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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중구문인회 가을 문학기행
운해 김종억
서울 중구 문인협회 회원들이 청명한 가을 날씨에 아름다운 인왕산 둘레길로 문학의 뿌리를 찾아 문학기행을 떠났다. 서울 중구 문인협회 이미옥 회장 외 18명의 문인이 문학기행에 동참하였다. 함께 동행하며 서울의 유명한 곳곳에 대한 해설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정동윤 해설사의 문화해설도 한껏 기대되는 문학기행이었다.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만난 서울 중구 문인협회 회원들의 해맑은 모습과 옷차림에서 이미 가을은 와 있었다. 정동윤 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수성동 계곡으로 향했다.
낙엽이 아름다운 가을날 인왕산 자락 수성동 계곡에서 시작된 문학기행, 선선한 가을 날씨에 하늘에는 다소 희미한 운무가 있을 뿐, 남산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오는 날이다.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 소나무 아래 바위에 자리 잡은 중인들의 시문학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서쪽에 있었다 하여 서원시사(西園詩社) 또는 서사(西社)라 부르다가 이 지역을 서촌이라 일컬었다는 것이다. 이후에 이상과 윤동주, 이중섭과 이상범 같은 시인과 화가 등 다양한 예술인들이 서촌으로 이끌려 온 것을 보면, 서촌이라는 땅에 묘한 예술적 기운이 있는 것 같다.
인왕산이 훤히 보이는 수성동 계곡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31호이기도 한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의 장소이기도 하다.
수성동 계곡의 아름다움을 담은 조선 시대의 그림인 〈수성동〉은 이 일대에서 나고 자란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것으로, 수성동을 비롯한 북악산과 인왕산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그린 그림을 모은 《장동팔경첩》에 실려있다. 돌다리인 기린교(麒麟橋)를 비롯하여 나무 한 그루까지 매우 상세하게 묘사했으며,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모습도 그림에 담았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계곡도 한때 제 모습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1971년에 계곡 일부가 메워지고 옥인시범아파트가 건립되었던 것. 전쟁 이후 10여 년간 서울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무허가 판잣집이 우후죽순 생겨났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특별시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판잣집을 헐고 시민아파트를 서울에 여러 곳 지었다. 그중 하나가 옥인시범아파트였다. 이때 기린교에도 시멘트가 발라지고 난간이 설치되는 등 경관이 많이 훼손되었다.
인왕산 숲길 청운동 방향의 길로 들어서니 잘 정비된 산책길에 가볍게 산책할 수 있어 좋았고 중간중간 새소리, 바람 소리, 자연의 소리가 향긋하게 들려와 자연만이 줄 수 있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수성동 계곡을 지나 잔잔한 둘레길 간간이 데크가 나타났는데,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몇몇 회원들은 계단을 오르는 내내 깊은숨을 몰아쉰다. 누군가는 그들을 부축하고 함께 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문인들의 진심 어린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연무(煙霧)가 낮게 드리워 산 위에서는 먼 경치가 모두 보인다. 남산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멀리는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 등의 연봉들이 아련히 이어진다.
겸재가 전반의 생을 보냈던 북악산 서쪽 산자락과 후반의 생을 산 인왕산 동쪽 산자락이 마주치며 이루어 놓은 장동(壯洞)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눈앞에 깔면서 나머지 부분들은 연하(煙霞)1에 잠기게 하여 시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꿈속의 도시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 서울 장안의 진경이다.
인왕산 자락에서 찾은 위항문학
경치가 수려한 인왕산 자락 옥류동에 살던 평민 시인 천수경은 송석원이라는 집을 짓고 시사(시인들의 문학단체)를 열었다. 중인(中人)의 시사였지만 높은 문학 수준으로 조선 시대 예술의 꽃이라 불리며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전성기를 열었다.
남산이 선명하게 바라보이는 인왕산 자락 쉼터에 앉아 위항문학에 대한 정동윤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문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장윤숙 낭송가의 낭송으로 감상했으며 이어서 황용운 시인의 ‘내가 백석이 되어’ 시 낭송을 들으며 고즈넉한 가을을 만끽하고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다 보면 흔들다리인 ‘가온 다리’가 나타난다. 「‘가온’은 ‘가운데’, ‘중심’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잡아보라’라는 표지판을 보며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넜다. 가온 다리를 지나니 인(仁)의 동물 호랑이 모형이 나타났다. 둘레길 중간중간에 인왕산에 대한 설명과 쉬어가며 읽을 수 있는 글들을 만날 수 있는데, 잠시 그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발걸음을 쉬었다. 청운 문학도서관인 초소 책방을 건너뛰고 윤동주 문학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시비에 다다른 문인들은 모두 시비에 새겨진 시구를 읊조리며
시인을 그리워했다.
2023년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0월 23일, 서울 중구 문인들이 가을을 닮은 마음으로 함께 떠난 문학기행이었다. 인왕산 둘레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을 하는 하루였다. 누구나 인왕산 등산은 몇 번씩 해보았으나 인왕산의 속살을 고스란히 보면서 문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본 오늘은 더욱 뜻깊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문인으로서 아득한 사유(思惟)의 골짜기를 걷는 기분이었다.
석양이 뉘엿뉘엿 가라앉는 시간에 하산하여 통인시장 안에 있는 서촌 주막에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뜻깊은 문학기행을 마쳤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각주 1 煙霞(연하) : 안개와 노을을 아울러 이르는 말임과 동시에 고요한 선수의 경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수필2)
불타는 내장산에 올라
운해 김종억
긴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홍역처럼 휘몰아친 태풍에도 꿋꿋하게 버텨온 계곡엔 가느다란 물줄기가 바위틈을 따라 졸졸 흘러내리고 바위 아래 고인 물속엔 설익은 단풍잎들이 가지런히 누워있다. 물속에 잠긴 낙엽을 바라보니 역시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며칠 전, 올라갔던 설악산 대청봉의 단풍은 화려하기 그지없었지만 이미 5부 능선 위에는 지고 말았는데, 단풍이 절정을 이룬다는 날짜를 잘 못 알고 찾아간 내장산엔 아직도 설익은 단풍과 곳곳이 푸르름으로 덮여 있었다.
36년 만에 찾은 내장산! 단풍 하면, 내장산의 화려함을 어찌 따라가랴!
36년 전의 그 아름답던 단풍을 머릿속에 잔뜩 그려보았던 상상과는 달리 아직은 곱게 물들지 않은 그 산을 뚜벅뚜벅 올랐다.
기온이 뚝 떨어져서인지 짙은 안개가 산을 덮어서인지 아니면, 들다가 만 단풍잎 색깔이 화려해 보이지 않아서인지 약간은 우중충한 분위기였지만 산 중 곳곳 감나무 꼭대기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 가뜩이나 느린 발걸음을 잡았다.
유서(遺書) 깊은 사찰(寺刹), 내장사(內藏寺)를 두루 구경하고 옆길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를수록 겉에서만 보던 단풍의 화려함 속에서 벗어나 내장산의 속살을 여과 없이 볼 수 있었으니, 볼수록 평범한 산이라는 생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쉬엄쉬엄 불출봉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데, 불출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암자 ‘원적암’이 나타났다. 그저 볼품없어 보이는 이 작은 암자 동쪽엔 이름 모를 황금 불상이
번쩍이고 있었으며, 등산객들의 발길을 잡고 있었다. 원적암 동쪽으로 수령 미상의 울창한 비자 나무숲이 익어가는 단풍과 어우러져 은은한 가을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햇빛 가득한 원적암의 손바닥만 한 앞마당엔 노스님 한 분이 중풍(?)으로 불편하신 몸을 추스르시며 등산객들에게 산중에서 얻은 단감을 툇마루에 내놓고 권하고 계셨다. 산 중, 곳곳에 주렁주렁 달린 단감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차에 냉큼 한 개를 집어넣었는데, 한편으론 그 스님이 마음에 걸렸다.
발길을 옮기니 가파른 언덕이 시작되었다.
약간의 숨을 헐떡이긴 했지만, 설악산 대청봉 가파른 등산로를 경험했던 우리로서는 그저 오를 만하다는 생각으로 여유롭게 사진을 찍으며 불출봉을 향해 한발 한발 오르고 있었다.
불출봉(拂出峰)으로 오르는 마지막 깔딱 고개 아래에서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며 물도 한 잔 마시고 간식을 먹었다. 원적암에서 가져온 단감도 맛있게 먹었다.
불출봉 아래에는 커다란 석굴이 있는데, 그 커다란 석굴 속에서 부처가 나왔다 하여
불출암(拂出庵)이라 했다고 한다. 햇볕이 따사로운 석굴 입구 평평한 곳에 등산객들이 자리를 펼쳐 놓고 간식거리를 먹고 있었다.
불출봉을 거쳐 서래봉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비좁고 가파른 돌계단을 몇 번씩이나 지나쳐 드디어 서래봉 주봉을 향해 급경사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캬! 어림잡아 60도 이상의 경사각도’ 에 좁은 철계단을 오르는 내내 마음을 졸이기에 충분했다. 계단 철제 난간을 잡은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 그저 앞만 보고 좁은 난간에 한발 한발 의지하면서 올랐다.
정상을 향해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 지 수십 여분이 지나자 드디어 서래봉 정상의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서래봉…
서래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내장산 풍경은 멀리 신선봉을 시작으로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한복의 수채화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으니 참으로 명산(名山)이로다.
이래서 사람들이 내장산을 즐겨 찾는가 보다. 서래봉은 내장사 북쪽에 있는 바위산으로 그곳에서 바라다본 산 아래 가을 풍경이 또한 일품이다.
산허리 휘돌아 은은한 안개가 병풍처럼 펼쳐진 단풍군락을 지나 건너편 신선봉과 방금 지나온 불출봉으로 이어져 다시 능선으로 서래 봉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한폭의 산수화가 따로 없구나.
산 아래 가을 햇살 가득한 천년 사찰 내장사와 벽련암(壁蓮庵)이 고고한 歷史의 향기를 품어주고 고운 단풍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가을의 정취를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서래봉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시장기가 발동하니, 서래봉 바로 밑에 전망이 탁 트인 바위에 배낭을 풀고 점심을 먹었다. 꿀맛이었다. 기암괴석 절벽 위에서 먹던 점심은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안주 삼아 따사로운 가을 햇살 한 잔을 쭉 들이켜고 나니 세상만사 부러울 게 없었다.
신선봉이 바라보이는 건너편, 산기슭으로 연신 오르내리는 캐블카, 그 밑 능선 따라 곱게 물든 단풍이 서래봉 쪽으로 띠를 만들면서 물들어 오고 있었다.
예전엔 고작 케이블카 타고 올라 불타는 내장산 단풍을 다 본 것처럼 기억하고 있었는데, 직접 산속으로 들어와 바라본 내장산의 가을은 은은한 단풍과 화려한 가을 햇볕, 잔잔한 안개, 그리고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색다른 맛의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산은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니 알면 알수록 무궁무진한 매력이 넘쳐난다.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해지기 전에 백양사를 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오전 8시에 출발했는데 오후 서너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벽련암(壁蓮庵)에 도착했다.
벽련암(壁蓮庵)은 백제 의자왕 시절에 백련암(白蓮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가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벽련암(壁蓮庵)이라는 서역을 써준대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국 동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1986년도에 중창되었다고 하니 역사의 부침, 세월의 부침이 이곳에도 어김없이 있었다.
산 위에서 바라본 벽련암(壁蓮庵)의 멋진 자태가 내려와 살펴보니 역시 명당임에는 틀림없는 절터 같았다.
멋진 산사(山寺)를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고 부지런히 하산했다.
내장산 줄기의 백양사에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시간이었다.
뉴스에 백양사 요사채가 며칠 전에 화재로 전소했다는 소식에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과 그곳의 스님에게도 위로의 한마디를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선 백양사 사찰 입구에도 단풍은 어김없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백양사 대문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오늘의 산행을 접기로 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와 세상을 덮으니 아름다웠던 하루도 그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36년 만에 다시 찾은 내장산의 그 속살을 여과 없이 보았고 산속에서 바라본 내장산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 언젠가 내장산을 다시 찾을 날까지 내 마음속에 고이고이 아름다운 추억거리로 남을 것임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