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李仲燮, 호 대향(大鄕)
1916.4.10~1956.9. 6, 40년 그 짧은 예술의 삶
화가 이중섭의 작품세계 속의 가족과 그리움
▲ 이중섭 자화상, 1955년, 종이에 연필, 48.5X31cm, 1955
그런 그리움을 삭히지 못한 탓인지 최초로 개인전을 치를 때까지 삼 년여 세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쇠약해진다. 1955년 사촌들이 서울로 이중섭을 데리고 왔는데
자신의 머리를 박박 깎거나 엄지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문지르는 일을 되풀이 하는 격한 행동을 보였다.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 없고 이유를 물으면 아내가 미워 죽이려 한다고 했다 한다.
지인들이 문병을 오면 화가와 시인들을 욕하며 죽인다고 증오심을 드러내기도 하고 음식도 거부하며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도쿄문화학원을 다녔다.
1937년 재학 중인 신분으로 일본의 제7회 자유미협전에 출품해서 태양상을 받았다.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5년 북조선으로 귀국했다.
원산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李南德, 본명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과 결혼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해서 부산,통영, 제주도 등을 다니면서 살았다.
이중은 그림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배곽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이후 그들의 만남은 이중섭이 부두노동으로 번 돈으로 일본의 처가집을 방문하여 한 차례 더 있었을 뿐이다.
정부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에서도 창작에 매달렸다.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파 백화점에서 열었다.
하지만,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다가 1956년 간염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죽었는데,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오니 이미 시체와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제주도 서귀포시에서는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해 이중섭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길 떠나는 가족이 그려진 엽서그림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만 걷잡지 못할 작품 제작욕과 표현욕에 불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오.
지금 이웃 풍경과 호박꽃, 꽃봉오리, 큰 일을 제작중이지만,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그대들을 생각하고
태현, 태성, 남덕, 대향 네 가족의 생활 융화된 기쁨의 장면을 그린다오. 이제부터는 반드시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림을 그려 함께 보내겠소.
이 편지와 함께 그림도 보낼 테니 셋이서 사이좋게 보아주오. 행복이 어떤 것인지 대향은 분명히 알았소.
제작 표현하면서 그것은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남덕이와 사랑의 결정인 태현이, 태성이 둘과 더없는 감격으로
호흡을 크게 높게 화공(畵工) 대향과 현처 남덕이가 하나로 융합된 생생한 생활그것이오.
남덕, 대향의 참된 결합은 우주의 의지, 사람들의 생명을 윤택하게 하는 올바른 그것이요,
별과 같은 무한한 신비요, 태양과 같은 밝은 빛이 아니겠소? 더욱 사랑하고 굳게 하나가 됩시다.]
이 가슴을 저미는 애절한 사랑의 아쉬움과 호소, 불안과 고독의 정신적인 압박의 괴로움이 넘쳐 흐르는 글이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셈이며, 또한 더욱 강조되고 있다. 부정(父情)과 부정(夫情), 이것은 가족에게 얽힌
부단의 혈육관계인 바 순수하고 순박한 동심과 같은 세계를 갖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중섭의 작품은 동화적인 명제가 특색이고, 내용 또한 우화적이고 맑은 동심을 담고 있다.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글쓴이 : 임영방/ 서울대학교 교수>
▲길 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29.5 x 64.5cm,1954년
중섭은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가족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과 자신을 소재로 한 그림들은 모두 한데 뒤엉켜서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는 그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두번째 작품속에서 보듯 그는 아이들이 물고기나 새등과 같은 자연에 동화되어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습니다.
다섯번째 그림인 길떠나는 가족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속에 동봉한 그림으로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운 아버지가
따뜻한 남쪽으로 행복을 찾아떠나는 모습입니다.
중섭은 아내와 아들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담은 무수히도 많은 그림편지를보냈다고 합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둔 이 가족의 눈물겨운 모습이 느껴집니다.
그림의 태두리는 젊은 시절 큰 영향을 받은 루오가 쓰던 수법을 응용한 것으로 이중섭도 자주 애용했다.
▲파란 게와 어린이 (종이에 유채)
서귀포 시절을 회상하며 그렸다.
<파란 게와 어린이>는 현재 새로 단장한 이중섭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화면에 배경에 그어진 강렬하면서도 직선적인 터치와 굵은 선으로 이뤄진 어린 아이의 윤곽선은
말년의 이중섭이 즐겨 사용하던 기법이라고 한다.
두 손에 쥔 끈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남자 아이와 풀빛 게 한마리,
그는 아내와 함께 일본에 간 두 아들을 그리워 했을 것이다.
▲부인이 함께한 자리에서 여러 아이들이 손으로 받혀준 켄버스에
'아이들이 얽혀져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속의 그림.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표정. 이제는 만족하여 누워있는 아이, 그리고 즐거워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
그 어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단수함이 가지는 순수함. 눈 코 입은 그 자체 만으로도
너무나 완벽한 순진 무구의 극치이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20.3 x 32.8cm
중섭은 이처럼 소년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즐겨 그렸습니다.
어린소년들의 모습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아울러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의 회귀를 모색했던 것입니다.
▲물고기와 노는 두 아이들, 종이에 유채, 41.8x30.5cm, 1953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을 그린 일련의 유화들이다. 앞은 거대한 물고기와 노눈 두 남자아이르 그렸다.
줄을 이용해 대상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지운 연출이 돋보인다. 끈을 이용한 구성은 자두 애용되는 방법이다.
더욱이 화면 아랫쪽의 아이가 입은 옷을 물고기가 물도록하여 생기를 돋구었다.
아이와 물고기가 만드는 그림자도 연결 시켰다.
그러다 보니 밝고 어두운 부분을 구별하여 묘사하게 되었는지, 이중섭의 그림에서 드물게 명암법이 등장한다.
어린 소년들을 즐겨 그린 것은 두 아들에 대한 그의 절절한 사랑의 표현이기도했습니다
▲가족, 종이에 유채, 41.6 x 28.9cm
▲가족, 종이에 유채, 41.6 x 28.9cm
▲춤추는 가족, 22.7 x 30.4cm
▲가족과 비둘기 종이에 유채, 29 x 40.3cm, 1956년 무렵
▲두 어린이와 복숭아 1953
극락의 열매라는 이 천도 복숭아 그림은 구상의 이야기를 통해 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결혼후 얻은 첫 아들이 죽자 그는 이처럼 천도 복숭아를 갖고 노는 아이들 그림을 여러장 그려서 관속에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캄캄한 어둠속에 아이가 얼마나 무섭고 외롭겠느냐면서요.
중섭의 따뜻한 부성애와 예술가로서의 그의 면모가 엿보이는 일화입니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개구리 바라보다, 24cm x19cm, 유화 물감
완벽하게 한 몸으로 얽혀있는 아이들은 완전한 충만감으로 평화롭고 고요한 표정입니다.
서로 부둥켜 안은 모습에서 이별의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고 곧 행복한 만남을 이룰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온화하고 절제된 색은 선의 강한 이미지를 보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림의 외곽을 잡아주는 선은 구성요소들을 완벽하게 묶어주는 효과를 지닙니다.
개구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에는 즐거움과 해맑은 동심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가적 상상력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를 의지하며 행복해 하고 있는 아이들은 아무 사심 없는 개구리와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듯합니다.
▲아이들, 종이에 혼합기법 /Mixed media on paper | 8.8×13.7㎝
서로 <얽혀 결합되어 있는 아이들은 가족에 대한 작가의 애타는 그리움과 사랑의 심정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속에는 가슴을 저미는 애절한 사랑의 아쉬움과 호소, 불안과 고독의 정신적인 압박의 괴로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父情. 夫情은 순수하고 순박한 동심과 같은 세계입니다.
엉키고 꼬이고 연결된 동세는 가족을 재회하고 융합하여 일체가 되길 염원하는 작가의 심중을 나타냅니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동적인 성격은 회전의 생동감과 생의 자유로운 즐거움이 충만된 환희의 맥박으로 전달됩니다.
▲사슴, 종이에 혼합기법 /Mixed media on paper | 12.5×18.5㎝
이중섭의 사랑고백 메시지가 뚜렷한 작품입니다.
사슴으로 여겨지는 두 마리의 동물을 그린 이 그림은 성애의 느낌을 짙게 풍깁니다.
두 마리 사슴의 구애장면은 시원스러운 단붓질과 두터운 붓터치로 강렬한 마음을 거칠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붓질로 정리된 윤곽선으로 격정에 넘치는 사랑고백의 메시지가 보다 명확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가지, 종이에 혼합기법 /Mixed media on paper | 12.5×18.5㎝
세로로 긴 가지와 넓게 펼쳐진 나뭇잎은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날카롭고 딱딱한 줄기에 관통당한 넓은 잎과 그 줄기에 힘없이 매달려 있는 가지는
헤어져 있는 부부의 힘겨운 이별의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벚꽃위의 새 49 x31.3cm
다른 그림과는 느낌이 다른 그림입니다.
전반적으로 화사함이 느껴지고 벚꽃이 지는 모습이 봄이 지나감을 아쉬워 하는 모습처럼도 보이지만
한편으로 흰새는 우리의 모습이고 벚꽃은 일본으로 비유된 표현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거창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모든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중섭 또한 조국애를
은유적 기법으로 드러내곤 했습니다.
▲서귀포의 환상 56 x 92cm 1951년
아이가 새를 타는 것으로 설정해서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필치가 있으므로
월남하기 전에 북한에서 유행하던 사실주의적인 화풍이 엿보입니다.
이후 중섭의 그림은 좀더 단순화 되면서 보다 환상성이 강해집니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는 좀 독특한 편에 속하는 그림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원>과 함께 이중섭이 남긴 그림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에 속한다고 합니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나무판 유채, 41 x 71cm, 1951년
이 그림은 전정때 월남해 서귀포에서 주민의 도움으로 살던 집에서 그린 것으로 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이 있는 바다의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을 그린 것입니다.
이처럼 제주도 시절의 그림들은 중섭의 특징적 세계관이 드러나기 전의 평이함이 보입니다.
아내와 두 아이들과 떨어져 살기 시작하면서….
특히 극심한 궁핍기였던 후기 그림속의 강한 환상성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환상에 기대어서 자기 고통을 뚫고 나가고자 한 한 예술가의 고독한 내면이
이 잔잔한 그림과 대비되면서 처연한 감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서귀포시가 구입한 이중섭 진품 (제주=연합뉴스)
제주도 서귀포시가 이중섭미술관에 전시하기 위해 한 소장자로부터 7억 5천만원에 구입함 ksb@yna.co.kr
▲꽃과 어린이
서귀포시가 구입한 이중섭 진품 (제주=연합뉴스) 김승범 기자
제주도 서귀포시가 이중섭미술관에 전시하기 위해 한 소장자로부터 1억5천만원에 구입함 ksb@yna.co.kr
▲복사꽃이 핀 마을, 종이에 유채, 29 x 41.2cm, 1953년
오늘날 대표작으로 꼽는 이 그림은 숙련된 붓질에서 오는 시원스런 맛이다.
통영에서 친구인 미술가 유강열의 호의로 그런대로 안정을 취하게 된 중섭은 이 곳에서 많은 풍경화를 그리게 됩니다.
서귀포에서 그린 풍경화와 달리 통영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굵고 빠른 필치가 특징인데,
중섭의 독자적인 화풍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단순화되고 굵은 필치로 통영에서 특히 소 그림을 많이 그립니다.
일련의 소 작품들의 붓 텃치 방식이 이 풍경화에도 그대로 보이고 있습니다.
▲부부, 종이에 유채, 41.5 x28.8cm,1953년 무렵
박영자, 한용구 기증,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봉황이 안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위의 새는 화면 너머의 무엇인가에 긴박된 듯 매달려 있는 것 같고
아래의 새는 지면에서 떼기 힘든 듯하다. 일어서서 날아 오르기 힘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마리의 새는 서로 만나려 애쓰나 만나기 힘든 것이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45 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마사코는 한국으로 나와 그와 결혼합니다.
이 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바꾼 그녀의 결혼생활은 50년 한국 동란과 함께 비극을 맞게 됩니다.
53년 휴전무렵 처가와 주위의 도움으로 일주일간 일본에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난것이 마지막이 되었지요.
일본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그림속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판잣집 화실, 종이에 수채와 잉크, 26.8 x 22.2cm, 1953년
위 그림은 이중섭이 당시 헤어져 살고 있던 일본의 가족들에게 보낸 그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판잣집에서 그림을 그리며 혼자 지냈던 이 무렵, 일본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쓴 편지와 함께 "판잣집 화실"이란
제목의 그림을 그려 보냈다고 전해지는 작품입니다.
종이에 펜으로 그린 후, 수채물감(또는 유화담채)으로 담백하고 가볍게 색을 입혔습니다. >
▲얼굴을 맛댄 가족, 1953년
빤쮸차림의 중섭, 자신과 가족을 그리고 있는 모습은 무척 행복해 보인다.
과연 어느 화가가 이렇게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가족을 담아 낼 수 있는지…
그의 그림을 보면 가족 속에 함께하고 싶어하는 이중섭이 너무 아름답지만 가슴아프게 한다.
함께 있지 못함으로 인해 항상 그림 속에는 그 가족과 함께 있는 자신을 그의 머리 속에서 그리고,
그의 붓을 통해 화폭으로 옮기는 순간, 그 순간들을 상상해 보면 그의 모습이 안쓰럽게 여겨진다.
▲투계 29 x 42cm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하는 둣 덤벼드는 설정입니다.푸르고 붉은 빛깔로 그린 닭 부분이 충분히 마른 뒤
그 위에 덮은 검은 빛깔이 마르기 전에 물감칼로 긁어냄으로써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조응하는 색깔과 태세로 보아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색채적 조형적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사신도의 유현한 색채,대상이 서로 조응하는 조형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은박지 그림
▲활쏘는 남자, 종이에 펜과 수채로 그림, 9x14cm, 1941년 말
▲봄의 어린이,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6x49cm
▲적십자병원에서 그린 마지막 그림, 1956년
죽어야 마땅해 - 이중섭형을 보내며
제 아이 자식들마저 제 손으로 먹여 살리질 못해 처가(일본)로 보내고
그저 그리움에 안타까워만 하던 꼴이 밉살머리스러워서인가?
중섭형, 자네같이 못난 놈은 없을 걸세.
그 좋은 재간 그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보를 갖고 그래 사나이자식이 더 살아 배길 수가 없었단 말인가.
나같이 흉측한 놈이 이렇듯 어지러운 세상일지라도
이러 저러 살아나갈 수 있는 반성과 용기를 또 누구에게 의존해야 한단 말이냐.
내가 듣고 보아 아는 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사람으로 나는 형을 우러러 사모해 왔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일(작품)을 한 화가를 치면
형을 엄지손가락에 꼽는 우리들의 심정만이라도 알아주어야 하지 않겠나?
내나 또한 형을 아끼고 숭모하는 친구들은 젖혀놓고라도 형 처나 아이자식들의 안타까이
그리워하는 숙원은 어떻게 되느냐 말이다.
임종이 외롭다기보다, 살림살이가 고달프다기보다, 세상사람들이 야속하다기보다,
자네는 자네만 아름답게 살았고, 좋은 그림을 남기고 가면 그만이라는 그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것인가?
너만이 착하고 아름답고 너만이 좋은 그림을 그린 것이 우리들에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너같이 너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놈은 죽어야 마땅해.
9월 11일 화장터에서
《서울신문》1956. 9. 16 <박 고 석>
[출처] 슬픈 가족사 / 이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