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년(傅斯年)은 發族은 殷商민족과 관계가 있는데, ‘燕•亳’ 의 亳은 당연히 지금의 하북 발해연안이며 殷商민족의 기원지라고 여겼다. 동북지구의 發族은 확실히 殷商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燕•亳’ 의 亳은 지금의 하북 발해연안이 아니며 또한 殷商민족의 기원지도 아니다.
發族과 殷商민족 모두 東夷에서 나왔으니 족원(族源)이 서로 같다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문헌기재를 보아도 그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商의 선왕(先王) 중에 契과 湯은 둘다 發族의 기원지에 있었다(황하하류 지대인 산동지구에서 활동하던 시절).《世本》에서 “契居蕃”이라고 하였다.《漢書•地理志》에 魯國에 蕃縣이 있다고 적혀있는데, 지금의 산동 勝縣이다. 王國維가 이것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契가 살았다는 “蕃”은 바로《漢志》에 나오는 魯國의 蕃縣이라고 하였다 (1997).
진가모(秦嘉謨) 輯本《世本》注에 “契居蕃”에 대하여 말하기를:
“按: <蕃>之所在, 諸書不見, 惟《路史•國名紀三》引 《魯連子》云: <蕃>在太華之陽. 闞駰云: ‘在鄭西’. 今《尙書正義》引鄭注: ‘契本封商, 國在太華之陽.’ 卽此.” 라고 하였다.
이 기술에서 《魯連子》와 鄭注는 모두 잘못된것이 아니며, 闞駰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太華之陽”란 산동 태산(泰山)의 陽[역자 주: ‘산 남쪽’을 말함]이다. 이것은 실제로 “華陽” 혹은 “華胥氏之渚”의 별칭인데, 太駰 伏犧氏와 炎帝 神農氏 모두 이 곳에서 탄생하고 활동하였으며 (王獻唐), 契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闞駰은 “太華之陽”을 “鄭西”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여 華山으로 여겼으며, 애초의 “太華之陽”이 본디 산동에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湯[王] 시대에도 亳에 살았었다. 이 亳의 지리 비정에 대해 학계는 지금의 하남, 지금의 하북, 지금의 동북이라는 등 의견이 몹시 크게 엇갈리고 있다.《尙書•序》에서 “自<契>至于<成湯>八遷, <湯>始居<亳>從先王居” 라고 몹시 똑똑하게 말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從先王居”란 한 구절에 의해, 논박할것도 없이 그 땅이 어디인지 증명된다. 成湯은 “亳”에 살았다고 하는데, 그 선왕(先王)인 契가 살던 곳은 “蕃”이다. 이 “亳”는 “蕃”의 전사(轉寫)로써 같은 곳이다.
商의 선왕(先王) 중에 두 王은 일찍이 番땅에 살았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發族(蕃族)은 殷商의 친족일 가능성이 매우 크며, 殷商 왕조의 건립에 番族은 많은 힘을 발휘한 듯하다. 이것이야 말로, 周가 商을 멸망시킨뒤, 蒲姑가 周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발하였던것과, 周왕조가 각 番族의 일족을 특히 중시한 것의 주요원인이다.
發族이 동북으로 옮겨간지 오래지 않아 殷商왕조는 곧 멸망하고, 그들은 곧 周왕조 관할로 소속이 바뀌게 되었다.
3. 發族과 周왕조의 관계
東夷族 계열중에서 番族은 역량이 강대하고 인구는 몹시 많았으며 문화도 발달하여, 가히 東夷의 또 다른 강족인 邾婁族 相苑과 필적했다. 이때문에 華夏민족에 속하는 周族 및 周왕조는, 東夷를 정복한 후에 番族의 일족을 줄곧 곱절로 “重視”하여 받아들였다.
周代에 각 番族 갈래의 반란과 복종은 周왕조의 통치 지위 안정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예를들어, 周초에 “三監”에 연합하여 北殷氏와 “東夷五侯”가 周에 반란을 일으켰었는데, “東夷五侯”중에는 番族의 한갈래(蒲姑族이 참가했었는데, 그 반발 태도가 가장 단호하였다)가 있었다. 周왕조는 서둘러 대군(大軍)을 세가닥의 길로 나누어 보내 반란을 평정하게 하였다. 成王 4년 (BC 824)에 이르러 “王師伐<淮夷>, 遂入<奄>; 五年春正月, 王在<奄>, 遷其君于<蒲姑>.”(《竹書紀年》)해서 반란을 평정하고 겨우 끝을 고했다.
그리고나서, 成王은 반란에 참여한 東夷 각족에 대한 처분 및 태도를 달리하였다. 역량이 가장 강대했고, 태도가 가장 단호했던 蒲姑는 “滅國, 毁社, 遷君, 徙民시켜 가장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成王)은 蒲姑의 君과 그 遺民을 관중(關中)으로 옮기고 직접 관할하였다.; 다음으로, 奄國은 遷君, 滅國하게는 했으나 毁社하지는 않았다(그 君은 蒲姑로 옮겨가 살게하고 그 遺民은 분산시켜 伯禽의 관할로 귀속시켰다). 마지막으로, 滅國 및 遷君하게 되자 사람들은 徐•淮•炎•邾 남방의 여러 國으로 이동하였다. (李白鳳 1981년판).” 이와같이 얼마나 “重視”하여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番族은 東夷族 계열중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었던바, 周왕조는 番族 및 각 일족을 정복 및 진압하려 했으며, 사실상 東夷중의 절대 대부분의 일족을 정복하고도 모든 東夷族 계열의 남은 후예를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자신의 文治武功으로 빛나는 시기에 周王은 반드시 그 민족을 칭하여 다음과 같이들 말하였던 것이다.: “及武王克商, 蒲姑•商奄, 吾東土也; ……肅愼•燕•亳, 吾北土也.”; 혹은 “昔虞舜以天德嗣堯, 布功散德制禮. 民明教通于四海. 海外肅愼•北發•渠搜•氐•羌來服” 등등. 여기서 열거된 이름들은 모두 東夷族 계열의 강족(强族)이며, 또한 그 속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동북의 민족으로써 열거된 이름들은 이 당시 그들이 이미 周왕조의 통치를 받았다고 설명되며 또한 周왕조 동북 판도 내의 일개 민족이 된다.
“成周之會”에 發族은 周천자에게 방물로써 麃을 바쳤다. 麃은 “若鹿, 迅走”인데 대체로 노루(狍, roe deer) 혹은 고라니(獐, water deer) 혹은 큰 사슴(麋鹿)의 일종이라고 전한다. 이렇게 發族은 周에 조공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