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길思 挑戰
2019년 8월 19일 오후 08:30 - 수정됨
🇷 교과서에 없는 한민족 성씨의 역사 🇷
🔥이것이 한국사(韓國史)다.🔥
교과서에 없는 한국인(韓國人)의 역사(歷史)를 수록했다.
한국(韓國) 성씨(姓氏)의 역사(歷史)는 우리 가문(家門)의 역사이자 한국인(韓國人)의 역사다. 조상들의 거쳐온 모습과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록을 정리했다.
약 293개 성씨의 1,041개 문중별 유래부터 사적, 유적, 인물, 문학, 정치, 경제, 과학은 물론 각 성씨의 이야기를 통해 한민족의 탄생에서 부터 현존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역사교과서 이상의 광범위한 역사를 살펴보자. / <❤824💘>
657. 이[李]氏 / 개령[開寧]문중의 유래(由來) 요약 소개 :
개령이씨는 조선시대에 이철(李哲, 1596생)이 1637년(인조 15)무과(武科) 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보던 과거) 병과(丙科)에 급제하는 등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2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명 등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개령(開寧)은 경상북도 김천(金泉)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231년(신라 조분왕 2)에 신라가 감문국을 공격하여 병합하여 감문군을 설치하였다. 687년(신문왕 7)에는 개령군으로 고쳐 사벌주(沙伐州:757년 상주로 개칭)의 속현이 되었고,1172년(고려 명종 2)까지 상주(尙州)에 속해 있다가, 감무(監務작은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개령.김산.지례와 성주의 일부를 김천군으로 통합하면서 개령군에 속했던 부곡면과 서면이 개령면으로 통합되었다. 김천은 1949년 김천시로 승격되고, 김천군은 금릉군(金陵郡)으로 개편되었다가, 1995년 금릉군을 병합하여 김천시가 되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개령이씨는 1985년에는 53가구에 218명이었고, 2000년에는 588가구에 서울시에 356명, 부산시에 257명, 대전시에 34명, 경기도에 341명, 충북도에 225명이 집성촌을 이루었고, 충남에 22명, 전북에 14명, 대구시에 92명 등 총 1,927명이었다.
< "한민족 성씨의 역사(韓民族 姓氏의 歷史)"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