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산행기 (845 미터)
늦가을의 끝자락에서 첫추위를 지내고 포근하고 화창한 날씨속에서 계룡산산행에 나서서 이산에서 제일 큰 가람인 갑사에서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로서 신라시대에는 화엄종의 10대 종찰의 으뜸 사찰에 해당되었으며 갑사 계곡의 단풍은 계룡8경의 하나라고 하는데 단풍철을 지나 지는 단풍을 아쉬워하며 낙엽을 밟으면서 울창한 숲에서 나오는 맑고 상쾌한 공기를 동반자로 연천봉고개로 올라갈때는 땀을 흘리기도 하였으나 학재선생은 “계룡산은 자기장이 강한 산이어서 몸이 가쁜하고 피로가 쉽게 풀리는 산”이라고 하였는데 모든 생명체들은 자석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마음마져 선계로 들어온듯 두둥실 날아다닐것같이 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늘에 닿아 있다는 연천봉에 올라서니 계룡산의 단정하고도 웅장한 산세가 눈에 들어왔는데 과연 산중의 산으로서 전망과 풍광이 빼어나게 수려하였다.
명산을 명산이게 하는 첫째 요인은 그 놓임새에 있다고 보며 천미터를 훨씬 넘어서는 고산이라 할찌라도 강원도의 어느 큰 산덩어리에 묻혀 있으면 드러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세상에 널리 알려질리도 없지만 반대로 사방이 활짝 탁 트인 평야 한가운데 솟은 산은 실제 높이야 대단치 않으면서 멀리 수십리 밖에서도 조석으로 우르러게 되는것이니 신화가 깃들고 전설이 감싸이게 되면서 그 이름이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다.
한반도의 동쪽보다는 서쪽에 유독 그런 산들이 산재하는 가운데 계룡산은 특히 유별나게 그 이름을 떨치는 산인데 천은 커녕 800미터급 높이에 지나지 않으면서 호서지방일대 말하자면 이산을 동서남북으로 감싸는 대전시내,부여,논산,공주,연기군에서도 한눈에 그 모습을 알아볼수가 있는데 차령산맥이 남서쪽으로 내려뻗다가 금남정맥으로 들어가는 끝자락에서 호서평야 한가운데 돌올하게 솟은 독립산으로 예로부터 나라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를 올렸던 명산으로서 신라시대에는 지리(남악), 묘향(북악), 태백(동악), 팔공(중악)과 더불어 오악중의 서악이요, 조선시대에는 묘향산(상악), 지리산(하악)을 잇는 중악이라 하여 신성시되던 산이었다.
연천봉고개를 지나서의 산행길은 능선과 봉우리를 조망하면서 탐승을 하면 되는 코스이니 눈을 즐겁게 하였고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는 귀도 즐겁게 해주었는데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하여 20여개의 봉우리가 제각각 귀공자같이 자태가 빼어났으며 천황봉과 관음봉사이의 쌀개능선은 디딜방아의 쌀개와 흡사하였고 좌우의 균형을 이루는 수정봉, 문필봉, 관음봉, 삼불봉등 모두 중후한 모습이면서도 단정하였다.
이런 모습의 산봉우리들을 풍수학에서는 자기성이라고 부르는 극히 귀한 형태로서 대성인이 훌륭한 인물을 낳고 기르는 기운이 서려 있다고 보았으며 계룡산이 수도가 되면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정인군자들이 계속 나오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격암유록”에도 이르기를 정인군자가 만드는 새 세상은 천국, 극락, 무릉도원같은 이상향이라고 했으며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성자, 선인처럼 살게 되리라고 하였고 이 엄청난 사건이 후천개벽으로서 물질주의가 극성을 떨 때에 새 시대가 열리리라 하였는데 지금 물질주의가 온 세계를 지배하니 그 때가 임박하지 않았을까도 생각되었다.
지금의 3군 본부가 있는 계룡산 안자락인 신도안은 6백년 전에도 도읍지가 될뻔 하였는데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한때 이곳으로 천도하려 했던 곳으로 이성계의 신하 중에 권중화라는 사람이 명을 받고 명당을 찾아 삼남지방을 두루 다녔는데 충청도땅에 들렀다가 계룡산의 산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산의 기상이 매우 비범하기 때문이었고 한 나라의 도읍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권중화는 계룡산의 산세를 자세히 그려서 이성계에게 바쳤는데 그것을 받아본 이성계도 계룡산에 마음이 끌려서 곧 바로 직접 살펴보기 위하여 무학대사와 길을 떠나서 계룡산에 도착하여 5일동안 머물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명당이었고 한나라의 왕이 거하여 나라를 다스릴만한 곳이었다.
이성계는 계룡산으로 천도하리라 결심하고 개경으로 돌아가서 바로 천도 계획을 세우고 새 도읍 건설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부역으로 대궐터를 닦는다, 주춧돌을 다듬는다 하여서 조용하던 산골짜기가 갑자기 부산하여졌다.
한데 계룡산 천도 계획은 곧 신하들의 반대에 부딛혔다. 하륜등이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계룡산 신도안이 도읍터로서 적합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고 또 강을 끼고 있지 않아서 중요한 교통수단인 배가 드나들 수 없는 등의 이유로 계룡산 천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한양땅에다 새 도읍을 세웠는데 계룡산은 이씨왕조가 들어올 땅이 아니었다.
성자들이 만드는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예비된 땅이기 때문이었다.
관음봉밑 온온한 장소에서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고 삼불봉 능선을 완상하면서 산행을 하였는데 국립공원답게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능선길도 철계단과 나무 계단을 설치해 놓아서 안전하게 오르내릴수 있었으며 능선 암벽의 수백년 이상은 됨직한 푸르고도 싱싱한 미인송은 이산의 성스러운 지기를 받아서인지 마치 요새 유행하는 아이돌그룹의 대명사인 소녀시대나 원드걸스들의 야외 공연같이 예쁘고 싱그러운 모습으로 늘 푸른 자태를 뽐내며 산행객들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계속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산세를 감상하면서 동학사 계곡으로 내려오니 수행자의 아름다운 자취가 깃든 남매탑(오뉘탑)이 일행들을 맞아 주었는데 정식 이름은 “청룡사지 쌍탑”으로서 7층 석탑은 백제 왕족 출신의 오라버니이고 5층 석탑은 예쁜 누이동생 탑이라고 하는데 “조선사찰전서”에 나오는 전설에 따르면 백제가 망하고 그 왕족중의 한사람이 이곳에 초막을 지어 토굴을 파고 수도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에 소리가 나서 밖에 나가보니 큰 호랑이가 한 마리 쭈그리고 앉아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스님한테 무언가 호소하는듯 하여서 스님이 가까이 다가가니 호랑이가 입을 딱 벌렸다.
스님은 호랑이 목에 뼈가 걸려 있는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호랑이 입에 손을 들이밀어 보니 짐작데로 손에 잡히는것이 있었는데 꺼내보니 짐승의 뼈였다.호랑이는 감사의 표시로 몇 번이나 머리를 꾸벅인 다음 어디론가 떠났는데 얼마 후에 그 호랑이가 또 스님을 찾아 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호랑이등에 예쁘게 생긴 처녀가 업혀 있었고 호랑이는 처녀를 내려놓고 바로 떠났다. 처녀는 깊은 병이 들어 있었는데 스님은 처녀를 자신의 초막에 살게 하여 극진히 돌보아 줬으며 어느듯 처녀는 병이 다 나았다. 그 사이 처녀의 가슴에는 스님을 향한 깊은 사랑이 싹텃으며 연모의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 졌으나 처녀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밝힐수가 없어서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스님은 처녀가 연모의 정 때문에 괴로워 한다는 것을 알아챘고 그래서 처녀에게 의남매가 되어 평생 함께 수행을 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이성간의 애욕은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이고 사람을 윤회의 업보에 잡아 가두는 독이라며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자고 설득을 하였더니 처녀는 스님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스님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지낼수 있는것만도 크나큰 복이라고 생각하였다. 두 사람은 열심히 정진하였고 처녀는 어느새 애욕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애욕을 떨치고 나니 마음에 걸림이 없었다. 푸르른 하늘에서 자유로이 훨훨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온갖 번뇌가 애욕과 함께 사라졌다. 얼마 후 스님과 처녀는 함께 찬란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자유자재한 삶을 누리다가 열반에 들었으며 남매탑은 이 두성자를 기리려고 후세 사람들이 세웠다고 한다.
그후 계곡을 내려와서 신라 선덕여왕 시대에 화의화상이 창건한 동학사가 나왔는데 여스님들이 수행하는 비구니 도량으로서 동학사의 주산은 삼불봉인데 학이 알을 품고 있는 비학포란형의 산세이며 학은 고고함을 상징하는 새로 이런 형태의 명당은 고매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낳고 기르는바 성정이 샘물처럼 깨끗하게 잘 닦인 정인군자들을 배출하는 터일 것이다.
동학사계곡도 깊었는데 이 계곡도 워낙 가문 날씨 탓인지 개울 물이 말라 있었으며 하산후 동학사 주차장에서 먼저 하산한 일행들이 구수하고 시원한 어묵탕을 끓여 놓아서 모두 둘러 앉아서 어묵탕과 라면으로 하산주를 하였는데 삽상한 산정기를 듬뿍 받은 탓인지 모두 기운이 넘쳐 보였으며 특히 김인수동문은 평소에도 활발하지만 오늘따라 국정자문회의 의장같이 호탕한 입담을 과시하였다.
그 후 대구로 향하였는데 대구에서 출발한 32명 외에 박상선 전회장과 박종석 전무의 연락으로 대전에 거주하는 32회 동기인 이용응교수(상좌원)와 이장현 동기회 카페주인장 그리고 학재선생 이재복까지 산행에 참가를 해서 반가웠고 이용응교수는 전날 한라산 설산을 다나다가 바로 왔다고 하였는데 산사랑은 바로 이런것 아닐까 생각되었다.
정반수회장님의 제안으로 버스가 이동하는 막간의 시간을 활용하여 좋은 이야기도 들었는데 일본 송화전기의 창업자인 마쓰시다 고노스께의 가난하고, 허약하고, 못배운 세가지의 불행을 불행이 아니라 은혜로 생각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고 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아흔넷까지 건강하게 장수할수 있었고 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데에 노력하여 많은 지식을 얻었으며 훌륭한 일을 한 일본 굴지의 기업 총수의 좌우명같은 얘기를 들었고 귀로에는 김석삼 경대공대교수의 과학기술과 기계공학에 대하여 유익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쉬는 시간에 지식과 경험담은 마음의 삶을 풍요롭게 하게 될것이니 또 하나의 즐거움이 배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