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자광(1439~ 1512, 74세): 본관 영광, 한성부소윤(=서울부시장) 유 규의 서자이다.
史官의 기록은 어려서부터 무뢰자였고, 경복궁 동문 건춘문의 문지기였다고 처음부터 접고 들어간다. 인물을 살펴볼 때는 삶의 족적을 시기적으로 되집어보는 것이 젤로 이해하기가 쉽다.
특히 이 인물은 더욱 그러하다 평생이 ‘상소’와 ‘탄핵’으로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①1467(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에 자진 출진하여 공을 세워 세조의 강한 신임을 얻으며 신세력으로
병조참의가 된 후 이듬해 세조 붕어 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의 옥사’를 일으키며 영의정 강순과
남이장군 등을 처형하고 자신은 익대공신 1등이 되면서 무령군에 봉해진다.
(29세에 부각되고, 남이의 옥사로 힘을 업그레이드 시키며 신세력으로 부상한다.)
-> 남이장군 허묘 (경기 가평 남이섬)
②1476(성종 7년) 수구세력인 한명회를 지속적으로 공격하다 오히려 파직되어 동래, 함양으로 유배
되었지만 곧 풀려났다.
③1478년 임사홍과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부린다고 관작이 삭탈되고 동래, 남원 등으로 이번에도
유배되었지만 3년 만에 왕에게 특별상소를 올리고는 모두 회복하였다.
④1485(성종 14년) 한명회가 완전히 은퇴하면서 1481년부터 시작된 유자광의 관작 회복건이 5년 만에 겨우 마무리되어 지중추부사가 되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이후 병조판서, 판한성부사(= 서울시장), 장악원 제조 등에 임명되었으나 언제나 사림들이 서얼출신의 임명이 부당하다며 임명취소를 청하는 兩司(사헌부, 사간원)의 논박이 그친 적이 없었다.
-> 학사루 ( 경남 함양군 함양읍 학사루길 4, 유형문화재 90호)
⑤1487년 명나라 황제즉위식에 다녀온 후 잠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는데… 그리고는 이 때가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김종직과의 함양 학사루 현판사건이 생겼다고들 하는데... ???
(※시기적으로 정황이 맞지 않는다. 1487년에 김종직은 전라도관찰사였었고 이후 형조판서로 복귀 후
곧 밀양으로 내려가 1492년에 죽었다. 유자광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적이 실록의 기록에는 없다.
1487년 당시 경상도관찰사는 이세좌이었고 후임으로 한치형, 이후 곧 성숙으로 바뀌었다.
학사루 현판사건은 자료를 종합해 볼 때, 1470년 이전에 유자광이 함양에 놀러갔다가 그 곳 경치에 반해서
현판을 써 걸었고, 김종직은 1471년에 함양군수를 지낼 때 유자광이 걸어 놓은 학사루 현판을 보고 서얼출신
주제에 건방(?)지다며 떼어서 불태운 것이 와전된 듯하다.)
⑥1491년 이후 황해도 관찰사(도지사), 황해도 체찰사(군사령관), 사옹원제조, 장악원제조 등을 끊임
없는 탄핵과 반대상소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제수 되었고, 역임하였다.
⑦1494년 국상(성종의 승하)과 모친상을 동시에 당하자 조정의 배려로 모친상을 따랐고,
⑧1497(연산 3년) 3년상을 마치고 돌아와 연산조에서 의정부좌찬성에 제수되었다.
⑨1498(연산 4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발견하면서 상소를
올린다. 이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유한 문장이라고 스스로 문구마다 상세히 해석하여 보고
하면서 결국은 ‘무오사화’를 일으키며 수많은 사림 인물들을 피바람 속으로 몰아넣고 정작 본인은
종1품 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 김종직 묘소 후경( 생가인 추원재 뒷산에 위치,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701)
이후에도 사사건건 모든 일에 사림의 비난과 탄핵은 이어졌다.
⑩1504년 이번에는 임사홍이 연산의 생모 ‘폐비윤씨 사건’으로 갑자사화를 일으키자 임사홍과 친한
사이란 이유로 사림의 더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⑪1506(중종 원년) 66세의 나이로 연산을 폐위하는 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1등에 무령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충훈부 당상이 되었다. 그러나 반정의 핵심 주동자는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으로
이후 실권은 이들의 손에 있게 되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⑫1507년 4월, 반정 후 정치가 조금 안정되자, 계속적으로 쏟아내는 대간과 사헌부, 홍문관의 탄핵이
이어지자 결국은 중종도 “다수가 원한다면.” 이러한 논리로 흥양으로 유배보낸다.
유배 중에는 다시 극형에 처해달라는 사림의 탄핵공세에 해평, 변군 등으로 다시 이배되는 등 경상도
변두리로 5년여의 유배생활을 전전하면서 끝내는 눈이 멀어 장님이 되고 말았다.
1512년 6월, 결국은 유배지에서 병사하며 74세로 생을 마감 하였다.
-> 유자광 묘소 (남원시 황죽마을, 우측 담배건조창 소나무 있는 곳이다. 2008년 발굴)
야사(野史)에서는 유자광이 죽자 조정에서 그의 자손에게 장사지내기를 허락하였으나, 큰 아들놈
진(軫)은 슬픔보다 여색에 빠져서 끝내 가보질 않았고, 작은 놈 방(房) 또한 병을 칭탁하고는 손님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아비 장례는 외면하였다고 전하면서 죽은 뒤에도 계속 물고 늘어진다.
그렇다면, 한명회는 두 따님 모두를 요절시키는, 그것도 더 아깝게 조선의 국모라는 자리에서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먼저 보내는 천벌을 받았다면, 유자광은 ‘개 호로자석’들을 자식으로 두는 '쌤통형'
천형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붓 장난질로 없었던 사실을 거짓으로 적어 남겼다면 그 넘 역시도 ‘개 호로자식놈’이다.
유자광은 왜? 이러한 삶을 살아야만 했을까??
천첩출신의 서얼이 살아가기에는 조선의 정치사회는 너무도 두터운 벽이었고, 그 벽을 홀로 깨려는
유자광의 삶은 평생이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혹독하리만큼 자신에게 모질지 않고서는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유자광의 인생은 처음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워 세조의 특혜를 받을 때부터 ‘서얼’이란 이유만으로
훈구파의 견제가 시작되었고, 1468(예종 원년)에 ‘남이의 옥사’를 이끌어내면서 신세력으로 급부상
하게 되자 1507(중종 1년) 모든 훈작이 취소되고 흥양으로 유배될 때까지 아니 죽은 후 20년이 지난 1533년 훈작회복까지 60년 이상을 사림파의 집요한 비판과 끊임없는 반대 상소는 그칠 줄을 몰랐다.
세조, 예종, 성종에 이어 연산조까지 항시 왕의 특별한 배려를 받았지만 처음에 수구세력과 후에는
새로 등용된 사림파들과 끊임없는 충돌이 이어졌다.
사림파는 김종직의 문하로 영남 먹물출신들이라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3사(三司)에 주로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장악하면서 훈구파를 비판하여 왔다.
유자광은 천첩 출신의 서자로 출신성분에 누구보다도 열등감이 가지고 있는데, 항시 이러한 자신의
아픈 상처 ‘서얼출신’을 잡고 늘어지는 사림에 대한 마음의 앙금은 항시 독아(毒牙)를 품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유자광이 (1487년 경상도관찰사 시절??) 함양의 학사루에 걸어놓은 현판을 훗날 사림의
종주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며 쌍놈의 현판이라며 떼어서 태워버리자 김종직과 그 오당(吾黨:
우리당)들에게 원한을 넘어 증오를 갖게 된 것이다.
-> 추원재( 김종직 생가, 밀양 부북면 제대리)
1498(연산 4)년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이극돈, 임사홍 등과 사림파를 완전히
몰살시켰고, 이어 1504(연산 10년) 갑자사화에도 관련하여 사림의 큰 원한을 한 번 더 샀으니, 서로간
불천지 원수지간이 되었고, 이후 사림이 주도해온 조선의 정치사에서 유자광은 희대의 간신이요,
조선 제일의 으뜸 간신이란 호칭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유자광의 입장에서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림파의 존재는 May be 아귀와 같은 존재란 표현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유자광과 관련된 이전투구의 현장을 시기적으로 좀 더 살펴보자.
처음에는 수구세력이 먼저 유자광에게 ‘서얼’로 딴지질을 걸었다.
(※이하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대로 가감없이 간략히 내용을 옮긴 것이다.)
1)1467년,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우고, 변방의 야인까지 토벌한 공로로 병조정랑으로 승진.
=> 사헌부 지평 정효항이 불가하다고 아뢰고, 서얼출신으로 간관들이 탄핵하나 세조가 듣지 않았다.
정효항의 재차 반대하고 사간 박안성의 불가상소, 대사헌 양성지, 김지경 등이 서얼이라며 임명불가
탄핵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질책을 받자, 이번에는 타 직책으로 임명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역시 거절.
2)1470(성종 2년) 4월, 유자광의 伴人(=경호원) 박성간이 아우 유자석과 함께 유자광이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告하여 서소에 가두었다.
=> 대왕대비(정희왕후, 세조 비)의 비호로 15일 만에 무고로 풀려났다.
3)1476(성종 8년) 2/19,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거두는 것이 시기상조란 좌의정 한명회의 발언을
역으로 물고 늘어져 탄핵을 하였다. (수구파 대장 한명회에 대한 도전이자 복수)
=> 성종의 화해권유에도 불구하고 쌍방 간의 거듭되는 처벌 상소로 3월에 한명회는 좌의정을 사직
하였고, 이어 유자광은 파직을 당하면서 일단락되었다.
4)1477(성종 9년), 도총관(= 참모총장)에 오르다.
=> 사헌부 김영유는 첩의 자식으로 도총관은 부당하다며 상소가 올라오고, 계속해서 김승경, 윤 민 등이 상소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5)1478(성종 10년) 5월, 유자광, 임사홍 등이 파당을 만든다고 우부승지 이경동이 아뢰었다.
=> 유자광의 공신 직첩이 삭탈되고 동래부, 남원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3년 만에 회복하였다.
(※20년 후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도륙이 되자 이 때 유자광을 살려둔 것을 몹시 후회하였다.)
6)1481(성종 13년) 7월, 유자광이 작첩을 3년 만에 돌려받다.
=> 허 황, 채 수, 박경이, 이세필 등이 연이어 환급반대의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거절하였다.
7)1486(성종 18년) 2월, 최세현, 정광세 등의 반대 속에서도 재기용되어 행지중추부사가 되다.
=> 정언 정 윤, 대사간 한 언 등이 서얼과 노비의 후손의 과거응시 제한을 상소한다.
8)1487(성종 19년) 6월, 한성부판윤에 제수되다.
=> 또다시 의정부 및 윤 파, 이덕숭 등이 서얼의 한성부 당상관의 부당함을 상소한다.
왕이 듣지않고 거절하자 이번에는 부시장격인 한 환과 시장격인 유자광의 자리바꿈을 청한다.
9)1489(성종 21년) 10월, 장악원 제조가 되었다.
=> 장령 정석견, 최호, 민효증 및 사헌부, 사간원이 합동으로 반복해서 반대상소 및 해임안을 올렸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10)1491(성종 23년), 황해도관찰사, 특진관을 거쳐 황해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 사헌부 장령 양 면, 집의 이예견, 사간 안팽면이 임명에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1)1494(연산 즉위년), 국상과 모친상이 겹쳐 모친상을 따르도록 하였다.
=> 동년 5월, 모친상에 장정 100여명이 필요한 화려한 대여를 만들어 관가의 인부를 징발하였고,
장례길에 부조를 많이 받았다하여 국문하기를 청한다.
12)1498(연산 4년) 7월,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들어 상소를 올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유한 문장.’이라 보고하여 사림파를 제거하는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 김종직 종택 (경북 고령 쌍림 합가리 84, 개실마을 내 : 민속자료 62호),
♠ 무오사화(1498, 연산 4년)란?
:훈구파와 사림파의 반목 중에 연산 초 성종실록 편찬의 사초에 사림파의 종주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쓴 이극돈의 기록을 훈구파의 거물 이극돈이 보게 되었다.
전라감사 재직 때 성종의 초상 중임에도 향(香)을 받치지도 않고 기생을 데리고 놀았던 사실과 뇌물을 받았던 일들을 소상히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극돈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을 발견하고 유자광을 시켜 사림파를 탄핵하며 사화를 일으켰다. 한 마디로 이극돈, 유자광의 사감으로 사림파를 죽인 사건이다.
◆주동자: 이극돈, 유자광, 노사신, 윤필상 등
◆선왕 무록죄: 김종직( 부관참시),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 목, 허 반( 능지처참).
◆불고지죄: 강 겸, 정여창, 이수공, 정승조, 홍 한, 정희량( 곤장, 유배).
◆삽입방조죄: 김굉필, 이종준, 이 주,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유배).
◆사초 미보고죄: 이극돈, 유 순, 윤효손, 어세겸, 김 전( 파면)/ 홍귀달, 허 침( 좌천)되었다.
13)1499(연산 5년), 전복과 굴을 사사로이 진상하다.
=> 지평 권세형, 정언 윤은보가 진상에 대해 탄핵하며 3개월간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다.
14)1501(연산 7년) 8월, 유자광이 이극돈의 추천으로 오위도총관(= 수방사사령관)으로 삼다.
=> 대사간 최관, 장령 정인인 및 대간이 합사하여 잘못된 인사임을 아뢰다.
15)1501(연산 7년) 9월, 서거정이 저서에 1476년 한명회를 비판한 것은 잘못이라고 기술하다.
=> 유자광이 비난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줄기차게 유자광을 탄핵 하였다.
16)1504(연산 10년) 4월, 유자광이 일으킨 갑자사화로 잔존 사림까지도 거의 제거되다.
=> 사헌부 지평 유속이 유자광과 임사홍이 이극균과 친분이 있었음을 간하여 두 명 모두 직첩을
몰수당하고 충군(= 백의종군)시키려 하였지만 다음 날 연산이 거두어 취소하였다.
-> 페비윤씨 회묘( 연산군의 생모, 서삼릉 내 )
♠ 갑자사화(1504, 연산 10년)란?
: 이 사화는 왕과 척신세력이 부중세력(외척세력, 관료세력)을 제거한 정치투쟁으로, 연산은 1503년 이세좌(예조판서, 양로연 회배사건)의 불공사건과 이듬해 홍귀달의 불공사건(경기관찰사, 간택령 무시)으로 대간과 대신들을 왕을 능멸하는 집단으로 지목하고 있던 중 일어난 연산 생모 윤씨의 폐출과 사사사건에 임사홍이 불을 지피자 이를 기화로 연산은 대신들에게 보복을 하였고, 척신세력은 훈구 및 사림세력을 제거한 사건이다.
◆주동자: 폐비윤씨 어미 신씨, 임사홍, 신수근.
◆폐비 배척죄: 엄숙의, 정숙의( 직접타살), 안양군 및 봉안군 ( 유배 후 사사), 인수대비( 연산군의
패악질에 홧병이 나서 사망.)
◆폐비추승 항명죄: 권달수, 임희재( 참형), 이 행( 귀양).
◆폐비논의 찬성죄: 윤필상, 박 은,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 주, 김굉필, 이 주( 사형)
◆폐비논의 찬성죄: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 회, 이 파, 정여창, 남효온( 부관참시 및 가족과 제자들 모두 처벌.)
◆기타: 홍귀달, 주계군 이심원, 김처선( 참화)
이로써 무오사화 때 남은 신진사류까지 일소되어 유교적 왕도정치는 침체되고, 문화는 정체되어 연산의 패악은 그칠 줄을 몰라서 결국 중종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17)1505(연산 11년) 1월, 석결명(石決明: 굴, 결명자)을 왕에게 받치자 언관들의 탄핵을 받다.
=> 왕이 거듭된 탄핵에 못 이겨 탄핵한 언관들을 의금부에 조사하게 하여 4년 전에도 진상에 대해
비난한 안윤덕을 장(杖) 80, 김계행, 윤은보, 이 곤 등은 杖 70을 논정하여 보고했다.
18)1506(연산 12년) 1월, 무오, 갑자사화의 원흉이란 공론으로 대간들의 끊임없는 탄핵에 파직되어
있다가 판부사로 복직되다.
=> 복직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째? 사림의 씨가 말라 버렸나??
19)1506(중종 원년) 9월, 반정에 가담하여 연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여 정국공신 1등에 무령
부원군에 봉해지고 영경연사로 제수되다.
=> 이번에도 사림에서 무반응이었다. 반정 후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라서??
20)1507(중종 1년) 1월,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다.
=> 대간이 품계가 아님을 아뢰며 임명에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 2월, 유자광이 김종직의 잔당들이 비밀리에 중상하려하니 낙향을 상소하나 불허하다.
=> 4월, 지평 이사균, 정언 박거린이 고성현감, 창녕현감을 두둔한 일로 탄핵하다.
=> 4월, 대간이 합사하여 반정에 동참만 한 것을 탄핵하며 내쫓기를 청원하나 불허하다.
=> 4월, 홍문관 부제학 이 윤 및 대간이 합사하여 천재지변의 원인이 유자광, 임사홍 등 소인 배가 결탁하여 조정을 혼란케 한 때문이라며 영구히 내치기를 청하나 윤허하지 않았다.
=> 4/16일, 대간이 다시 유자광의 죄를 논하며 중법 처하기를 청하고, 유자광의 아들 유 방, 유 진 및
사위 손 동과 손자 유승건이 방자하게 횡행하는 죄를 다스려 유자광의 수족들을 제거할 것을 청하니
중의(衆意)에 따라 파직을 전교하다.
(※이 때가 69세로 정계를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이후 사후까지 사림의 ‘자빠진 놈 꼭뒤 차기’이다. )
=>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및 대간, 정충랑, 이 윤, 윤 임, 권숙균, 정 원, 민상안, 윤희손, 신 상, 조 삼, 등이 극형에 처할 것을 계속해서 청하나 벌주라는 간언을 모두 불허하다.
=> 4/23일, 의금부가 유자광은 광양, 유 진은 양산, 유 방은 산음에 부처하였다.
이후에도 사림의 탄핵과 상소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다른 곳으로 이배시킬 것을 명하다.
21)1508(중종 2년) 4월, 유자광을 석방시켜 고향에 보낼 것을 정승들이 의논하라 하다.
=> 대간, 홍문관, 서 후, 안팽수 등이 불가함을 아뢰자 조정의 동요를 이유로 불허함을 전교.
이후로는 4년간 잠잠하였고, 유자광은 유배지 생활 중 장님이 된 후 변군에서 병사한다.
-> 2008년 유자광 묘소 발굴현장 : 남원시 고죽동 313( 고산길 30- 17) 남쪽 30m 지점.
22)1512(중종 6년) 6월15일, 유자광이 죽었다 합니다... 청컨대 익대공신의 작호를 돌려주어 자손들이 예장하게 함이 어떠합니까? 공신의 예로 장사지내는 것이 가(可)하다.
=> 부제학 권민수 등이 계속 탄핵하며 거듭 상소하여 결국 왕이 재고하도록 하였다.
23)1513(중종 7년) 11월, 영의정 정광필이 상소하여 익대공신을 환급받다.
=> 홍문관, 대간, 경연관, 승정원을 비롯하여 박소영, 유 관, 이 청, 권 벌, 손중돈, 윤은보, 성세순, 손중돈, 소세양, 민수원 등이 다음해 정월까지 지속적으로 상소하자 결국 중종은 부원군, 6조판서, 한성부
당상, 총훈부 2품이상의 고관들에게 의논하게 하라 하교하였다.
결국 1514년 1월16일, 조정의 공론에 따라 유자광의 환급받은 원훈을 다시 삭제하였다.
24)1533(중종 27년) 8월, 유자광 손자 유승건의 상언(호소문)으로 할아비의 익대공신 환급의 가부를
의논하라 정원에 전교하다. (※유자광 죽은지 이미 20년이 지났다.)
=> 사헌부, 대간, 홍문관, 조인규, 대사간 정옥형을 비롯 삼정승과 좌찬성, 우참찬 등이 모두유자광의
녹권 지급을 반대하였으나…> 이후 유자광에 대한 기록이 실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2007년 1월, 영광유씨종친회에서 유자광의 묘역을 정리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최근에 들어 일기 시작한 유자광에 대한 역사 재조명의 반증이다.
시비의 단초를 제공한 쪽은 먼저 수구세력에서 ‘서얼’로 걸었고, 사림세력에서는 김종직이 함양
학사루 사건으로 원인제공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억울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 유자광 비석 및 江亭 건립 (2001년, 남원시 고죽동 )
靈光柳門의 주장을 들어보자… 유자광을 조작된 역사의 희생양으로 단정한다.
서거정 또는 남 곤이 지었다는 ‘유자광전’을 비롯하여 허 봉(허균의 兄)이 지은 해동야언의 ‘유자광전’,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이 모두 사림에 의해 조작된 글이라는 것이다.
특히 ‘남이의 옥사’에 대해서는 예종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한명회의 반대세력이 남이장군을 부추겨
세조의 장례 발인에 맞추어 구테타를 기도하려 하였으나 유자광의 반대로 발각되었고, 체포된 남이는 한명회의 국문을 받고 처형당했으니, 즉 유자광이 예종을 살린 것이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자광의 고변이 무고란 기록이 어디에도 없고, 이후 정치적 탄핵을 받을 때나
사후에 까지도 ‘무고죄’는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사림들이 만들어 낸 ‘야사’
에서만 남이장군에게 누명을 씌워서 죽인 간신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야사’ 즉 옛날이야기가 ‘실록’을 누르고 정사(正史)로 바뀌었다는 엉터리 야그란 소리다.
(진실로 실록에는 유자광의 '남이의 옥사' 고변에 대해 '무고'란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후 한명회세력과 대립되었고, 한명회가 죽으면서 순수 사림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는데,
연산조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사림들이 많이 희생되면서 원흉으로 치부되었다.
이것 역시 원인제공자는 바로 사림의 종주 김종직이란 것이다.
소위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사회문제로 비화되는 ‘왕따’ 내지는 섬나라 아이들의 ‘이지메’를
먼저 억울하게 당했다는 것이다.
('사화(士禍)'란 신진선비림들이 '화(禍)'를 당한 것을 줄여 칭한 것이다.)
반정에 동의한 것도 ‘변절’이 아니라 연산말기의 살인적인 정신병증을 말릴 길이 없어서 성희안의
제의를 받아들여 동의는 하였지만, 사실상 유자광이 이장곤, 박영문 등 외부의 군사조직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반정 주동자 박종원이 먼저 도움을 청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지만 중종반정 1년 후, 정치권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된 원인으로 궁극적으로는 사림과의 대결에서 인해전술로 밀고나오는 숫자싸움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였기 때문에 사림의 집요한 언론플레이에
밀리면서 결국은 여론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 몰락의 원인으로 해석한다.
천출이란 한계를 극복하여 출사하여 다섯 임금을 모시면서 권력을 쥐기 위한 지배세력 내 다툼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유자광이 타인에 비해 지나치게 간신으로 낙인찍힌 결정적인 이유는
정적이었던 사림세력이 조선말까지 권력의 중심에 서서 역사를 좌지우지한 바로 역사의 승리자,
역사의 기록자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후손이 억세게 출세하면 어느 정도 역사를 바로잡거나, 逆으로 조작도 가능하다.
1977년에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사육신으로 추가 헌창된 백촌 김문기선생을 들 수 있겠다.
사연이야 어쨌든 간에 사육신으로 결정할 당시 김영삼 前대통령은 야당 당수였었고, 김재규씨는 최고
실세 중앙정보부장직에 있었다고 한다.
김문기, 김영삼, 김재규 이들 모두가 같은 김녕(= 금령, 金寧)김문의 후손이다.
참고로 영광유씨는 2000년 인구조사이지만 총 428가구에 1,475명뿐이다.
◆유자광 비석, 하마비 외: 전북 남원시 고죽동 122- 4 (열린어린이집) 건너편 언덕.
◆유자광 묘소: 남원시 고죽동 313( 고산길 30- 17) 남쪽 30m 지점.
후기:: 참말로 사림들이 물고 늘어지는 형태가 징그럽게도 집요하다.
이런 아귀같은 인물들을 옆에 두지 않았다는 것에 행복해 하자.
이래서 우리네 부모님들이 “다른 사람 원한 사는 일은 절대로 하지마라!!”고 하셨던 것이다.
모두가 이런 우리네 조상님들의 요따우 꼬라지들을 보시면서 얻은 교훈이시다. - 了 -
|
첫댓글 하나아저씨 글만쓰고 사진 올리지도 못하고 꿈나라 헤메고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유자광님의 일대기 잘 보았습니다.
그렇겠네요. 사림들이 기록을 했으니 조작 가능하다에 찬성표~!
게다가 마지막 글~~ "다른 사람 원한 사는 일은 절대로 하지마라"
잘 새기고 갑니다.
쌤통이 아니라 씁쓸하기도 하고,
안간 등골이 서늘해지네요
줄서기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도,,,,,,
아귀같은 인간이 누군 줄 알아야 멀리하죠.
암튼 잘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올리신 글들을 한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으면서
때론 가슴에 비수처럼 와 닿은 이야기..
때론 살아가는 훈훈한 감흥에 감사를 드립니다.
마음 가득한 명절 되십시오...
'사화'란 신진 선비림들이 한꺼번에 화를 당한 일을 뜻한단 말씀.히는 모르고 만날 무오갑자기묘을사임진정유정묘병자신해기해병인신미쌈박질한 해당년도만 죽자사자 외웠던 국민핵교 때 기억이 그래도 젤루 오래 가네용.은 한문으로(전 느무 무식해요.)
대충 그러하리란 생각만 품었을 뿐..정
사화 외에 왜란 호란 양요도 같은 맥락으로다가..왜놈 또ㅔ놈 양놈..
이 댓글 외국인들은 안 보겄쥐.
군란은 군인들이..'경장'
참..하나님긴 글 사진 정리해 올려주심 수고 많으셨구요.또하나님께서도 행복하소서
하나
마자 마자요~ 딥따 뭔지도 모르고 외웠던 시절...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단어들이지요.
00경장, 00개혁.... 같은 의미로 굳이 '경장'은 낡은 것을 고치자. 정도의 의미라면 개혁은 좀 더 강한 의미로다
확 뒤집어삐~~ 같은 맥락으로 00유신... 역시 쇄신, 혁신 모두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독, 또 정독하렵니당...
참으로 괞찬았던 시절을 살다간 유자광 인가 봅니다.
서자 출신을 등용하여 정승의 반열에 까지 오르게 했다면 그 당시로선 왕의 엄청난 신념이었을 텐데....
인생사 공수레 공수거이거늘 왜들 욕심들이 그렇게도 다들 많으신지 욕심은 화를 부르고
읽는 저희들도 머리가 빙 돌 지경인데 이 많은 자료를 정리하시고 올리시는 하나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건강조심하시고 감사히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