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30일 열린 여자개인전 8강 결승에서 김수녕은 첫 거리인 30의 9발을 모두 10점에 쏘며 쾌조의 출발을 하더니, 다음 50에선 첫발을 6점에 쏘아 전국민을 긴장하게 했다. 4년 전 LA올림픽에서 김진호의 실수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녕은 곧바로 다음 화살을 10점에 꽂아 냉정을 되찾더니 이후 60, 70에서도 안정된 페이스로 합계 344점을 획득, 대표팀 동료 왕희경(332점)과 윤영숙(327점)을 여유있게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요즘은 토너먼트방식의 올림픽라운드로 대회가 열리지만 당시엔 이처럼 거리별 싱글라운드 성적을 합산하는 FITA그랜드라운드 방식이었다. “8강이 겨루는 결승전을 하면서 우리 대표선수 3명 가운데 내가 제일 잘 쏘면 금메달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선수들 기록이 월등했으니까요.” 김수녕의 판단은 냉정했고,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김수녕은 다음날 왕희경, 윤영숙과 힘을 모아 단체전에서 두번째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개인전을 모두 휩쓴 한국 앞에 인도네시아, 미국은 각각 2, 3위로 무릎을 꿇었다.
겁 없는 소녀 김수녕의 성공신화는 전국민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화제가 됐다. 김수녕은 그때 언론 인터뷰에서 “시위를 떠난 화살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김수녕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진 이 말은 요즘 그가 전문강사로 활동하는 강연의 주제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미 쏘고 난 화살에 미련을 두면 뭐합니까? 다음 경기에 지장을 받을 뿐이죠.” 김수녕의 대담한 배짱은 천부적이었고, 또한 어려서부터 틈틈이 스스로 길러낸 것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큰 대회라고 가정하고 가상훈련을 하곤 했어요. 제가 잘 쏘다 마지막 발을 잘못 쏘면 선생님이 ‘그건 무효로 하고 다시 한 번 쏴봐’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속으로 앞에 쏜 활이 내 성적이지, 다시 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럴 때면 자존심이 크게 상했고, 더 열심히 노력했죠.”
청주여고 2학년 때 올림픽 금메달을 2개나 딴 김수녕은 이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 초절정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89년 세계선수권에서 개인, 단체전 2관왕에 올랐고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 동,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1년 세계선수권에서도 개인, 단체전 2관왕에 올라 사상 최초로 2관왕 2연패를 달성한 ‘괴물’이 됐다. 세계선수권에서 2회 연속 2관왕이 된 선수는 아직도 없다. 1989년 세계선수권 우승 직후엔 공인 6종목에서 세계신기록을 전부 보유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가 작성한 세계신기록은 너무 많아 정확히 몇 개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토너먼트로 승부를 가리는 올림픽라운드로 양궁 경기방식이 바뀌었다. 김수녕은 당시 개인전 결승에서 선배 조윤정과 맞붙어 아깝게 졌는데 이게 은퇴를 결심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단체전에선 금메달을 따 한국인 첫 3관왕이 됐지만 썩 즐겁지는 않았다. “1992년까지 목표한대로 거의 다 이뤘다고 생각했구요. 선수가 어떻게 매번 이길 수 있나요. 바뀐 경기방식에서 성공하려면 승률 90% 이상을 유지해야 하는데, 어렵고 하기 싫었어요. 무엇보다도 지는 게 싫었습니다. 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어요.” 거리별 점수를 다 더하면 누구보다도 잘 쏠 수 있는데, 토너먼트로 겨루는 새 방식에서 ‘신궁’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긴 싫었다. 기록경기인 양궁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는 1993년 초 종별선수권을 끝내곤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고려대 3학년 때의 일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을 거침없이 한 거죠.” |
첫댓글 88올림픽때 그녀가 안겨준 금메달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