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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로의 여행
1.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주는 실존 인물인가?
얼마전 연기.공주가 신행정수도로 확정됐다는 뉴스가 발표됐다. 백제시대 이후 1,466년만에 공주는 비로소 다시 수도로 부활한 것이다.
공주(웅진)은 서기 475년 백제 문주왕이 도읍지로 정한 곳이다. 538년 성왕 16년 부여(사비성)로 재천도하기까지 5대 64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던 곳이다. 공주는 또한 660년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 태자와 함께 피신한곳이기도 하고 822년 김창헌의 난이 평정된곳이기도 하며 1623년 이괄의 난때 인조의 피난처였던 곳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1,466년이란 긴 시간을 돌아 2004년 공주를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한 것이다
얼마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드라마 천년지애 속 백제의 마지막공주 부여주의 진위여부를 놓고 네티즌들의 열기가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 난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너는 누구냐라는 유행어와 함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였던 이 천년지애는 드라마가 종영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공주에 살고 있다고 하면 부여주의 존재에 대해 묻곤 한다. 공주에 살고 있으니 백제의 역사를 잘 알고 있을것이란 생각에서이리라.
천년지애는 서시 660년경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의 사랑을 그린 역사 환타지 멜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백제라는국호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근하다고 알 수 있겠지만 문헌을 살펴보면 백제를 지칭하는 명칭은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십제(十濟), 백제(百濟), 백제국(伯濟國), 위례국(慰禮國), 남부여(南夫餘), 응준(鷹準), 나투(羅鬪)등의 명칭이 모두 백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 중 남부여(南夫餘)는 삼국사기를 보면 성왕 16년에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게 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十六年春移都於泗一名所夫里國號南夫餘-삼국사기 백제본기권26) 남부여란 이름이 다른 기록에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 명칭은 그리 오래 사용하진 않은 것 같다. 고려시대의 제왕운기(帝에王는韻紀)에는후대의 왕때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한 적이 있으며, 또 응준 혹은 나투라고 칭하기도 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다. 응준이나 나투는 조류(鳥類)의 일종인 매를 지칭하는 말인데 이것으로 보면 정식 국호라기보다는 백제를 지칭할 때 쓰던 일종의 애칭이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천년지애의 내용은
호왕(일명 武王 )의 맏아들로서 용맹하고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라 불리면 백제의 전성기를 만들었던 의자왕(義慈王)은 신라의 김유신이 보낸 첩자금화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한다. 아버지인 의자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자란 주공주는 이를 힐책하다 그만 궁밖으로 쫓겨나고 만다. 실의에 빠진 공주부여주를 좌평 복신은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게되고 어린시절 귀족학교에서 같이 교육을 받았던 아리와 다시 만나게 된다.
어느날 공주의 처소에 괴한이 침입한다. 괴한은 신라의 첩자 김유석으로 그는 신라 대야성의 성주 김품석의 맏아들로 신분을 숨기고 남부여의 장수 귀실복신의 종으로 순어 있었던 인물이다. 공주는 김유석과 결투를 벌인다. 김유석은 상처를 입고 유곽으로 도망친다. 유곽으로 뒤쫓아간 공주는 거기서 귀실복신의 아들 아리를 만나게 되고 아리는 공주의 호위무사가되고 둘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서기 660년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남부여를 치게 되고 남부여는 수도 사비성이 함락당한다. 공주와 아리는 어렵게 탈출에 성공하고...복신은 일본에 가 있는 풍장왕자를 모셔와 부흥운동을 이끌고자 하고 주공주가 풍장왕자를 데려오는 임무를 맡고 유석과 길을 떠난다. 일행이 길을 떠난후 김유석의 정체를 알게 된 아리는 공주 일행을 뒤쫓게 되고유석의 함정에 빠져 호위군사를 모두 잃고 절벽끝까지 쫓겨온 공주는 필사적으로 대항하고 뒤늦게 따라온 아리와 유석의 결투가 시작된다. 공주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맞은 아리가 죽자 공주는 절벽밑으로 몸을 던진다. 절벽밑에서 깨어난 공주는 1400여년이란 시간을 건너뛰어 현재로 오게 되고 조직폭력배춘배(과거의 김춘추), 인철(과거의 아리), 일본 명문가의 아들 후지와라타쓰지(과거의 김유석), 고은비(과거의 금화)등 여러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공주는 여러 가지 문화충격과 혼란속에서 방황하게 되고 사람들은 부여주가 정신이상자가 아닌 정말로 부여의 마지막공주 부여주임을 하나하나 알게 되면서 결국 마지막으로 부여주가 선택하는 다시금 부여로의 시간여행에 협조하게 된다는 조금은 허무하지만 아주 허구는 아닌 드라마다.
그럼 천년지애속 부여주는 누구를 모티브로 했는지, 실존 인물인지, 역사속 자료들과 전해내려오는 전설등을 토대로 알아보기로 하자
가. 부여주의 무덤은 현재 일본에 있다?
(부여주-백제왕조의 마지막 왕녀 640-714)
부여주는 백제 왕조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딸로 태어나 20세가 되던 660년까지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20세 생일을 맞은 공주는 축하연에서 당시 부왕이었던 의자왕으로부터 온갖 금은 보화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선물받았다고 한다. 공주가 당시 부왕이었던 의자와으로부터 목걸이를 선물받은 것은 지금까지 한국고대사의 최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한다.
백제가 멸망한후 혼자 살아 남은 공주는 나라 잃은 슬픔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나.당연합군은 공주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공주를 잡으려 하고 공주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김유석장군은 부여 공주를 데리고 왜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공주는 김유석과 결혼하게 되고 김유석은 일본인으로 귀화해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일본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공주는 75세가 되던 서기 714년에 쓸쓸히 세상을 떠았다고 전해진다. 멸망한 나라의 왕녀로 불행한 삶을 살다간 공주는 역사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백제의 왕녀라는 것을 잊지 않앆고 끝까지 왕녀로서의 체통을 지켰고 귀화를 거부했다고 한다. 지금 일본 어딘가에 남편과 함께 공주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진다.
나. 부여주는 계선공주이다?
계선공주는 절세가인으로 백제, 신라 고구려에 널리 알려 졌을뿐만 아니라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병법에 통달한 점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공주는 신기한 병기를 발명해내는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자용병기라는 것은 지금의 전차와 같이 아무리 강한 적군속이라도 마음대로 돌파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기에 의자왕은 어느 장군보다도 누구보다도 먼저 공주의 힘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받자 왕은 누구보다도 먼저 공주에게 물어 왔다. 그런 일이라면 조금도 염려할것이 없늘 것으로 아옵니다 공주는 애련한 외모와는 달리 대담한 소리를 했다. 아니 염려할게 없다니? 신하에서 으뜸가는 용장 김유신이 쳐들어 온다는데 어찌 염려하지 않겠는고?김유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저에게는 자용병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 제가 적전에 잠입해서 적의 군세를 살핀다음 자용병기로 섬멸해 버릴테니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호언장담한 다음 역시 발명품의 하나인 인조까치를 타고 신라진중으로 날아갔다. 계선공주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엄청난 자기의 재주를 과시하면 아무리 용감한 김유신이라 하더라도 크게 놀라고 두려워 할 줄 알았다.한편 신라군과 당군은 각기 진군 양쪽 군사가 합세하여 도성으로 들어오는 나루 어귀에 이르러 강가에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그때 홀연히 새 한 마리가 나타나 소정방이 있는 병여위를 선회했다. 정방은 그것이 꺼림칙하고 두려워 점장이에게 물었다. 점장이는 이것은 필시 원수께서 꺾이실 징조입니다정방은 겁이나 퇴각하여 공격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이 모얀을 본 김유신은 어찌 나는 새 한 마리 따위의 괴상한 짓으로 천시를 어길 수 있소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순하여 불인자(不仁者)를 치는 이 마당에 그 무슨 상서롭지 못한 행동이오? 그러고는 신검을 빼내어 새를 겨누었다.여봐라 네가 어떠한 요물이기에 감히 우리 진영에 날아와서 이렇듯 수선을 피우는 거냐? 그러자 새는 땅바닥에서 한번 재주넘기를 하더니 금새 아리따운 미인으로 변하였다. 장수들은 다시 한번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김유신은 홀로 태연히 물었다. 너는 어떠한 곡절이 있기에 여자의 몸으로 내잔중에 날아 왔는고? 그미녀는 한번 웃더니 신라장군 김유신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비록 적국이긴 하지만 그 나라의 공주가 몸소 찾아 왔거늘 자리도 베풀어줄 줄 모르는가? 하고 나무랐다. 공주의 이야기를 들은 김유신은 껄걸 웃으며 그런 것은 바로 여자의 좁은 소견이라 하는것이오 나라의 운명을 거는 큰 전투가 그런 조그만 재주로 좌우된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일것이요. 자 공주의 소원대로 우리 진영을 샅샅이 보여 드릴터이니 마음대로 구경하시고 공주가 자랑하는 자용병기로 격파할 수 있다면 격파해보시오 김유신은 공주를 데리고 진중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숨김없이 모두 구경시켰다. 그런 다음 공손히 진영밖으로 전송했다. 신라 진영에서 나온 공주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땅바닥에 주저 앉아서 한숨만 쉬고 있었다. 에로부터 기병은 정병을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때까지는 자기가 발명한 신무기로 기습을 가하면 어떠한 대적이라도 능히 무찌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정도로써 훈련되고 당당한 진세를 베푼 신라군의 진법을 보니 자용병기로는 도저히 격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주를 낙담시킨 것은 신라군의 전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유신의 태도에서도 심한 패배감을 느꼈다. 어라나 자신만만하면 적의 첩자에게 자신의들의 군사기밀을 낱낱이 밝힐수 있을까? 백제 조정에는 그렇듯 늠름하고 기백에 찬 군사는 없는 것 같았다. 공주는 다시 인조까치를 뒤집어쓰고 백제 왕성을 행해 날아가다가 오봉산 기슭에이르렀을 때 갑자기 거꾸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신라군을 격파하는데 절망해서 라고스스로 죽은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중에는 김유신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랠길 없어 서는 아니었을까?
삼국유사에 보면 이런 구절도 나온다고 하네요
신라군이 백제공주 :부여주를 쫓았다. 벼랑까지 몰린 부여주는 절개를 지키기위해 벼랑으로 떨어졌다.
다. 부여주는 은고의 소생이다?
의자왕은 즉위 2년 제왕자(弟王子;손아래의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를 비롯하여 모매여자(母妹女子;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자매의 딸)4명과 내좌평(內佐平)기미(岐味)등 고명인사(高名人士)40여명을 섬으로 추방했다는는 기록을 보면 의자왕의 자손중에 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남인 태자 부여효와 의자왕이 웅진으로 도주하자 스스로 왕이 되어 당에당과 맞섰으나 결국 당에 항복한 부여태 백제 멸망 후 당에 의해 웅진도독이 되어 민심을 수습한 부여융 그리고 부여연 백제멸망당시 일본에 있어 화를 면한, 부여복신(의자왕의 사촌)에 의해 왕이 되나 복신과의 부롸로 복신을 살해하고 고구려로 망명하는 부여풍 그 외에 서자 40여명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원래 우리 민족은 중국식의 부계제가 아니라 모계제였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의 서옥제가 그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으며 신라와 백제에 여왕이 있었다는 것도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신채호는 백제를 건국한 초대왕은 사실은 온조와 비류의 어머니인 졸본부여의 공주 소서노였다고 파악했다. 그러니까 백제를 건국한 사람은 여왕 소서노였고 그 아들들 사이에서 분립이 일어 났다는 것이다.) 다만 신채호도 탄식을 하였던것처럼 우리 민족의 고대사는 인멸된 것이 너무나 많다. 외침에 의한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 민족 내부에서 역사를 인멸한 예가 더 많을 것이라고 했는데 거기에는 여성들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2004년 '백제의 향기 3호 뱔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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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공부 잘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