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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이 예루살렘의 법정 피고석에 앉아 있다. 아데나워 총리 시절(1949~63)의 독일인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그 주제를 피했다. 그들은 아이히만 재판을 계기로 잊으려 애썼던 과거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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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30분, 아돌프 아이히만은 늘 하던 대로 버스를 타고 일터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세 사람이 나타나 그를 승용차에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의 한 주택으로 데려갔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전문가들’임을 즉각 알아챘다. 어떠한 폭력도 사용되지 않았다.
1942년 1월 나치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수립했고, 아이히만은 그 책임자로서 유대인 집단 학살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에 체포됐다 1946년 탈출한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나치 전범 추적 단체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돼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됐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11월의 여론조사에서 독일인 중 33%는 유대인이 아리아인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12년간 나치 지배를 받고 난 직후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6년 뒤인 1952년의 조사 결과다. 수치가 더 늘어나 37%가 독일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낫다고 밝혔다. 그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피점령국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겪었던 전후의 식량·주택 부족 등에 주목하면서 스스로를 ‘희생자’로 간주했다. 1951년 바이에른주 판·검사의 94%, 재무부 직원의 77%가 나치 전력자였다.
전범 아이히만 재판은 독일이 ‘과거’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재판과정에서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실상이 낱낱이 조사되었기에 학살의 참상을 수백만 명에게 교육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결과 히틀러를 위대한 정치가라고 믿는 서독인의 비율은 1955년 48%에서 1967년 32%로 하락했다. 갈 길은 아직도 남았다. 진정한 변화는 그 후 1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970년 브란트 총리는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이 살해되었다. 1979년 독일 텔레비전은 메릴 스트리프 주연의 4부작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를 방영했다. 그제야 비로소 유대인의 고통은 독일 국민의 공공 의제가 되었다. 하지만 ‘집단적 기억상실’ 덕분에 나치 잔당에 의해 전후 독일의 놀라운 ‘경제 회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의’와 ‘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5/11/3733206.html?cloc=olink|article|default |
첫댓글 경제와 정의의 양립이라니 정말 멋진말같아요!!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고..
하다못해 '경제 후에 정의'라도 한다면 좋을텐데요..
우리 경제도 친일 세력이 일으켜 세웠지...장하준 교수도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을 인정하더군.
우리나라가 '정의'와 '경제'의 양립이 가능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나라가 될텐데.. 속상하네요..
역사적 현실은 언제나 그랬던 것 같아...그게 인간의 실존인가...? 부조리의 현실...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은 아무리 봐도 전쟁특수....요시다가 6.25를 기점으로 망한 일본을 되살린거나...박정희가 월남전에 군인 목숨 팔아서 벌어들인 외화로 경제성장한거나...
현재의 무력도발도 개전으로 이어질경우 최소한 조국통일이라도 되야할텐데 남북한 다 박살나고 무력통일도 못하고 주변국들 돈벌이나 되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전세계에선 우리나라의 통일을 바라는 나라는 한 군데도 없을테니...다들 무기파는데 혈안이 나서..
그래도 박태준 같은 사람은 대단하더라구...^^
어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대사관에 직접 방문하여 위로를 하였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을 반대로 자살을 시도한 많은 서민들에게는 위로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라구요... 어제 새만금 사업이 여러가지로 문제가 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저는 새만금 사업도 문제지만 지금 대통령께서 벌이시는 4대강 사업 또한 걱정입니다. 4대강 사업으로 폐허가 된 땅들을 보면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3년 뒤 감옥에 갈지도 모르지...이천박...ㅠㅠ
'유대인 학살'하니까 한명의 건축가가 생각납니다. 생태주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는 유대인 강제이주로 인해 일가친척과 가족 모두를 잃은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속에서 그는 '자연의 생명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그림에는 자연과 생명의 순환을 상징하는 '곡선'만이 존재하며, 나무가 살 땅에 우리가 집을 지었으니 옥상과 집안에 나무가 살 곳을 마련해야한다는 '나무세입자권'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탁아소, 장애인 시설, 쓰레기 소각장 등 50여개에 달하는 생태주의 건축물을 남겼으며 평생 6만 그루의 나무를 세계 곳곳에 심었습니다. 고통을 자연으로 승화한 훈데르트바서가 참 빛나보입니다.
훈데르트바서.....나도 좀 알아봐야겠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