 기갑부대의 강력한 신형 전차들의 강력한 철갑과 독일을 압도하는 주포의 화력은 더 이상 3호와 4호 전차들은 독소전쟁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하게 됩니다. 여기서 독일 전차의 최고봉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타이거 전차의 출현은 소련 신형 전차들에게 뜻밖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독일은 대전 초기에 1호 전차에서 4호 전차까지 꾸준한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프랑스 침공 작전에서 마주친
영국의 마틸다 전차와 독소전쟁에서 등장한 소련의 T-34와 KV-1과 기갑전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전차들이
무력하게 파괴되는 경험을 하면서 그동안 축적된 기술을 총동원하여 최강의 화력과 방어 능력을 갖춘 타이거
전차를 개발하게 됩니다. 타이거는 소련 전차들을 강력하게 제압할 수 있는 최강자임은 확실하였지만 문제는
저조한 생산성으로 전선에 투입되는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게 되었습니다.)
북쪽에서 공격에 들어갔던 모델 원수의 독일 제9군의 기갑부대는 첫날 약 6.5km를 전진하는데 성공합니다. 다음날, 그는 더 많은 전차를 들여와 고작 10km의 너비의 전선을 공격을 이어갔는데 소련 예비 기갑부대의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7월 7일, 독일 기갑부대는 9km를 전진하여 "포늬리"라는 마을에 도착하고 이어서 8일엔 "올호바트카"로 진격하였지만, 진격하는 도중 마을로 들어가는 접근로가 좁아 많은 전차들이 몰려 우왕좌왕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소련 급강하 폭격기와 포격에 전열이 흐트러지고 많은 전차를 잃게 되는데 작전 5일째인 7월 9일, 북쪽의 독일군은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한계에 이르게 됩니다. 5일동안의 첫 공세를 통해서 제9 기갑부대는 겨우 15km밖에 전진하지 못하게 됩니다.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된 SS기갑부대 소속 3호전차, 소련 신형 전차에 비해서 턱없이 열세인 방어 능력과 화력으로
3호 전차, 4호 전차는 더 이상 전력 우위를 점할 수 없는 기종이었지만 용감한 SS 기갑부대는 뜻밖의 전과를 올리는
용맹을 보입니다.)
남쪽 전투 상황
한편 남쪽에서의 전투 상황은 호트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의 제4기갑군이 바투틴 장군의 소련군을 공격하며 시작한 총공세에서 나치 친위대 SS소속 기갑부대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이틀 만에 쿠르스크 방어지대의 핵심지역인 "쿠르스크-오보얀 도로"를 향해 30km나 전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7월 7일을 기점으로 SS기갑부대의 공격은 점점 한계에 다다르게 되고 소련 제1전차군의 강력한 반격을 맞닥뜨리게 되자 더이상의 전진은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타이거 전차와 마찬가지로 판터 전차도 독일의 신형 전차로써 쿠르스크 전투에서
처음 전투에 참가하게 됩니다. 여러 면에서 소련의 T-34를 참고했다고 평가되는
이 새로운 중형 전차는 타이거 전차처럼 부족한 생산 물량으로 한정된 성과밖에
올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계적인 결함으로 잦은 고장이 전선에서 무용지물로
되는 수가 많았습니다.)
7월 9일부터 14일까지가 쿠르스크 전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SS 기갑사단들을 앞세운 독일기갑부대가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500대가 넘는 중전차들을 앞세워 진격하였는데 이에 7월 6일에 스탈린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에게 생일축하 겸 직접 전화를 하면서, 그에게 귀중한 예비 병력의 일부를 주고 쿠르스크의 현재 방어선을 사수를 위해 신속히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7월 7일부터 사흘간 소련 근위기갑부대는 무려 370km이 넘는 거리를 독일의 수트카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을 받으면서 밤낮으로 행군하여 7월 10일에 전선에 도착하게 되는데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된 소련군 총사령관인 주코프 원수는 밤낮을 달려온 근위군기갑부대 사령관 로트미스트로프 장군에게 T-34가 독일측의 신형 전차인 타이거와 또 하나의 신형 전차인 판터에게 화력에서는 열세이지만 기동력이 우세하니 "기계화 부대의 백병전"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는 원거리의 포격 공격이 아니라 근거리에서 재빨리 이동하면서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독일측 전차들의 측면이나 후미를 포격하여 파괴하는 문자 그래도 근거리 포격전을 의미합니다.
(타이거 전차에 탑승한 나치 친위대 기갑부대원, 애초에 히틀러 경호 부대로 창설된
나치 친위대 조직은 기갑부대까지 편성되어 독소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되지만 나치가 패망을 하면서 그들의 운명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사실 타이거 전차가 보유한 88mm 주포는 롬멜이 프랑스 아라스 기갑전에서 영국의 강력한 철갑의 마틸다 전차를 무력화 시킨 강력한 파괴력의 88mm 대공포의 화력과 동일한 수준이었으며 사거리에 있어서도 감히 쫓아올 상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3호 전차나 4호 전차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T-34나 KV-1이라고 하더라도 원거리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하는 타이거 전차를 거리를 두고 상대하려면 마치 팔 길이가 큰 차이가 나는 두 권투선수의 게임처럼 일방적으로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기계화 부대의 백병전"이라는 아이디어는 무식하긴 하더라도 당시 독일 신형 전차들을 상대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을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타이거 전차가 원거리에서 정확히 적의 전차를 명중시키고 있습니다.)
7월 12일 아침, 150대 ~ 300대 가량의 독일군 전차와 630여대의 소련군 전차가 교전을 하는데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이었으며 역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었습니다. 이는 향후 성채작전의 결과, 그리고 더 나아가 독일의 동부전선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칠 전투가 됩니다.
이 날, 겨우 3제곱 킬로미터에 불과한 좁은 지역에서 수백대의 전차가 뒤엉키며 격돌하였는데. 소련군 전차들은 독일 전차들을 타격하기 위해 차체를 들이받으면서 근거리에서 포격을 하였으며, 이런 충돌로 멈춰버린 독일군 전차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마지막까지 포격을 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곤 하였습니다. 심지어 전투 불능이 된 전차에서 튀어나온 기갑병들이 상대편의 전차에 포탄을 던지는 등 전투는 정상적인 전차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혼란스럽고 아비규환의 살육전의 양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 하루 동안의 단일전투에서 양측이 합쳐서 약 7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었으며, 독일군은 더이상 전진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비록 소련군이 방어에 성공했지만 워낙 엄청난 피해로 인해서 더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인 상황이 됩니다. 다음날도 계속 전투가 진행되었지만 이는 소규모에 불과했으며, 독일군의 진격은 소련군측의 재빠른 방어에 번번이 좌절되게 됩니다. 7월 13일, 로트미스트로프에게는 증원군이 계속 도착하긴 했지만 기동 가능한 전차의 수는 50대밖에 없었고 병력은 반으로 줄어있었습니다.
7월 10일, 서방 연합군이 이탈리아 시실리에 상륙하게 되자 히틀러는 귀중한 SS기갑부대를 남부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게 됩니다. 7월 13일, 성채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고, 호트 장군을 비롯한 휘하 장군에게는 성채작전 이전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결국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는 7월 15일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끝마치게 됩니다.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는 독일군뿐만 아니라 소련군 측에도 끔찍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한 예로 스탈린의 명령으로 선봉에 섰던 로트미스트로프 장군의 근위기갑부대는 애초 500대의 전차가 고작 50대만 남으면서 간신히 방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실 쿠르스크 전투 후에 소련군은 이겨도 이겼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상황이 되었지만 히틀러는 소련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우수한 물자 생산 능력과 전쟁 수행 능력을 가졌다고 과대 평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 전선에서 수백킬로나 서쪽으로 밀려간 드네프르 강까지 독일군 병력을 총퇴각시키는 명령을 내리게 만듭니다.
훗날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했던 소련 기갑 장교의 회고를 보면 그 당시 끔찍했던 "기갑부대의 백병전"의 실상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후에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독일군의 패배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는 1943년 7월 5일부터 8월 23일까지 계속됩니다. 비록 독일은 성채 작전을 7월 13일에 취소하였지만 쿠르스크 지역에서의 살육전은 8월 23일까지 양진영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게 되는데 위키피디아 한국판에 게재된 성채작전(1943년 7월 5일~13일)과 쿠르스크 전투(1943년 7월 5일~8월 23일)까지의 피해 상황을 보여드립니다.
8월 23일까지 계속된 쿠르스크 전투의 수많은 단일 전투들을 일일이 설명드리는 것은 자칫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지루함을 드릴 가능성이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초기 성채작전을 중심으로 소개해드렸습니다. 이후 짧게 짧게 "독일 전차부대 에이스"나 "SS 기갑부대의 활약" 또는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활약"등을 설명드릴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한번 설명드릴 기회가 있겠지요.
첫댓글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최대의 전차전이였군요 소련이 이겼지만 피해는 독일보다 어마어마 하군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구요. 저희 가게 평일은 자정에 문 닫고, 주말에는 철야 개업합니다. 지금도 새벽 4시가 다 되어 오는데 가게 지하실에 사무실 PC 앞에 앉아서 글을 올렸습니다. 20년 가까이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가 자영업을 시작한지 2년이 되어옵니다. 내 장사하면 이사람 저사람 눈치 볼 일 없어서 좋긴 한데 자기 시간 여유 갖기가 좀 힘든 것이 안좋습니다. 덕분에 컴프레써 사놓고 아직 개시도 못하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제작기도 좀 올려보고 싶은데..... 어쨌든 일주일 가까이 틈틈이 써온 글 올립니다. 좀 더 길게 쓰려고 해도 보시는 분들이 지칠까봐 걱정이 되어서 잛게 줄인다는 것이 이정도 분량이니 원......
따블오남편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사업잘되시길 바랍니다 ^^ 저는 마침 부산가는 기차여서 정말 재미있게 정독했습니다
글을 읽을수록 편집능력이나 이야기를 써나가는 구성력이 너무나 뛰어나십니다
이렇게 글자많고 어지러운 내용의 글을 정독하는법이 제가 잘 없는데 이 이차대전 이야기 만큼은 토시하나 안빼고 정독합니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다음 글은 드디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정하려고 합니다. 지속적인 응원 부탁드립니다.
일차대전 상병출신따위의 독재자가 전쟁을 지휘 하면서 독일은 이미 패배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수가 바둑을 두어도 이길지 질지 시원치 않을 판에 프로도 아닌 아마추어 실력도 안 되는 기수가 바둑을 해버린 격이지요. 롬멜도 만슈타인도 모델도 모두 그의 지휘를 무척이나 싫어 했고 의견 충돌 또한 잦았지요. 물론 소련의 엄청난 물량도 한 몫 하긴 했지만 만약 전장의 지휘가 장군들에 의해서 진행이 되었다면 지더라도 좀더 오래 갔거나 아니면 우리는 지금 독일말 혹은 일본말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참 다행이지요.항상 재밌는 글 잘 보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옳은 말씀입니다!
사실 독일의 성채 작전이 실패로 취소된 7월 13일 이후 8월까지 벌어진 전투들도 어마어마 합니다만 너무 한주제를 가지고 글의 분량이 커지면 읽는 분들 입장에서 따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성채 작전 중심으로 글을 쓰고나니 못내 아쉽네요. 하지만 일단 전체 골격을 잡아놓고 후에 다시 집중 탐구해나갈 기회가 있을 것이라 보고....
정말 모르던 일들이 이렇게 많군요, 너무 재미있고 유익한 글입니다. 카페가 더욱더 풍성하고 유용한 모습입니다. 프라모델을 몰라서 가입만 해 놓고 망설이고 있는데 한번 만들고 싶어집니다. 새해 복 많이받으시고 계속 연재 부탁드립니다. 여기는 미국이거든요 외국에도 독자가 있습니다.
어휴! 미국 어디 사세요? 여긴 뉴저진데!
내 저는 메릴랜드입니다. 저도 뉴저지에 살았었는데 어디죠? 여하튼 바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릿지우드라면 아실까요? 어쨌든 북쪽입니다.
이 글이 올라오자 마자 Kursk 전투 다큐멘터리를 찾아놨습니다만, 이번 주말에 보다가 잠이 들어버렸네요.
정말 무지막지했던 전투였던 것 같습니다.
타큐멘터리에서는 두리뭉실 CG 처리 되어있던 전차들을 이렇게 자세한 자료로 다시 보니 정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탱크 백병전이라니... 끔찍합니다. 그런데, 요 당시 양국의 비행기들은 뭔지도 조금 궁금해지네요.
나중에 전투기들도 한번 흝을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