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작은책 2011년 4월/ 월간 제190호
살아가는 이야기 - 이야기가 있는 들녘
귀농 3년, 행복한가
김성만/ 전북 장수 삼 년 차 농부
나는 2000년 여름 16년째 하고 있던 대기업 회사원 생활을 끝내고 농부로 살아가기 위해 남원 실상사귀농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을 열흘쯤 앞둔 날 여느 때처럼 회사 출근하듯 집을 나서면서 집 우편함과 어머니와 처가에 각각 편지 한 통을 부치곤 연락을 끊었다. 심한 반대에 부딪쳐 결정한 방법, 즉 가출이었다. 학교에선 같을 길을 걷고자 하는 도반들과 농사와 농가 살림을 배우면서 참으로 즐겁고 평화로운 날을 지낼 수 있었다. 순조롭던 귀농 행진은, 3년만 더 서울에서 같이 살며 아이들 좀 더 키운 후에 함께 귀농하자는 아내의 유혹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랜 고민과 둘레 권유로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석 달 과정을 마치고 상경해 다시 직장 생활을 했다.
다시 내려가겠다는 생각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으면서 예정보다 오랜 7년간의 서울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2008년 봄 여기 장수로 귀농했다. 3년을 미끼로 계속 서울에 붙들어 두려고 했던 아내는 약속과 달리 동참하지 않았다. 나는 홀로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곳으로 와 재지기로 살면서 재실에 딸린 논 열 마지기와 작은 밭을 부쳐 먹으며 홀아비처럼 지낸다. 마을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산중의 조그만 외딴 집에서 혼자 밥해 먹고 빨래하고 농사지으면서 개 한 마리,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외롭지만 한적하고 평화롭게 산다.
집에 텔레비전도 없고 인터넷도 설치하지 않았고 신문도 구독하지 않는다. 세상 소식은 라디오로 듣고 손전화와 면사무소에 와서 쓰는 인터넷으로 사람들과 소통한다. 귀농 후 1년 이내에 끊으려고 했던 손전화는 내 농산물의 판매 수단이라 여전히 쓰고 있다.
처음엔 근본주의적 생태주의자들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기계나 차를 쓰지 않고 가전제품도 최소한만 가지려 했다. 자전거로 이동하거나 작은 짐을 나르고, 손으로 빨래하고, 톱으로 나누 자르고, 낫으로 논둑 풀 베고 벌초하고, 냉장고도 냉동 기능도 없다시피 한 초소형을 빌려 썼다. 난방도 거의 나무만으로 했다. 농사도 유기 축산물 거름을 써서 하고 비닐로 경작 표면을 덮는 비닐 멀칭을 하지 않기로 했다.
왜 귀농했고 왜 이렇게 불편하게 살려고 하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싫었다. 너무나 비인간적인 물질 만능 한국 자본주의 사회는 더욱 싫었다. 그런 사회를 유지, 확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대기업에서 의식과 행동이 다른 삶을 사는 게 싫었다. 심해져 가는 노동 강도 속에서 가족도 이웃도 없이 돈 버는 기계로 살아가는 게 싫었다. 자식을 나와 같은 임금 노예 노동자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게 싫었다. 오염과 혼란과 경쟁과 소비로 찌들은 대도시에서 늘 과소비하고 환경 오염시키며 사는 게 싫었다. 이런 체제를 뒤엎을 수 없다면 될 수 있는 한 영향을 적게 받으며 살고자 했다. 물질을 적게 소비하고 상품 경제의 덫에서 최대한 벗어나고자 했다. 오염된 먹을거리 홍수 속에서 꿋꿋이 땅을 살리면서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는 사람들 대열에 합류하고자 했다. 아이들은 입시 학원같이 되어 버린 제도권 교육의 굴레를 벗어나 즐겁게 배우고 익히며 다양한 동무를 사귀며 자신의 삶을 설계할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게하고 싶었다. 노인만 남아있는 시골에서 그이들의 이웃이자 동무, 또는 아들이 되고 싶었다. 소규모 가족농을 하며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단순 소박하지만 많이 누리며 살고 싶었다. 자연에 묻혀 적당한 육체노동과 여유 있는 느린 삶을 통해 몸과 마음을 좀 더 건강하게 하고 싶었다. 책도 많이 읽고 도예, 서각, 악기, 민요, 판소리 같은 취미도 즐기고 서울에서 배워온 침과 뜸도 어르신들한테 베풀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삶을 살 만하다고 느끼는 대도시 선후배나 벗들이 기꺼이 선택하도록 조그만 등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이런 삶을 찾아 농촌으로 온다면 우리 사회가 좀 더 사람 살 만한 곳이 되리라 믿었다. 그것도 역시 사회 변혁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원칙은 잘 지키고 있는가? 계획했던 생활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래서 이제 행복한가? 혼자 오가는 일은 여전히 자전거를 타거나 걷지만 종종 차도 얻어 탄다. 무겁거나 큰 짐을 싣는 일은 트럭을 빌려서 한다. 첫해 늦가을까지 하던 손빨래는 이사 온 귀농자한테 세탁기를 얻음으로써 끝났다. 초소형 냉장고 역시 같은 마을 귀농자가 이사 가며 두고 간 큰 걸로 바꿨다. 논둑 풀을 두 차례 벨 때까지는 품앗이로 해준 이웃의 예초기 작업 지원으로 버텼던 낫질은, 추석 전에 열아홉 봉이나 해야 하는 벌초가 시작되면서 완전히 보조 역할로 물러났다. 사흘간 해도 표 나지 않던 낫질에 절망하여 부득이 중고 예초기를 샀다. 옆 마을에 태양광 발전소를 만들면서 파헤쳐진 나무를 얻어 와 장작으로 토막 낸 건 동네 귀농자의 엔진톱이었다. 논 갈고, 모 심고, 벼 베는 일은 논이 2천 평이나 되기에 애초부터 손으로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기농 축산물 거름은 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싣고 올 일도 엄두가 나지 않아 남들처럼 주위에서 나오는 일반 축산물 거름을 쓴다. 항생제가 든 사료를 먹고 눈 똥이지만 발효되었으니 그나마 괜찮은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쓴다. 그동안 누가 주면 거절하지 않고 멀칭용 비닐도 조금 썼다. 아직 석유 안 쓰고 구들방에서 군불 때며 지내고, 가능하며 자전거와 손수레로 이동하며 짐을 나르고, 빨래할 때 외에는 세제를 거의 쓰지 않고 지내는 식으로 원칙을 지키려 하지만 꽤 느슨해진 것 같다. 농사철엔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책도 별로 읽지 않았고 취미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농한기조차 책보다는 컴퓨터로 영화 볼 때가 잦았고 어르신들한테 침뜸 봉사도 해 드리지도, 말동무가 되어 드리지 못했다. 귀농이 7년 늦쳐진 데다 아내의 강력한 저항으로 딸과 아들은 모두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행복에 조금 더 다가섰다는 느낌은 늘 있다. 벌이가 적어서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지만 스스로 결정한 일이기에, 가난하고 불편한 삶을 기꺼이 잘 살고 있다. 모든 걸 돈으로 사야 하는 체제로부터 제법 멀어졌고 기계적인 출퇴근과 감시 감독의 굴레에서도 벗어난 것이 아닌가? 어느 작가의 말처럼 ‘(더 가진) 남들을 부러워하고 (덜 가져서) 남들한테 부끄러워하는’ 물질주의에서 해방된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양심과 실천이 배반되는 삶에서 탈출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더 행복해지려면? 혼자 사는 게 큰 어려움이니 약속대로 아내가 내려와 같이 살면 더 행복할까? 아니면 내려올 기약 없는 아내를 기다리기보다 홀로 지내는 자유를 즐기는 게 더 행복할까? 작은책.
첫댓글 이번호 작은책에(sbook.co.kr) 실상사귀농 동문의 글이 실려서 옮겨 봅니다.
몇해 전 인드라망 소식지에도 실린 글이 있군요.
http://www.indramang.org/bbs/board.php?bo_table=magazine&wr_id=341&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B1%E8%BC%BA%B8%B8&sop=and
저는 불귀 24기 이장 남창우 라고 합니다.
실례가 아니면 이글을 올려주신 돌님이 몇기 어느 분이신지 알려주실수는 없을지요? 그리고 정말 올려주신글은 잘 읽었습니다. 혹 이분과 연락이 되시면 지금은 어찌 사시는지 지금 저희 동문회에서 한번 방문을 해도 되는지 조심스레 여쭤봅니다.2000년 여름에 가시고 3년차 농부시면 지금부터 7-8년전 이야기인듯한데 지금 생활이 많이 궁금합니다.
잘 알아보지 못하게 해서 약간 미안합니다. 19기기 김정태입니다. 동문회때 가끔가서 꺼벙하게 앉아 있었지요.
위에 실린 김성만 선생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고, 장수로 가기 직전에 산모임 후에 뒷풀이 자리서 잠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인드라망에서 취재를 했으니 연락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돌~ 김정태.
작은책 정기구독자 입니다. 1년 정도 되었는데 갈수록 작은책에 애정이 많이 갑니다..ㅎ
이번호에 저도 김성만 님 글이 가장 마음에 남네요.(내가 살고 싶은 오늘을 살고 있는분 이라서.ㅋ)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우리는(나는) 만나야 할 인연 입니다. 헐~
작은책에 이런 꼭지가 있어 매달 귀농 생태에 대한 글을 싣고 있지요. 이번에는 인드라망하고 연이 있는 분의 글이어서 옮겨본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작은책을 알고 있다가, 88만원세대 강연을 들으러 갔다가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4월 21일에 송경동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시원한 맥주를 한잔해도 좋겠고, 3째 토요일 오후도 자리해도 좋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