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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馬韓)에서 진한(辰韓)·변한(弁韓)이 나왔고 백제(百濟)가 나왔다. 우리 고대사의 원뿌리인 셈이다. 일본에서 백제(百濟)를 칭하는 구다라(くだら)도 馬韓을 상징하는 「매(鷹)」에서 비롯되었다. 마한이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임을 말해준다. 마한은 6세기 중엽까지 한국사의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백제의 마한」으로 인식하는 등 올바른 평가를 하지 못하였다. 馬韓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식민사학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통념이 주된 이유였다. 무등일보는 2017년 1월부터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라는 연재를 통해 馬韓史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가야사 복원을 강조한 대통령의 발언도 본보의 이러한 움직임에 힘을 보태, 마한사 연구·조사·개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마한의 중심지는 차령산맥 이남이다. 영산강 유역의 수많은 유적·유물들은, 「영산지중해」의 마한연맹체들이 「영산르네상스 문명」을 창조해냈음을 말해주고 있다. 본보는 미처 다루지 못한 마한 諸國의 다양한 문화특질들을 심층적으로 살펴보려한다. 한국고대사의 원류가 「마한」에 있음을 확인하려 하는것이다. 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을 맞아 《박해현의 새로 쓰는 마한사》는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사의 정체성을 밝히는 의미있는 작업이 될것이다. 많은 격려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무등일보 2019/04/23(화) 00:00 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1〉 영산지중해 馬韓 한국 고대사의 원류는 영산지중해 〈마한왕국〉에 있다 영암 시종면 옥야리 방대형고분 마한사(馬韓史)는 점차 역사에서 사라지고 있다. 2018년 광주교육청에서 발행한 인정 교과서에 馬韓史가 완전히 누락된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2018년 전라도 定名 천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전라도 천년사》 목차를 보아도 〈王仁博士〉 항목은 보이지 않고,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은 있지만 영산지중해 입구에 있는 〈남해신사〉 얘기는 없다. 영산강 유역의 마한도 「옹관묘」「고총고분사회」 등으로 편목되었을 뿐, 독자적 정치체는 설정하지 않았다. 최근 경남 김해를 지역구로 두고있는 국회의원이 〈역사문화권정비등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발의를 하였다. 〈마한〉을 배제한 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4개 문화권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우려는 광주교육청이 펴낸 역사 교과서에 마한 관련내용이 누락될때 예견되는 바였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마한 중심지가 영산강 유역이었음을 강조한 필자의 평소 지론을 정리하며 새로운 논리의 근거로 삼게 하고 싶다. 부여·공주에는 없는 대형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시종·반남 일대 거대한 고분군들은 이들 지역에 大國이 있었을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해남·강진 일대의 〈침미다례(忱彌多禮)〉, 〈영산지중해〉의 내비리국(內卑離國), 영암 지역 〈일난국(一難國)〉, 다시들 유역 〈불미국(不彌國)〉 등이 그들이다. 〈응류(응준)〉로 상징되는 마한연맹체도 버티고 있었다. 이곳에는 재지적인 요소에 樂浪, 百濟, 伽耶, 倭 등 여러 지역 문화요소가 융합되어 나타난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곧 독자적인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예컨대, 백제, 일본 토기와 비교하여 뚜렷한 지역적인 특색이 있어 일본에서조차 〈영산강식 토기〉라고 부르는 토기가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만 출토된 토기에서 나타난 「집흔」자국이 있는 독특한 문양을 가진 이 토기는 5세기 후반에 완성되어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영산강 유역의 특질을 지닌 〈승석문 토기〉가 영산지중해 일대를 중심으로 출토되고 있다.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金銅冠의 보주(寶珠)가 달린 3단의 가지 장식은 백제나 신라 양식보다는 伽耶나 倭 계통에 가깝고, 같은곳에서 출토된 환두대도 또한 기본형은 백제 형식이지만 환내도상을 별도로 끼워놓은 것은 대가야 것과 유사한데다 제작기법도 무령왕릉 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반남지역 왕국 왕관으로 보는 것이 옳다. 백제 양식으로 해석하여 백제의 영향력 확대 근거로 살피는 것은 잘못이다. 가야 계통의 방사상과 일본 계통의 원형 양식을 융합하여 새롭게 창안된 〈옥야리 방대형고분〉의 토괴 축조양식이 가야·일본지역으로 다시 전파되고 있는데서 토착성에다 외래요소를 가미한 이 지역의 개방적 문화 특징을 엿볼수 있다. 재지세력의 강력한 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영산강 유역에서 5∼6세기 무렵에 유행한 토기들이 백제지역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보인다하더라도 형식적인 면에서 구별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백제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유개고배, 전형적인 직구단경호 등이 6세기 무렵에 이르러 영산강 유역에 소량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유한 영산강식 토기의 전통은 6세기 전반 무렵까지 유지되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다양한 외래문화를 폭넓게 수용하여 토착적인 특성으로 용해시켜내고 있었다. 가야 지역에서 나타났던 광구(廣口)소호, 약간 늦은 장경(長頸)소호, 승문 타날문(打捺文) 단경호(短頸壺) 등이 서남해안 지역에서 4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5세기 전반 무렵에 영암 등 영산강 하류지역으로까지 확대되며 주류를 형성하였다.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광주 장수동 점등고분에서 대가야系 유개장경호가, 장성 영천리고분에서 점열문이 시문된 소가야系 고배, 광주 명화동고분에서 대가야 계통 모자 모양의 꼭지 달린 개 등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대각이 달린 소가야 계통 대부호는 재지화가 이루어진 흔적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가야와 관련된 자료는 4∼6세기에 걸쳐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 등으로 계통을 달리하며 나타났고, 점차 기종이나 형식이 재지화 되고있다. 영산강 유역 마한연맹체들은 가야연맹체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외래문화를 고유의 전통으로 발전시켰음을 살필 수 있다. 5세기 무렵부터 나타난 왜계 토기들이 전방후원형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광주 월계동 1호분 고분에서는 스에키 토기 계통의 개배(蓋杯), 고배(高杯), 유공광구소호 등의 모방 흔적을 엿볼수 있다. 倭의 하니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통형 분주토기는 재지화 되고있는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백제가 차령 이북지역의 마한 맹주인 목지국(目支國)을 복속하자 그 이남의 연맹체들이 〈마한 남부연맹체〉를 결성하면서 대립구도가 본격화되었다. 3세기 말 침미다례와 함께 중국에 조공하러간 마한의 20여 국이 바로 그들이다. 양직공도의 〈방소국〉에 해당하는 마한왕국들이 모두 전남 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성왕이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할 때 추가로 편성된 15郡이 모두 노령(蘆嶺) 이남이라는 점은 6세기까지 마한연맹체가 한반도 서남부 일대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겠다. 영산지중해 일대의 정치체들이 마한연맹체의 본류였다. 마한에서 백제가 나오고, 변한과 진한이 나왔으며, 변한에서 가야가 나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영산지중해 〈마한왕국〉을 배제한 한국고대사는 성립할 수 없다 하겠다. 시민전문기자 http://honam.co.kr/article.php?aid=1555945200581851238 23면 http://pdfhome.honam.co.kr/sectionpdf/201904/0423-1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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