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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규현 신부·수경 스님 '오체투지' 순례단 전주 입성지리산 출발 하루 3~4km 고행..시민들 도로나와 뜨거운 격려작성 : 2008-10-05 오후 9:10:46 / 수정 : 2008-10-05 오후 9:47:18박영민(youngmin@jjan.kr) / 조태경 NGO객원기자(desk@jjan.kr)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인 수경스님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주임신부가 이끄는 길위의 오체투지단이 지난 2일 오후 전주에 도착했다. 지난달 4일,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사랑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해 지리산 노고단을 출발한지 꼭 31일 만이다. 하루에 3~4km씩 오체투지 고행으로 기어온 거리는 100km. 이날 오전 전주시 완산구 안적 삼거리를 출발한 순례단은 당초 도착시간 보다 30여분 늦어진 오후 4시30분께 아중역 입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문규현 신부와 수경스님의 얼굴은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열기를 온통 안은 탓인지 검게 그을릴대로 그을려있었다. 두 성직자를 따라 이날 오체투지에 동행한 100여명의 얼굴에도 고통과 피곤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오체투지 순례단은 행렬에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라도 고난의 길에 힘을 보태고 싶어했던 시민들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에게 환한 미소로 답했다. 순례단 도착과 함께 아중역 앞에서는 두 성직자를 응원하며 준비한 전주시민들의 환영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작은 공연이 이어졌다. '오거리악단'의 노래공연으로 시작된 이날 환영행사에서는 아동문학가 박예분씨가 시낭송을, 전북시민사회연대회의 이수금 공동대표가 순례단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으며, 국악공연이 이어졌다. 오체투지는 땅바닥에 엎드려 양 무릎, 팔꿈치 이마와 사지를 닿게 절하는 불교의 수행법.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신의 몸을 지저분한 땅에 닿게 함으로써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는 교만함을 떨쳐버리고 가장 낮은 하심(下心)으로 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 신부는 오체투지에 앞서 "천심이 민심이고 민심이 천심인줄 알게 하고 너 없이 나 없고, 타 존재가 내 존재의 지주임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수경 스님도 "우리들 스스로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며 "현 정부가 깔아준 이 마당을 단지 증오와 또 다른 배타로만 끝내 무가치하고 의미 없게 만들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고 변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성직자의 오체투지 순례는 자연과 인간의 존엄성 훼손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이날 환영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은 온몸으로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찾아 떠난 순례단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오체투지순례단의 고된 여정은 봉동 여산을 거쳐 계룡산(중악단)까지 200km 가량을 더 고행한 뒤 마무리된다.
조태경 본보 NGO기자 오체투지 체험기아스팔트 사이로 솟아오른 풀잎, 그 자체로 온전한 생명작성 : 2008-10-05 오후 9:08:52 / 수정 :전북일보(desk@jjan.kr)아중역까지 한나절 오체투지를 했다. 가래침 같은 오물, 담배꽁초, 기름찌꺼기 등을 온몸에 묻혔다. 작열하는 아스팔트의 열기는 살기 서렸고, 울퉁불퉁 갓길 시멘트도로는 송곳처럼 전신을 쑤셨다. 드러눕는 바로 옆 두 치의 거리에서 시속 70∼80km의 속도로 자동차들이 질주한다. 오싹하다. 속도는 생명을 억압한다. 저 자동차처럼 내달려온 우리네 삶의 속도를 반성해 본다. 우리도 저 자동차처럼 한 치 앞만보고 왔던 인생들이 아닌가. 편리함과 안락함, 부유함을 추구하며 내달려왔던 인생들이다. 자연을 착취하고 뭇생명을 경시하며 누려왔던 삶의 방편들이었다. 도로에서 깔려 죽은 지렁이 개구리 풀여치 사체들을 본다. 우리도 지나온 삶속에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생명들을 짓밟아오지는 않았는가. 문득 아스팔트 사이로 솟아오른 풀잎을 발견했다. 아, 이 감격! 그래 바로 저것이다. 저 여린 풀잎의 힘!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꼽 만한 꽃이 피어있다. 아름답다. 자체로 온전한 한 생명이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흔들리는 나무는 유연하다. 강하고 경직된 무리는 죽음의 무리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한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이렇듯 참된 생명은 작디 작은 여린 풀잎으로도 아스팔트를 뚫는다. 지난 삼보일보 때부터 무릎이 고장난 수경 스님은 엎드리고 일어설 때마다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는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숙연한 모습 속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나는 어떠한 삶이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길 위에서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 전북생명평화설레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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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기사 송고할 때의 전문입니다.
(작성자 : 조태경)
[사람·생명·평화의 길 - 오체투지순례단, 전북을 가르다]
문규현(전주 평화동성당 주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前대표)신부님과 수경(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화계사 주지)스님이 이끄는 오체투지 순례단이 전주 아중역에 입성했다. 지난 달 4일 노고단(하악단)을 출발하여 남원 임실 등을 지나 31일만에 도착한 것이다. 하루에 길어야 3∼4km를 오체투지 고행으로 100km 기어온 것이다. 전주, 봉동, 여산을 거쳐 200km 가량되는 계룡산(중악단)까지 11월 1일에 도착할 예정이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며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묘향산 상악단까지 임진각을 거쳐 갈 계획이다. 한반도 평화를 빌며 조국통일의 절절한 염원이 온 몸과 마음으로 국민들 가슴속에 아로 새겨지게 될 것이다.
오체투지란 땅바닥에 엎드려 양 무릎, 양 팔꿈치 그리고 이마와 사지를 닿게 절하는 수행법이다.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신의 몸을 지저분한 땅에 닿게 함으로써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는 교만함을 떨쳐버리고 가장 낮은 하심(下心)으로 가자는 것이다. 티베트 수도승들이 주로 하는 수행법이라서 우리나라에선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절이다.
문규현 신부님에게 있어서 오체투지는 십자가의 정신을 깨우는 몸짓인 것이다. 이 고된 순례중에도 그는 매일 아침 5시30분이면 어김없이 미사를 드리며 기도로 하루를 연다고 한다. 참다운 종교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다시한번 되묻게 된다. ‘바닥에 온몸을 엎드리곤 가장 겸손한 태도로, 모든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처럼 이웃과 세상을 섬기겠노라’며, 1976년 사제서품을 받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그 때처럼 다시금 더 비우고 더 버리고 더 낮추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문 신부는 오체투지 순례길에 앞서 “천심이 민심이고 민심이 천심인줄 알게 하소서. 너 없이 나 없고, 타 존재가 내 존재의 지주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올렸다.
지난 9월초 순례길에 앞서 새만금 간척지에 이미 쇠 울타리를 치고 무단 점령한 미군의 행태를 돌아보던 수경스님이 “동북아 두바이로 만들겠다고 하더니만, 허허~ 이 땅이 식민지여, 식민지!”라며 웃으셨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가슴속 깊이 메아리쳐 울리고 있다. 수경 스님은 우리들 스스로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 정부가 깔아준 이 마당을 단지 증오와 또 다른 배타로만 끝내 무가치하고 의미 없게 만들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고 변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번뇌의 진흙탕이 바로 보살의 정토’요 , ‘번뇌가 곧 보리’라는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써 이것이 존재할 수 있는 만유의 실상을 통찰하신 부처님처럼, 사람의 사람다움은 이웃과 자연을 내 몸처럼 여기고 부처님으로 공경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두 성직자의 오체투지 순례, 이 몸짓은 자연과 인간의 존엄성 훼손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민심이 천심임을 알게 해달라고 발원하며, “마지막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밖에 없다”는 말을 남기고 출발한 두 성직자. 온몸으로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찾아 떠난 그 모습 속에서 가을하늘이 감동하고 있다.
[오체투지 순례참관기]
아중역까지 한나절 오체투지를 하였다. 가래침같은 오물, 담배꽁초, 기름찌꺼기 등을 온몸에 묻혔다. 작열하는 아스팔트의 열기는 살기서렸고, 울퉁불퉁 갓길 시멘트도로는 송곳처럼 전신을 쑤셨다. 드러눕는 바로 옆 두 치의 거리에서 시속 70∼80km의 속도로 자동차들이 질주한다. 오싹하다. 속도는 생명을 억압한다. 저 자동차처럼 내달려온 우리네 삶의 속도를 반성해 본다. 우리도 저 자동차처럼 한 치 앞만보고 왔던 인생들이 아닌가. 편리함과 안락함, 부유함을 추구하며 내달려왔던 인생들이다. 자연을 착취하고 뭇생명을 경시하며 누려왔던 삶의 방편들이었다. 도로에서 깔려 죽은 지렁이 개구리 풀여치 사체들을 본다. 우리도 지나온 삶속에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생명들을 짓밟아오지는 않았는가.
문득 아스팔트 사이로 솟아오른 풀잎을 발견하였다. 아, 이 감격! 그래 바로 저것이다. 저 여린 풀잎의 힘!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꼽만한 꽃이 피어있다. 아름답다. 자체로 온전한 한 생명이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흔들리는 나무는 유연하다. 강하고 경직된 무리는 죽음의 무리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한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이렇듯 참된 생명은 작디 작은 여린 풀잎으로도 아스팔트를 뚫는다.
잠깐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오래 전부터 뵈어왔던 문규현 신부님께 건강은 좀 어떠시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나보고 회춘(回春)하고 있대.” 라고 하시니, 수경스님은 “난 죽겠어, 죽겠어.”라고 맞대응한다. 저 유연한 유머속에 담겨진 의미를 본다. 그 주고 받는 농담 속에서 나는 ‘맑은 영혼으로 거듭나는 수도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 수도자에게 있어 오체투지는 ‘영혼으로 서는 길’이었다. 두 성직자 앞에 ‘죽음’이란 ‘삶’과 동일어다.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영생(永生)의 길인 것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는 두 분에게 어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 야말로 종교인이 가야할 진정한 참회와 속죄의 길인 것이다. 그들에겐 온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고 정진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단지 그 고행의 길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겐 고문일 수 밖에 없다.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을 광경이 매일같이 그려진다. 지난 삼보일배 때부터 무릎이 고장난 수경 스님은 엎드리고 일어설 때마다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는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숙연한 모습속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나는 어떠한 삶이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길 위에서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