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제자들에게 전한 뜻, 장무상망(長母相忘)목하 정지원 선생, 제자들에게 손수 쓴 글씨 표구해 선물
2021-11-10 박남수 기자
[굿모닝완도=박남수 기자]장무상망(長母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지난해 손창근 선생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국보 제180호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 화제가 됐다. 정부는 그에게
금관문화훈장으로 답례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그를 청와대로 불러 특별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세한도는 제주에서 5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나이 59세의 완당(추사 김정희)이 그의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리고
선물했던 작품이다. 완당의 문인이었던 이상적은 역관으로 청나라 연경을 열두 번이나 다녀온 당시 최고 중국통이다.
완당은 세한도에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고 쓰며 공자의 말도 덧붙였다.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후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완당이 낙관으로 사용했던 문구가 장무상망(長母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이 장무상망 마음을 오늘에 새기려는 사람들이 완도에 있다. 신지도에서 원교 이광사의 서맥을 이어가는 목하 정지원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다. 지난 1월 12일 신지도 서예실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다. 목하 선생이 완도, 신지도 등지에서 활동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쓴 장무상망 글씨를 선물한 것이다.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완도에 서예의 씨앗을 뿌리고 평생을 한결같이 먹을 갈아 후학들을 지도해 온 완도 서예의 본류인 목하 선생이 장무상망을 제자들에게 전한 뜻은 무엇일까?
스승으로부터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이를 집안 깊숙한 곳에 걸어두지 않고 자신이 교류해 왔던 청나라 문사들에게 완당의 작품을 보여주며 16명으로부터 제찬을 받아왔다.
제찬1 [祭粲]제사지낼 때 올리는 밥
제찬2 [制撰]예전에, 임금의 말씀이나 명령하는 내용을 신하가 대신하여 짓는 일을 이르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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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국내 문인들도 이 특별한 사제간의 사랑과 우정에 논평을 보태 오늘의 세한도를 만들어냈다.
세한도를 그린 건 스승 완당이지만 이를 명품으로 만든 건 제자 이상적인 셈이다.
유배가듯 신지도로 서실을 옮긴 스승을 따라 쉼없이 글을 배우는 제자들에게 베푸는 감사의 뜻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평생을 바쳐 일구어 온 완도 서예를 훌륭하게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으라는 목하 선생의 지엄한 뜻은
아닐까. 지난 2021년 1월 신지도 서예실에서 목하 정지원 선생과 나눈 대화다.
장무상망에 대해 들었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시대가 아무리 걍팍하더라도 사제 관계를 떠나 서로 깊은 정을 나누자는 의미에서 선생으로써 권위 의식을 없애고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도반의 뜻으로 학우라고 썼다.
자꾸 첨단의 시대로 변화하면서 사라져 가는 인간미를 살리고 먼훗날에 이걸 받은 사람들이 서예를 해야한다는 사명감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곁들어서 석가가 열반에 든 뒤 불경을 만들 때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럴 때는 이게 정의이다”
제자들이 토굴에서 몇 년 동안이나 토론을 통해 불경을 만들었다. 앞으로 우리 학우들에게 한꺼번에 강의를 할 거다.
그러면 서맥회 학우증을 받은 사람들은 필히 참석해서 이론을 섭렵해서 신입 회원이 들어오면 가르쳐 줄 수 있는 시스
템을 갖추기 위한 방편이다.
장무상망을 받은 사람들은 사명감을 갖고 완도 서예를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술의 첨단 부대를 만들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의 문하생이라는 것을 떠나서 서로 학우라는 우정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시작했다.
장무상망(長母相忘), 무슨 뜻인가?
길, 오래 장(長)에, 무(母)는 하지 말아라, 즉 아니 불(不)과 같은 의미다. 서로 상(相)에 잊을 망(忘), 즉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서로 잊지 말자.
추사 이전에도 쓰던 말인가?
2000년 전 한나라 기와에 적혀 있던 글이다. 그 당시 누가 어떤 의미로 이 말을 썼는지는 모른다. 기왓장에 찍혀 있던 말이니 그때도 상당히 의미 있는 뜻이었을 것이다. 추사가 자신의 제자에게 “다 나를 버렸지만 너는 나를 버리지 않고 중국의 책들을 구해 공부할 수 있게 해준 그 공을 깊이 생각하면서 자신이 새겨(각) 도장을 찍어줬다.
추사가 이상적 외 다른 제자에게도 썼던 표현인가?
없다. 딱 그 제자에게만 주었던 글이다. 오직 세한도에서만 발견되는 표현이다.
선생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깊은 뜻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표구까지 해서 주었다. 요즘 서예를 다시 부흥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시대에 서예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인간이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 지능을 가졌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갈수록 걍팍해지는 요즘, 언젠가 본성을 되찾자는 주장이 대두될 것이다. 본성을 떠난 행위는 인간의 가치가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가치로써 본성을 찾으려는 시대는 올 것이다. 그럴 때 무엇으로 인간의 본성을 되찾을 것인가? 서예와 같은 정적인 활동일 것이다. 다른 취미는 즐기는 것이지만 서예는 외적인 쾌락이 아니고 글자 속에 담긴 내적인 지식이 내 마음의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 정화의 도구이다.
완도에서 서예를 해 온 기간은?
40년이 더 된다.
요즘 사회에서 서예는 어떤가?
최근까지도 일본의 학원에서 가장 많은 학생들이 주산을 배웠고 그 다음이 서예였다. 피아노와 영어보다 먼저다. 생활에서 필요는 없지만 정적인 교양을 기르기 위해 서예를 배운 것이다. 지금 당장은 바닥을 칠 것이지만 인간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다.
금년에 할 일이 많아 보인다.
2년 전에 만들려고 했는데 아직 못하고 있다. 재료(천)만 준비해 두고 있다. 넓은 테이블에 천을 깔아놓고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글을 쓰려고 한다. 낙관과 분문 글씨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수치로 규정할 수 없지만 그 조화를 아는 것이 실력이다.
언제까지 지도할 예정인가?
언젠가 가기 마련인데 붓 한 자루 들고 완도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도반이 되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최대한 남기고 갈 것이냐를 항상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