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
■ 조선총독부 청사(朝鮮總督府廳舍 Japanese General Government Building)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시행한 최고 행정
관청인 조선총독부가 사용한 건물
■ 조선총독부 관사(朝鮮總督府官舍) ; 조선총독부와 유관 기관의 관리들을 위해 지어진 주택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35년의 식민 통치 기간 동안에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와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 2곳과 남산 왜성대와 용산, 경무대의 총독 관저 3곳을 비롯하여 다수의 관사를 건립하였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한일 병합 조약에 의해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1907년에 건립된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총독부 청사로 전용하였다가 사무 공간의 부족으로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한 터에 신청사를 건립하였다. 조선 총독의 관저는 남산 왜성대의 통감 관저를 1910년부터 관저로 사용하였고 1908년에 건립된 용산의 관저를 별도로 운용하였으며 1937년에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지역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다. 한편 1910년 이후 식민 통치 기구가 정비되면서 조선에 체류하는 일본인 관리의 수가 증가하자 이들을 위한 관사가 대량으로 건설되어 보급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는 미군정청에 인계되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정부가 청사와 관사를 다시 인계받아 대통령 관저, 정부 청사,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청사와 관사의 일부가 파괴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 일제 강점기의 잔재 청산을 이유로 그때까지 현존하던 청사와 관사를 철거하였다.

왜성대 총독 관저

왜성대(倭城臺)는 조선시대의 지명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과 회현동 1가에 걸쳐 있던 지역을 가리키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한 데서 유래되었다 왜성대에 대한제국 때에는 일본 공사관이 있었고 1907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통감부 청사가 위치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통감부 청사가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되었다.그 부근에 숭의여자고등학교·숭의여자대학·리라초등학교 등이 있다

▲왜성대 총독 관저 1893년완공(철거상태)

▲왜성대 총독부 청사

▲통감 관저 (1906년)
일본은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 한성조약 제4조에 의거해 공사관 부지와 건물의 공사비를 조선 정부에 요구했다. 1893년에 남산 북쪽(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2-1)에 공사관 건물을 신축하였고, 1906년 2월에 한국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통감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1907년 1월에 통감부가 남산 왜성대의 신축 청사로 이전하면서 기존 청사는 통감 관저로 전용되었고 1910년 이후에는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다

▲일본 공사관 (1900년경)
◀요시히토(嘉仁);다이쇼 천황( 大正 天皇, 1879년 8월 31일 ~ 1926년 12월 25일)은 일본의 제123대 천황으로 본명은 요시히토(嘉仁), 어릴 적 칭호는 하루노미야(明宮)이다.
1907년 10월 16일에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嘉仁)가 관저를 4일간 숙소로 이용하였다. 1908년에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가 새로운 통감 관저를 설계하였으나 같은 해 용산에 가타야마의 통감 관저가 들어서면서 계획으로 끝났다.

▲왜성대 총독 관저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에 제3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관저 2층에서 을사조약을 조인하였다.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가 경복궁 뒤편의 경무대로 옮겨간 이후 왜성대(倭城臺) 총독 관저는 역대 통감과 총독의 초상과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으로 개편되어 1940년 11월 22일에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시정기념관으로 개관하면서 을사조약을 체결한 공간을 기념하는 전시 공간인 병합조인실이 설치되었다
광복 이후 1946년 4월 25일에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의 주도에 의해서 국립민족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가 1950년에 국립박물관 남산 분관으로 흡수되었다. 1954년 6월에 연합참모본부가 신설되자 청사로 사용하였고 국립박물관은 석조전으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이후 건물이 언제 철거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 서울종합방재센터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다목적 광장이 건물의 위치로 추정된다
#송석하(宋錫夏, 1904년 10월 11일 ~ 1948년 8월 5일)는 한국의 민속학자이다. 호는 석남(石南).경상남도 울주군(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출신이다. 1920년에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에 도쿄 상과 대학에 입학했으나 1923년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자 귀국했다. 1932년에 손진태, 정인섭과 함께 조선민속학회의 발기인 가운데 하나로 참가했으며 1933년 1월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했다. 1934년에는 진단학회의 발기인 가운데 하나로 참여했다. 해방후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를 지냈고, 1945년 9월 15일 조선산악회 창립에 관여해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47년 8월에는 울릉도 학술조사대 대장을 맡았다. 고혈압 때문에 당시 독도 조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1946년 4월 미군정을 설득해 소장 유물 1천여점을 기초로 국립민족박물관을 설립했다. 1948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