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귀를 열어라
최 화 웅
그러면 세상의 소리가 거침없이 들릴 것이다.
세상에는 온갖 말이 꽃피는 계절이 돌아왔다. 말은 소리의 떨림으로부터 비롯된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무슨 내용인지를 살핀다. 그리고는 나의 생각과 무엇이 다른지도 생각하고 대응한다. 그런 차이, 즉 생각의 다름을 살피고 차이를 좁히려는 대화의 과정이 소통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소통이라는 말이 회자(膾炙)되고 있는 만큼 불통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국어사전에서 소통(疏通)을 “막히지 않고 잘 통함” 또는 “의견이나 의사가 상대편에게 잘 통함”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 소통은 생각하는 바가 막히지 않고 트여서 서로 잘 통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공감하고 동의하는 의사소통의 길을 의미한다. 영어로 소통은 communication이고 공감은 sympathy,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치를 consensus라고 한다. 소통은 공동체나 공동생활에서 구성원 서로가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일치를 이루거나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을 거친다. 공감은 여러 사람이 슬프거나 기쁜 감정을 함께 느끼고 생각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이입(empathy)은 그렇게 일어나는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소통은 말과 표정, 몸짓을 넘나든다.
소통은 생각을 반영하면서 행동지침이 되는 것이다. 말 같이 않은 말이 많아 시끄러운 세상에서 나직이 말하는 교양이 얼마나 고마운가? “침묵은 웅변보다 낫다”는 말에 고개가 끄떡여진다. 소통이 되는 말은 대화가 그 첫걸음이다. 우리 주위에는 마음속에선 육두벼슬을 하지만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말은 제 때에 해야 하고 그 말이 남과 세상에 두루 통해야 하는 것이다. 냉가슴을 앓을 이유가 없다. 소통은 사회적 공론을 만드는 기본적인 수단이자 조건이라고 말한 독일철학자 하버머스(Haberma)의 ‘공론장 개념’과 소통의 기술을 통해서 공동체 구조가 집단중심에서 네트워크중심으로 변한다고 지적한 웰만(Wellman)의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 개념’의 속내도 알아차리자. 좋은 소통의 조건은 대화를 통해 이해와 설득을 확보하고 그 결과 공감과 일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소통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입을 다물고 귀는 열어야 한다. 그 다음 가슴을 열고 마음으로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정을 비롯한 직장과 조직, 나아가서 사회단체와 정당, 공동체와 나라가 자신과 얼마나 잘 소통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하기야 권력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다스리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여론일 것이다. 최근 여론의 공론장이 되어야할 KBS, MBC, YTN이 하나같이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4년 동안 누적된 불공정 보도’에 대한 불만을 이상 더 참지 못하고 파업에 나서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누구나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우화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태양신 아폴로의 노여움을 산 미다스왕의 귀를 당나귀 귀처럼 길게 늘이고 안팎으로 털이 나게 했으며 귀의 아래쪽을 움직일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제48대 경문왕에 대한 설화로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동화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그 내용은 이러하다. 경문왕이 임금에 오른 뒤 갑자기 그의 귀가 길어져서 나귀 귀처럼 되었더란다. 아무도 그 사실을 미처 몰랐으나 오직 궁중에서 임금의 머리를 손질하는 복두(幞頭)만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 그 사실을 발설하지 못하다가 죽을 때에 이르러서야 도림사라는 절 대나무 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라고 소리쳤단다. 그 때부터 바람이 부는 날이면 대나무밭에서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말하고자 하는 본능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 참을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소통을 위한 말과 표정, 행동뿐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듣는 일과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써 방송과 신문, 영화와 통신에 이어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유투브, 팟캐스트 등 다양한 소셜미디어까지 속속 등장해 새로운 소통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소통은 진실과 믿음, 품위와 깊이를 가져야 한다.
소통의 길은 우리가 필요로 하면 언제라도 공기와 물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유비쿼터스(Ubiquitous)다. 거미줄 같은 소통은 수평적 신뢰를 쌓는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일방향의 독선에 의해 수직적으로 강요된 소통은 상대와의 관계를 단절시켜 갈등을 조장하고 끝내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끈 사례를 볼 수 있다. 특히 이명박 정부를 두고 불통정부라고 하는 것도 대북관계의 경색국면을 비롯한 쇠고기 파동, 4대강 사업과 잦은 인사실패와 측근비리가 겹친 국정실패를 두고 그 원인을 불통, 즉 국민과의 소통부재라고 지적한다. 개인이 남의 말을 듣고 이해와 배려하듯 정부가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국정수행의 기본이다. 마음이 열려있는 개인과 조직, 정부 곁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들끓을 것이다. 그러나 주관과 선입견이 지나치게 강하여 편을 가르고 탐욕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경우 사람들은 다 떠나고 홀로 남게 될 것이다. 최첨단 쌍방향 단말기가 범람하여 소셜미디어가 삶의 중심에 자리 잡은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소통부재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괴리현상이 걱정스럽다. 소통은 우리가 숨 쉬며 살 듯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상대를 인식하고 올바른 동반자의 관계를 유지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불통의 시대를 극복하겠다는 결의와 믿음을 바탕으로 쌍방향(interactive)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남의 말, 세상의 소리를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며 더불어 살기 위한 소통의 진실성과 믿음, 그리고 품위와 깊이를 생각할 때다. 이제 우리 모두 마음의 귀를 열고 진정한 소통을 위한 역량을 발휘하자.
첫댓글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참나리님! 저만의 생각은 아니던가요? 감사합니다.
소통의 부재를 절감하는 경우가 친척들과 있을 때 정치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입니다...정말 절벽입니다...침묵을 할 수 밖에 없는....
소통이 되는 대화를 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얘기를 충분히 듣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자신의 말을 합리적이고 타당성 있게 쉬운 말로 간결해야겠습니다.
이때 반박의 논리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믿음이 가게마음으로 말하는 기술이 필요하겠죠.
저는 요즘 그럴 때 감정을 섞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상대와 눈을 맞춥니다.
소통이 되는 말을 하려구요.
마음의 소통이 참 필요한데... 쉽지 않은 것 또한 이 말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도 쉽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것 아닙니까? 소통은 도전이고 투쟁이기도 합니다.고맙습니다.
저는 예수님과의 소통을 묵상해 봅니다. 소통의 방법으로 이번 천호성지 피정도 좋은 방법 이겠지요. 감사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네, 명금당님의 피정이 주님과의 거침없는 소통이 되도록 빌겠습니다.
불통은 정부와 사회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미국의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하루 1440 분 동안 부부가 2분 30초만 대화를 한다고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과의 대화소통이 안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소통은 어떻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비오 국장님,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좋은 묵상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소통은 바로 제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소통이 되는 말, 소통이 되는 가정과 공동체를 그리는 기도를 써보았습니다.
소통의 진실과 믿음, 품위와 깊이, 쌍방향성의 의미를 스스로 실천하겠습니다.
저는 미국 간 엘리와 카카오톡과 전화로 매일같이 10/10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보낸지도 벌써 3주가 지나갑니다.
토분에는 튤립 싹만 자라고 있구요.
저도 소통은 제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 합니다 자신을 잘 알아가는 것이 남을 이해 하는 것에 있어서 지름길임을 느낌니다 많은 부딫힘 속에서 주님이 저에게 무엇을 고치라고 사랑하라고 주시는 메세지에 대해서(사실 누구에나 주십니다 우리가 못 느껴서 그렇지요 주님은 사람입니다 죄인 의인 가리지 않읍니다.)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실천하고 변화될 수 있는 힘을 주시라고 꾸준히 기도해야겠읍니다.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문제는 소통의 중심에 선 자신이 상대의 말에 어떤 자세로 대응하느냐 일것입니다.
저는 열린 마음, 낮은 자세, 신뢰의 눈빛으로 간격을 좁히는 대화를 위해 꾸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하는 만큼 실천하는 당금질을 위해 더 많은 훈련을 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권위와 차별을 극복한 인간존엄과 평등의식을 지켜나가도록 해봅시다.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