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의 유래를 보면 옛날 영암(靈巖)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묏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지관이 이 섬을 두루 살핀 뒤 ‘십용십일구(十用十一口, 甫吉)’라는 글을 남기고 갔다. 이 글의 뜻을 풀기 위해 어느 노스님에게 내용을 물으니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구 있는데 10구는 이미 사용되었고 나머지 1구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고 풀어 보길도라 불렀다고 전한다.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한 도서들은 조선 시기에는 인접한 해남·강진·장흥·영암 지역에 부속된 것으로 행정 구역이 편제되어 있었는데, 보길도는 영암군의 부속 도서로 관리됐다. 1694년 이후 영암군 관할에 속하여 매년 조세를 징수하여 오다가 1870년(고종 7)에 면민들의 진원으로 방진(防鎭)을 설치하여 삼도진(三道鎭)이라 칭하였다. 1896년 2월 3일 고종이 섬으로 이루어진 완도군을 별도로 신설하면서, 관할 행정 구역이 이관되어 완도군 보길면이 되었다. 광복 후에 보길면은 노화면으로 통합되었다가, 1986년 보길면으로 다시 승격·분리되어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인접한 노화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매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로 발전하고 있다.
광주에서 버스로 두 시간 달려간 화흥포항, 화흥포항에서 대한,민국,만세호(대한민국만세라는 이름으로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 3대의 배가 순환하며 40분 소요되는 보길도와 소안도에 운행하고 있다.
2008년 사적 보길도윤선도유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보길도윤선도원림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지정구역 8만 1,745㎡. 보호구역 39만 8,983㎡.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32㎞, 해남반도의 남단에서는 12㎞ 떨어진 외딴섬이다.
고산은 병자호란의 혼란기에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은둔 생활을 하고자 제주도로 향하였다. 이때 보길도 연안을 항해 중 겨울철 폭풍을 만나 보길도의 대풍구미(大風구미, 남쪽에서 불어오는 큰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보길도의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만이다)에 배를 대고 폭풍이 지나가길 바라며 머물다 산세를 보니 연꽃이 피어오르는 형국이었다.
고산은 워낙 풍수에 뛰어났는데 사람을 보내 봉우리마다 붉은 깃발을 달고 섬의 모습을 다시 보니 산세가 부드러우며 아름답고, 섬이지만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 섬 같지 않고, 토질이 비옥하고 아늑하여, 이 섬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격자봉(格紫峰)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계류가 흐르고 있는데, 윤선도는 이곳을 사람이 살기에 더없이 좋아 부용동(芙蓉洞)이라 하고 제주도의 은둔 생활을 포기하고 보길도에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1637년(인조 15) 2월 윤선도가 51세 때 처음으로 보길도를 찾아 입구에 세연정(洗然亭)과 연못을 축조하였는데, 물과 바위와 대(臺)와 소나무·대나무 등을 이용한 조원(造園) 공간으로 지금까지 부용동원림 중에서도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세연정은 창경궁 후원,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국내 3대 아름다운 정원'으로 꼽는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은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지은 '어부사시사'를 통해 찬란하게 빛난다. 그리고 아름다운 노래 가사를 탄생시킨 보길도와 그 중심으로 자리하는 세연정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안빈낙도의 이상세계를 구현하려 하였던 윤선도 사상의 정점을 구현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연정은 '어부사시사'만큼이나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보길도에서 지은 여러 곳의 건축물 중 세연정은 유희의 공간이었다.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깬 윤선도는 독서를 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오후가 되면 가마에 술과 음식을 담아 무희들과 함께 세연정으로 향했다. 악공들의 연주 소리에 인공의 연못 사이로 작은 배를 띄워 무희들의 노래를 들으며 술과 음식을 즐겼다고 한다.
신선들의 놀이터 같았을 세연정 풍경은 현재 남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상상할 수 있다. 낚시를 즐기던 칠암바위, 인공폭포와 구름다리의 구실을 겸한 판석보, 악공들의 연주를 위해 석축으로 쌓은 단상인 동대, 서대 등이 자리 잡았다. 산 중턱의 옥소암으로 악공과 무희를 보내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모습이 연못에 비추는 모습도 즐겼다고 하니 생각만으로도 대단하다. 지금도 연못을 바라보면 유희들의 춤사위가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판석보를 건너 숲길을 따라 옥소암으로 올라보면, 세연정의 경관을 한눈에 들어와 멀리 남해가 어우러지는 경관은 정원 감상의 백미다.
말로만 접했던 세연정은 나에게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사면의 개방형 정자도 그렇고 겨울을 대비해 온돌은 사용한 것도 그렇다. 이토록 정교하고 자연 친화적이며 빈틈이 없는 정자와 정원은 처음 보는 것이다. 특히 세연정과 다른 부속 건물들은 나름의 쓰임에 의해 축조되어 각각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연정에서 부용리 쪽으로 약 1.5㎞쯤 들어가면 낙서재(樂書齋) 건너편 산비탈에 동천석실(洞天石室)이 있다. 이곳은 1,000여 평의 공간으로 석문(石門)·석담(石潭)·석천(石泉)·석폭(石瀑)·석대(石臺)·희황교(羲皇橋)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낙서재와 동천석실은 직선거리로 약 800m로 양쪽을 도르래로 연결해 물건을 이동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 끈을 맸던 바위가 낙서재와 동천석실 옆에 그대로 남아 있다.
동천석실은 책을 보고 시도 지으며 차도 마시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바로 밑으로 한 칸짜리 침실에 온돌까지 두어 공간의 활용을 철저히 했던 것도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석문 안의 두어 칸 되는 반석(盤石)에는 다도(茶道)를 즐기던 흔적이 있고 그 주위로는 건물터가 있다.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 제일의 절경이라 하였다.
동천석실에서 남쪽으로 약간 내려오면 부용리에 인접한 평지가 나타나는데, 이 일대에 낙서재와 무민당(無悶堂)·곡수당(曲水堂)을 짓고 세상의 명리를 떠나 꾸밈없는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처럼 절개도 굳었지만, 자신을 연마하고 가꾸는데에도 개을리하지 않고 꾸준한 노력과 연구와 탐구를 통해 보길도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 놓았다.
이 밖에도 윤선도는 주변의 자연경관에 따라 각각 그 이름을 붙였는데, 낭음계(朗吟溪)·승룡대(升龍臺)·하한대(夏寒臺)·혁희대(赫羲臺)·독등대(獨登臺)·상춘대(賞春臺)·언선대(偃仙臺)·오운대(五雲臺)·조산(造山)·미산(薇山)·석전(石田) 등이 그것이다.
주변에는 소안도가 있다. 소안도는 항일 항쟁의 섬으로 1년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섬으로 유명하다.
윤선도는 1637년부터 85세로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나 보길도에 왔다 갔다 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
이렇게 보길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노화도 산양진항에서 해남 땅끝선착장으로 도착해 땅끝 전망대와 스카이워크,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을 둘러보고 예정시간을 한 시간 초과해 광주에 도착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출처 : 인천in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인터넷신문(http://www.incheon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