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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2014년 8월호) ‘이케다 다이사쿠 칼럼’
루이 나폴레옹의 부인 프랑세즈와의 만남 ①
불굴의 혁명정신,
보나파르트의 전통을 표상하다
참호에 머물러 있는 쪽이 진다, 치고 나가라…
영광과 몰락, 승리와 패배를 초극한 불멸의 기개
1993년 가을 도쿄 후지미술관에서 열린 ‘大나폴레옹展–영웅의 생애와 궤적’ 개막식에 참석한 이케다 다이사쿠 SGI회장(맨 오른쪽)과 프랑세즈 나폴레옹 여사.(왼쪽 바로 옆)
프랑세즈 나폴레옹은 1926년 마르세유 명문가에서 태어나 알릭스 드 포레스타라는 이름을 얻었다.
194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막내 동생인 제롬 공(公)의 직계 자손 루이 나폴레옹 공과 결혼, 나폴레옹 비(妃)로서 남편과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며 각종 사회복지사업에도 힘써왔다. 현재는 나폴레옹 집안 장손의 어머니다.
나폴레옹. 그 이름에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다. 사람을 무심코 다가가게 하고 들여다보게 하는 흡인력이 있다. 왜 그런가?
“왜 나폴레옹은 바쁘게 뛰어다니는 도쿄의 많은 사람을 이토록 매료시키는 걸까요?”
프랑세즈 나폴레옹이 청중에게 물었다. 1993년 가을, ‘대(大)나폴레옹전(展)’ 개회식에서다.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의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1800년 작). 1800년 5월, 나폴레옹이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할 때의 모습이다.
‘병사 4만 명’에 필적한 나폴레옹
“15년 전에 적십자 활동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저는 긴자의 지하철역으로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하철역 벽 전면에 나폴레옹 황제의 포스터가 수십 장이나 붙어 있었습니다.
저 유명한 근위대 사냥 복장을 한 나폴레옹이었습니다. 하지만 조끼 안에 손을 넣은 모습이 아니라 조끼에서 선전용 신용카드를 꺼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전시장 도쿄 후지미술관에 정겨운 웃음소리가 번졌다.
“프랑스에서 먼 곳인데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옆얼굴은 일본에서도 친숙하구나 하고 제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폴레옹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무엇을 불러 깨우는 걸까요?”
나폴레옹 비의 남편은 당시 나폴레옹 집안의 주인이었다.
황제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롬 나폴레옹 공(베스트팔렌 왕)의 4대손이다. 남편이 병중이어서 그녀가 나폴레옹 집안을 대표해 일본을 방문한 것이다.
“그것은 코르시카 출신의 젊은 시골 귀족이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성공 때문일까요?”
나폴레옹 비의 목소리는 따뜻하지만 힘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전설적인 저 정복자의 힘 때문일까요?”
나폴레옹 한 사람의 존재는 ‘병사 4만 명’에 필적한다고 모두 두려워했다.
“아니면 일본인이 나폴레옹의 ‘건설적인 사상’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까요?”
나폴레옹 비는 나폴레옹의 ‘건설적인 사상’의 예로서 프랑스혁명의 혼란을 수습한 ‘제1집정’ 시대를 언급했다.
제1집정은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이다. 나폴레옹은 몇 사람의 왕이 1세기에 걸쳐 지배한 것보다 더 많은 업적을 3년 동안에 이루어냈다.
‘프랑스 민법전’은 지금도 여전히 프랑스 민법의 골격이고, 그가 창설한 ‘프랑스은행 시스템’은 1936년까지 계속되었다. 교육기구, 세제 개혁, 다리·도로·항구·운하·항만·하수도 시설, 증권거래소, 근대적인 공장 육성….
“얼마나 훌륭한 르네상스였나요!”
‘나폴레옹 대통령’은 국채를 발행하지 않았다. 프랑스사에서 유일한 예다.
정치가로서도 뛰어났다. 군인으로서는 상승(常勝) 장군이었다.
나폴레옹은 “‘이것은 무리입니다’ 같은 말 따위는 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전에 ‘불가능’이 무엇이라고 나와 있는지 아는가? ‘바보’라고 나와 있다!”
결과적으로 ‘할 수 없었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이미 진 것이다.
겁쟁이 인간에게는 어떤 일이든 ‘불가능’한 일이 된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해진다
환경이 나쁘다고? 환경이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이 환경을 만든다!
나폴레옹은 어떤 일을 하든 먼저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고 일념을 정했다.
싸우는 이상에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다. 이길지도 모르고 무리일지도 모른다. 일단 해보자.
나폴레옹에게 어정쩡한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일단 목표를 정하면 다음은 완벽하게 준비했다.
전투에 나서면 나폴레옹처럼 ‘대담’한 인간도 없지만, 싸우기 전에는 나폴레옹처럼 ‘세심’하고 ‘소심’한 인간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병사의 특징이나 전쟁터의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넣었다.
필요한 탄환 개수부터 병사의 양말 수까지 정했다. 음료와 의약품 준비, 빵값 변동, 목적지까지의 경로, 지형, 소요시간, 마을 인구까지 파악했다.
“천재란 다른 말로 공부라고 한다.”
깊이 생각하는 나폴레옹은 ‘우연’까지도 계산에 넣었다.
우발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 만에 하나 퇴각할 경우 어디를 거점으로 할까?
나폴레옹은 ‘확실한 사실’만을 가지고 사색했다.
‘아마 이렇겠지.’ ‘그건 어떻게 될 거야.’ ‘누군가가 하겠지.’ 이 같은 환상은 모두 버리고 임했다.
이렇게 언제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폴레옹은 당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나폴레옹은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긴 셈이다.
먼저 자신의 ‘일념’ 속에서 이기고, 더 나아가 자신의 ‘두뇌’ 속에서 이긴 셈이다. 그리고 일단 움직이면 질풍처럼 맨 앞에 섰다.
나폴레옹은 말 위에서 식사하고 말 위에서 잘 수도 있었다. 병사와 함께 감자를 먹었다.
나폴레옹은 제롬 공(베스트팔렌 왕)에게도 말했다.
지도자가 ‘왕’이면 이길 수 없다고.
“첫째도 병사여야 하고 둘째도 병사여야 한다. 셋째도 병사여야 한다.”
나폴레옹의 전훈(戰訓)은 불멸의 진리다.
“참호에 머물러 있는 쪽이 진다. 치고 나가라!”
나폴레옹 비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일본에서 나폴레옹의 영광의 궤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에 관해 참으로 세밀하게 공부했다.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 된 요시다 쇼인도, 사이고 다카모리도 확실히 나폴레옹에게 고무되었다.
단 한 사람의 인간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 역사를 바꿀 수 있는가! 좋아, 그렇다면!
지난 2008년, 1500여 명의 유럽인이 폴란드 푸오츠크에서 19세기 군복을 입고 1806년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벌인 전투를 재연하고 있다. 푸오츠크 전투에서는 3만5천 명의 프랑스군이 6만 명의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황제를 배신한 자들의 추악한 처신
문학계의 발자크도 음악계의 바그너도 각자의 세계에서 “나는 나폴레옹이 되리라” 하고 떨치고 일어섰다. 나폴레옹이 할 수 있는데 내가 못할 리 없다. 같은 인간이지 않은가.
지금 21세기의 큰 문제는 개개인의 ‘무력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한 사람이 무엇을 한다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나 나폴레옹을 우러러보면 사람은 자기 안에서도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하고, 지금까지의 자기보다 ‘키가 조금 자란’ 것처럼 느낌을 갖는 것은 아닐까.
‘대나폴레옹전’은 국외에 반출할 수 없는 비보(秘寶) 등 약 400점으로 이루어진 ‘파란만장한 영웅의 대서사시’이다.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영웅의 폭넓은 업적을 조명한 전시회였다. 전국에서 2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관람했다.
나폴레옹 비도 “정복자로서 역사만이 아닌, 나폴레옹의 진정한 업적을 더듬는 전시로군요. 이런 전시는 유럽에서는 없었기에 참으로 기쁩니다. 유럽에서도 개최하고 싶을 정도입니다”라며 기뻐했다.
또 나폴레옹 비는 태자궁을 방문하여 미치코 황후와 만나 ‘대나폴레옹전’ 도록(圖錄)을 황후에게 건넸다고 들었다.
개회식이 끝난 뒤, 일행을 도쿄마키구치기념회관에서 맞이했다. 이 회관에서 맞은 ‘첫 손님’이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생생합니다. 남편도 이번 전시회를 매우 기뻐하리라 생각합니다.” “나폴레옹 공은 연세가 어떻게 되셨지요?” “이제 곧 여든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1812년에 그린 <서재에서 선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이 그림이 국민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나폴레옹 비는 생기가 있었고 우쭐대지 않았다. 기품 속에서 넘치는 의지력을 느꼈다. 도쿄 도내를 시찰할 때는 재빨리 흰 운동화를 사 신고 정력적으로 돌아다녔다고 들었다. 도민의 부엌을 보여 달라며 아침 일찍 쓰키지 도매시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대화는 잊지 못할 ‘나폴레옹 강의’로 이어졌다. 내가 물었다.
“나폴레옹은 왜 그토록 성급하게 모스크바를 목표로 삼았을까요?”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이길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요?”
동석한 나폴레옹 재단의 구르고 회장이 대답했다.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 섬까지 나폴레옹을 수행한 구르고 장군의 후손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까지 정복한 나라는 수도를 장악하면 전부 정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달랐습니다. 작전이 틀어진 것이지요.
처음에 나폴레옹 군은 빨리 결말을 지으려고 러시아군을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군이 퇴각을 거듭해 본격적인 전투를 할 수 없었지요. 게릴라전뿐이었습니다. 보로디노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눈보라가 몰아치고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자 퇴각한다.
여기서부터 나폴레옹 제국은 기울어졌고 황제는 퇴위로 내몰렸다.
엘바 섬에 유배! 황제는 끝장이다!
처절하게 싸웠던 노병들의 투혼
위험을 알아차리고 도망치는 쥐처럼 사람들이 우르르 도망쳤다. 황제에게 은혜를 두텁게 입은 자일수록 재빠르게 배신했다.
“자, 일찌감치 ‘저놈하고는 상관없는’ 척해야 한다. 아니면 불똥이 여기까지 튈 거야. 정말이지 성가신 일이다!”
요령 좋은 인간은 당장 험담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전부터 그놈은 가짜라고 했던 거야. 내가 말한 대로지?”
나폴레옹이 승리했을 때 천재라고 부르던 사람도 패배하자 사기꾼이라고 불렀다. 나폴레옹의 대담함은 광기이고 지력(智力)은 교활함이고 불굴의 의지는 추악한 집착이라고 했다. 아주 작은 벌레 같은 인간의 모습이여!
개중에는 성실한 사람들도 있었다. 근위대의 노병들이다. 그들은 나폴레옹을 배반하는 행위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저를 엘바 섬으로 데려가주세요!” 희망자가 몰려들었다.
“데려가주시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들은 재산도 없고 지위도 없었다. 그뿐인가, 추위에 꽁꽁 얼고 비이슬을 맞으며, 때로는 굶기도 하면서 만신창이가 되어 전 유럽을 나폴레옹과 함께 전전(轉戰)했다. 모스크바에서 퇴각할 때도 그랬다. 그들은 추격하는 적과 싸우며 눈과 얼음 속을 몇 백㎞나 걸었다.
살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은 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을 때도 잠을 자지 않았다. 너무 피곤하고 고생에 익숙해져 쉬는 습관이 몸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 정도로 철저히 싸웠다.
리투아니아 전장에서 그런 노병들에게 한 소년이 물었다.
“여러분은 나이가 아주 많으시네요? 도대체 왜 그 나이에 나라를 떠나 왔나요? 게다가 이렇게 멀리까지 어떻게 오셨나요?”
노병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저분(나폴레옹)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지. 저분을 혼자 가게 할 수 없어서 말이지.”
이것이 나폴레옹 군이었다. 그들은 집을 버리고 청춘을 바쳐 목숨 걸고 10년, 20년을 함께 싸웠다. 그리고 황제가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도 다시 고국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프랑스 정규군도 아닌 상황에서 엘바 섬에 가면, ‘조국을 배신한 자’라는 오명을 쓸 수도 있을 텐데….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나…?” 하고 나폴레옹이 달래도 그들은 듣지 않았다.
“폐하, 저는 엘바 섬에 가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함께한 저의 ‘권리’로써, ‘명예’로써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충성스러운 병사가 곁에 있다는 것은 어떤 전승(戰勝)보다 더한 ‘나폴레옹의 영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음 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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